한 달 뒤 제주 전역에서 벌어지는 일,

○○○, 자식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

by 홍어른

봄비와 함께 찾아오는 손님,

제주에는 3월 말부터 4~5일 간 반가운 봄비가 내리며 겨우내 메말랐던 땅을 적셔준다. 이 비를 일명 '고사리 장마'라 부른다. 봄비와 함께 찾아오는 제주의 손님, 바로 '고사리'다.


봄비가 내린 다음날부터 5월 말까지 두 달 동안 산등성이, 오름, 너른 숲 가시덤불 사이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햇 고사리를 만날 수 있다. 화산섬의 풍요로운 토양에서 자라는 제주 햇고사리는 국내 여느 지역보다 품질이 월등하고 맛이 좋아 비싸게 판매된다. 봄 한철에 시간을 내어 고사리를 꺾어두면 일 년 내내 차례상에도, 밥상에도 푸짐하게 올릴 수 있고, 쏠쏠한 부수입도 돼주기에, 이 시기에는 제주 삼춘*들의 마음이 분주해진다.


*제주 방언 ‘삼춘’은 표준어의 ‘삼촌(아버지의 남동생)’과 달리, 성별과 친족 여부와 크게 무관하게 어른(윗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쓰인다. 따라서 제주에서는 ‘삼춘 어디 갑서?’처럼 어르신에게 인사하거나 말을 걸 때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출처 : 국립국어원]


고사리는 흔히 나물을 캔다, 딴다는 표현 대신 '고사리 꺾는다'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흙과 가시덤불 사이로 고개를 내민 고사리 아래 부분을 잡고 살짝 꺾으면 톡 하고 부러지기에 꺾는다고 표현한다. 고사리를 캔다고 하면 외지인, 꺾는다고 하면 현지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 부부도 봄 시즌이 되면 고사리 꺾기에 여념이 없는 도민으로, 어느새 고사리 꺾기 4년 차다.

(세계여행 전 한 달 살기 할 때도 고사리를 꺾었다.)

굳이 레벨을 따지자면 중고수쯤 되는데, 나만의 고사리 스팟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하수 - 중수 - 고수로 나뉜다. 첫 해에는 인터넷 검색 후, 유명하다는 오름에 올랐다. 말 그대로 남들 다 아는 장소에 가서 고사리를 꺾었다. 손 빠른 제주 삼춘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남아있는 잔챙이들만 꺾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신났던 하수 시절을 지나, 제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만의 고사리 비밀 스팟을 서너 개 갖고 있는 중고수가 되었다.


남편과 둘이서 한두 시간 손품을 팔면 20L짜리 비닐봉지 가득히 제주 고사리를 꺾어온다. 햇볕이 덜 드는 가시덤불 아래로 통통하고 키가 큰 고사리를 발견할 때면 허리 디스크 환자임을 망각하고 미친 듯이 고사리를 꺾는다. 마치 이 세상에 고사리와 나 단둘만 남아있는 심정으로, 손으로는 고사리를 꺾으면서도 주변의 고사리를 찾는 현란한 멀티 태스킹 기술까지 발휘하게 된다.


남자들이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자려고 누우면 천장 위로 당구공들이 굴러다닌다는데, 나는 통통한 먹고사리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고사리 중독 상태를 경험했다. 아주 중증이었다. 볼일을 보러 이동하는 와중에도 차도 멀리에 있는 숲 속의 고사리 밭이 눈에 띄면 지도에 저장해 두었다. 오전에 아이가 등교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고사리를 한 아름 꺾어오고는 했다.


20L 봉투에 가득한 고사리, 씽크를 가득 채운다.



나도 가마솥과 아궁이를 갖고 싶어!

고사리는 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의 작업이 더 중요하다. 고사리를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은 후, 줄기가 충분히 부드러워지도록 삶아 물기 제거 후, 햇볕에 바짝 말려서 보관한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건고사리들은 모두 이러한 작업을 거친 상품들이다. 꺾는 일이 힐링이었다면, 삶고 말리는 과정은 꽤 수고로운 일이다. 집에 있는 가장 큰 곰솥을 꺼내봤자 8L 곰솥이 전부이니, 나눠서 삶고 데치는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잘 삶은 고사리는 옥상이나 볕 좋은 마당에 널어 말린다. 일조량이 많은 제주의 맑은 날에는 반나절이면 고사리가 바짝 마른다.


처음엔 돗자리를 깔고 말렸다. 제주의 강한 바람에 돗자리는 정신없이 나부꼈고, 고사리들은 옥상 바닥을 나뒹굴었다. 할망들이 사시는 돌집 너머를 들여다보니, 다들 채반이나 땅바닥에 그냥 말리시더라. 어차피 건고사리를 먹을 때 여러 번 씻고, 물에서 24시간 이상 불려서 요리하니 흙먼지가 묻더라도 상관없단다.

나도 제주 삼춘들처럼 나무 떼는 장작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으로 한꺼번에 고사리를 삶고 싶어!! 고사리를 위해서라도 주택으로 이사 가야 하나?


깨끗하게 세척 후 8L 곰솥에 삶은 후
햇살 좋은 옥상에 말리면 건 고사리 완성!




누가 우리 남편 좀 말려줘요.

고사리를 씻어서 삶는 과정은 내가, 잘 펼쳐서 말리는 작업은 남편의 몫이다. 나름 분업화가 체계적인 편.

옥상에 고사리를 말리러 간 남편이 오지 않아 올라와보니, 고사리 하나씩 펼쳐 줄을 세우고 있다. 일직선으로 하나 하나 곧게 펼쳐서 말리면, 건 고사리를 보관할 때도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 좋지만, 10분이면 끝날 일을 두세 시간씩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


그는 고사리로 미술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Thread에 올린 글에 '압화 작품'을 만드는 줄 알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다들 작품이라며 남편의 이야기가 재밌다고, 유튜브 쇼츠 채널에서 남편의 에피소드로 개그 쇼츠를 제작했다. Thread 글을 본 이웃들이 남편의 건 고사리를 구매하고 싶다고 메시지가 왔다. 친정엄마 지인들의 고사리 구매요청이 쇄도했다.


https://youtube.com/shorts/zyErbNS17qg?si=adCRnr-nEKHeT8c2




고사리 꺾어 테슬라 주식 매수?!

친정 엄마 계모임, 동창회원들의 제주 건 고사리를 구매 요청이 끊이지 않는단다. 아줌마들의 카르텔에 고사리가 추가된 듯하다.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 등 아줌마들의 카르텔은 몹시 귀하고 대단한 편, 이런 카르텔이 궁금하다면 사우나 할머니들 모임을 귀동냥해보자.)

친정 엄마께서는 허리를 조심하되, 고사리를 최대한 많이 꺾어두라 하셨다. 우리 부부가 두 달간 하루 2시간을 투자해서 채취한 30kg의 고사리를 엄마께서 통째로 사주셨다. 고사리를 팔아 번 돈으로 테슬라 주식 2주를 매수했다. 조기 은퇴한 부부의 즐거운 소일거리로 재테크에 일조했으니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다.






어느덧 제주 고사리 꺾기 4년 차를 맞이한다. 봄비를 맞아 키가 훌쩍 커버린 고사리를 만나게 되겠지. 올해에도 바구니를 수북하게 채우고, 신명 나게 고사리를 삶고 햇볕에 널며 제주의 봄을 만끽할 것이다. 육지 사는 가족들에게 우리 부부의 정성 담은 선물 보따리를 보내고 싶다. 고사리 꺾다가 뱀을 만나지 않고, 다치지 않고 안전한 봄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새로운 고사리 스팟을 발견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반가운 봄비와 함께 얼른 4월이 오기를 기다리며..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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