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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어른 Oct 08. 2024

500일 세계여행 후 아이의 제주 적응기

공간이 갖는 힘, 긴장 완화, 부부 싸움, 엄마아빠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23년 12월 입도 후 두 달 넘게 엄마 아빠와 홈스쿨링을 했다. 도서관에 가고, 요리수업도 해보고 영어, 수학수업도 하고, 물감을 꺼내 그림도 그려보지만... 엄마표 홈스쿨링을 해주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매 순간 실감하며 좌절하던 날이 이어졌다. 그쯤 3년간 업계를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외식 컨설팅 제안이 들어왔다. 욕심이 났다.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핑계일 수 있지만, 아이와 24시간 함께 있기에 내게는 전처럼 일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없었다. 








친구를 사귀게 해 주고픈 마음에 축구교실과 태권도, 미술학원, 공부방 등을 가본다. 학습 목적보다 단 한 명의 친구가 간절하다. 정우가 잘 적응해야 우리도 여유시간에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했던 것처럼 아이는 방문했던 모든 기관을 거부했다. 

좋아하던 축구교실도 두 번째 시간부터 큰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나 너무 힘들어.. 하며 달려와 내 품을 파고들기 수 차례였다. 매번 벤치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두 시간 동안 지켜보다가 돌아왔다.

층고가 낮고 어두운 돌집이 무섭다며 공부방에 들어가길 거부했고, 여행 중 가고 싶다 노래 부르던 태권도조차 입장하기를 두려워했다. 아이와 태권도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친구들이 훈련받는 것을 1시간 지켜보고는 끝끝내 고개를 젓는 아이와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태권도장에서, 축구교실에서..
아이는 혼자 노는 놀이에 더욱 심취했다. 활주로를 꾸미고 비행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아이의 비행기 컬렉션이 나날이 늘어갔다.



정우는 좀처럼 제주에 적응을 못하는 듯했다. 너무 오랫동안 세계여행 하면서 어른들과 어울린 게 문제였을까?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어색한 걸까? 엄마와 떨어지는 게 어려운 걸까? 혹시 분리불안이 다시 시작된 건 아닐까? 매일 고민하고,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부모 마음이 찢어진다. 아무 문제가 없던 우리 가족에게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다. 결국 선배님께서 제안해 주셨던 업무는 포기하기로 했다. 내 욕심에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입학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 정우는 "엄마 나 학교 안 다니면 안 돼? 학교 가는 게 너무 무서워.."라며 두려워했다. 자주 악몽을 꾸며 온몸이 땀으로 젖은 아이를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선배님께 여쭙기도 하고, 제주도 내 아동심리센터와 소아정신과 상담도 알아봤다. 모두들 아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두운 내 얼굴을 보신 표선 FC 감독님께서는 

"어머니, 정우는 잘 해낼 거예요. 제가 10여 년 간 많은 아이들을 지켜봤습니다. 
운동장에서 뛰는 정우는 활동적이고 충분히 사교적이에요.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소아정신과나 심리상담을 받으면 아이에게 낙인효과가 될 수 있으니,
답답하시더라도 지켜봐 주세요."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작은 일에도 남편과 언성이 높아지곤 했다. 아이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아 그냥 밖으로 나섰다. 폭설이 내려서 제주행 비행기가 모두 결항되었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눈 내린 하얀 제주.







아직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집 앞 표선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밑창이 다 닳은 어그부츠를 신고 2시간 남짓 걷다 보니 어느새 표선리를 지나 세화리에 접어들었다. 눈이 푹푹 빠지는 길을 한참 걸은 까닭에 다리도 아프고, 꽁꽁 언 몸을 녹일 요량으로 근처 카페 가까운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도무지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길,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붉은 벽돌집을 개조해서 만든 작은 카페가 보였다. 나무판에 써놓은 <솔옆수>라는 조그만 간판은 집중하지 않으면 쉬이 지나쳐버릴 위치였다. 

그게 <카페 솔옆수>와의 첫 만남이다. 


카페 <솔옆수>








공간이 주는 힘, 아이에게 전달되다. 

크진 않지만, 아늑한 공간은 그림 그리는 솔작가와 사진 찍는 수작가가 직접 만든 가구들과 사진,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순애가 있는 <카페 솔옆수>는 정식 오픈 전 테스트 중이라 손님이 붐비지 않아 조용했다. 창 너머로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홍차를 한 잔 마셨다. 공간이 주는 편안함 덕분일까, 날이 서있던 마음까지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턴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마저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하얗고 부슬부슬한 털에 동그란 코와 검은 눈망울이 예쁜 순애를 보니, 강아지를 좋아하는 정우 생각이 절로 난다. 사랑스러운 순애를 본다면 정우가 얼마나 좋아할까? 남편과 다투긴 했지만, 전화를 걸어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챙겨서 오라고 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우에게 달려드는 순애를 본 아이의 두 눈이 커졌다. 입이 쩍 벌어져서 순애를 안고 쓰다듬고 난리가 났다. 다행히 순애도 정우를 좋아했고, 따뜻한 두 사장님도 정우를 예뻐해 주셨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솔작가님과 함께 그림도 그렸다. 정우는 순애 비행기를 그려서 솔작가님께 선물했다. 아직도 솔옆수 벽 한 편에 정우의 그림이 붙어있다. 


그윽한 향의 핸드드립 커피와 맛있는 수제 디저트까지 너무나 즐거운 순간이었다. 정우는 솔옆수를 다녀온 이후로 조금씩 밝아졌다. 동물과의 교감이 긴장을 완화시켜 준 게 아닐까 싶다. 늘 엄마 아빠랑만 지내다, 젊고 다정한 사장님과의 대화도 좋았던 모양이다. 우리 가족은 시간이 날 때마다 솔옆수를 찾곤 했다. 여전히 학교 가는 걸 겁내긴 했지만, 정우가 조금씩 용기를 내보려고 했다. 




카페 솔옆수에 가시면 정우가 그린 순애 비행기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은 직접 촬영, 수작가님 촬영)








자금의 리밸런싱을 위해 고민하던 송파 아파트를 매도하기로 하고, 내놓은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드디어 매수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잔금 날짜가 정우의 입학식이다. 일정을 바꿔보려 했지만, 세입자와 매수자 일정 때문에 조정이 어렵다. 아빠 없이도 입학식에 잘 갈 수 있겠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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