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세계여행 이후 우당탕탕 제주 입도기
500일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리운 가족들을 만났다. 앞으로 어떻게 살 지 궁금하실 양가 부모님께 제주도 정착 결심을 알렸다.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은 '제주도에서 바닷물 떠먹고 살 거냐' 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한국에 들어오기 전 남편은 모 외식기업 임원 자리를 제안받았다. 한 선배께서는 남편이 한국에 들어온 건 마치 '양준혁 선수가 FA시장에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최고의 찬사까지 해주셨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 느껴져 괜스레 뿌듯하다. 나름 안정적인 연봉이 보장되었음에도 왜 제주 이주를 결심했을까? 그것은 '500일 세계여행에서 가르쳐준 것들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 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IB교육의 중심인 제주 표선으로 정했다. 세계여행 전 서귀포 남원에서 한 달 살기 할 때, 근처 표선 해변에 여러 번 왔었다. 그만큼 표선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동네다. "표선에서 살자!"라는 내 말에 남편과 아들의 표정이 밝다. 상상만 해도 좋다며 행복해한다. 이젠 지체할 시간이 없다. 표선 내 초등학교 몇 곳에 전화 걸어 입학가능 여부를 물으니, 도내 주소지 전입이 우선이란다. 담당자께서 취학통지서가 나가는 12월 20일 전까지 전입하기를 추천했다.
그렇게 제주도 집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제주에서 집을 구하는 건 육지와 조금 다르다. 부동산에서 공동중개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 최대한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며, <오일장 신문> 플랫폼과 당근마켓에서도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있다. 가끔 큰 마트나 버스 정류장에 '연세 있음'이라는 전단지가 붙어있기도 하고, 맘카페나 지역 카페 글들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최근 MBC 교육 다큐멘터리 '교실 이데아'에서 IB교육 특집 3부작 방영 이후로 IB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덕분에 IB교육의 중심인 표선 지역에서 집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란다.
이집트 샴엘셰이크에 머무는 동안, 제주 타운하우스 전문 부동산에 문의했었다. 시차를 감안하며 보이스톡으로 통화했고, IB 초등학교 배정 단지를 찾아 나중에 제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11월 7일 한국에 들어와 가족들과 상봉 후, 500일 간 미뤄둔 각종 보험과 서류 작업을 마무리한 뒤, 11월 중순에야 집을 보러 제주에 왔다. 하루만에 힘들 것 같아, 학교 근처 소박한 펜션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오일장 신문에서 봐뒀던 매물을 둘러보고, 부동산 스무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 예산에 맞는 집들을 찾아야 한다.
2년 만에 제주도에 오는 우리 세 사람의 짐은 달랑 배낭 하나가 전부다. 이틀 치 속옷과 양말, 칫솔, 여벌 내복 한 벌. 500일을 여행하며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진리를 깨달았기에, 단출한 몸과 마음으로 제주 '내 집 찾기'에 열을 올린다. 하루에 대 여섯 군데 집을 봤음에도 미진하다. 결국 체류 일정을 하루 더 늘렸다. 숲 속 타운 하우스 단지부터 귤밭 옆 돌집, 해수욕장 바로 앞 북향집, 지어진 지 30년 된 구옥들.. 나무 새시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빌라... 학교 근처 아파트도 봤지만, 그 어디도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없다.
초등학교 1분 거리, 통창으로는 학교 운동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며 푸른 바다가 펼쳐지던 집 거실에 서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축 건물에 넓은 주방과 거실과 침실, 서재방으로 쓰면 딱이고 욕실도 2개다. 수납공간도 여유롭고 깔끔한 뒷 베란다까지... 와, 이 집 너무 좋은데? 라며 마음을 굳혔는데, 부동산 사장님의 말씀.
"이 집은 주거용 오피스텔이고, 신탁등기된 매물입니다."
신탁 등기는 오피스텔 주인이 자금 조달을 위해 부동산을 신탁회사에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은 것이다. 신탁 회사가 해당 부동산의 소유권을 갖게 되며, 주인은 신탁회사의 동의 없이는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임대할 수 없다. 모든 거래 시 신탁회사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또한 보증금 반환 의무 또한 원칙적으로 집주인이지만, 신탁등기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신탁등기뿐 아니라 압류, 가압류, 가처분 등 권리 제한사항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집주인과 임차인 사이에 신탁사가 껴있고, 모든 거래는 신탁사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헹여나 집주인에게 문제가 생길 시 임차인이 아닌 신탁사가 이 집의 우선권을 갖는다. 고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쩐지, 이렇게 좋은 집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
복잡한 마음으로 남편과 서로 땅만 보고 서 있다. 어떻게 하지?
친근한 목소리의 여자 중개사님 전화가 왔다.
"연세랑 매매 둘 다 가능한 물건인데, 초등학교 배정단지이고, 집주인이 서귀포 ㅇㅇ고 미술 선생님이셔서 집이 아기자기하고 예뻐요. 소금막 해변이 보이는 뷰도 아름답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를 돌렸다. 빌라 3층의 남향집은 집주인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닮아 갤러리처럼 꾸며져 있고, 거실에서 보이는 오션뷰도 아름다웠다. 때마침 일몰시간이라 붉게 물드는 석양에 마음을 빼앗겼다. 연세 계약 의사를 전하고 돌아오는데, 다시 걸려온 전화. "이걸 어쩌죠, 사모님이 연세는 안 하고, 매매만 하신다네요."
하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표선 지리를 잘 알게 된 이후, 그 집을 못하게 된 건 다행이었다. 매일 아이 초등학교까지 아침, 저녁으로 차로 10분 라이딩해줘야 하는 거리였다. 집 앞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착각했지만, 버스 배차는 1시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집을 계약하려고 했는지... 붉게 물든 석양과 오션뷰로 눈에 콩깍지가 씌웠던 모양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가려는 우리에게, 중개사님과 같은 빌라에 사는 할머니가 급매로 내놓은 집이 있단다. 초등학교 2분 거리에 시세보다 10% 저렴하니 매매이지만, 한번 보겠느냐 묻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다. 해변과 소나무숲이 보이는 작지만 아늑한 5층 집이었다. 매매 의사와 가격을 묻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가격을 10% 올려야겠단다. 당장 여유롭게 매수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가격을 올린다니요? 전국 집값은 하향세를 타고, 거래 절벽이라는데... IB 붐으로 표선은 집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집주인께서 별안간에 가격을 올리신단다. 아.. 여기도 우리 집이 안 되겠구나.. 낙담하며 돌아선다.
도대체 내 집은 어디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미술선생님 집을 살까?"
"그 집 예쁘긴 했지, 거길 매수하면 다시 다주택자 되고, 예산에서 너무 벗어나요. 학교에서도 멀고.."
"매일 아침 정우 데려다주는 핑계로 일찍 일어나게 되니까 좋지 뭐. 주식을 좀 정리해야 하나?"
"그건 싫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정아, 네가 제일 마음에 드는 집은 어디야?"
"오빠, 나는 신탁등기 걸려있던 그 집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학교도 가깝고, 통창으로 학교 운동장 보이는 것도 좋고, 오션뷰도 정말 멋졌잖아.. 옵션이 하나도 없어서 전부 새로 사야 하긴 하지만..."
"오케이. 가전, 가구 사는 비용추가까지 계산해 보고... 그럼 신탁등기로 우리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은 뭐야?"
"최악의 상황으로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우린 보증금 1200만 원을 날리게 되겠지. 우선순위는 신탁사이고 우리는 후순위니까, 대신 경매가 오래 걸리니까 당장 쫓겨나진 않을 거고, 1년 연세 만료까지는 살 수 있을 거에요."
"그럼 1200만 원 날릴 각오하고, 일단 마음에 드는 집에서 살자. 정우 학교가 정말 가깝잖아."
"그래! 큰 돈이지만 주식 하루 변동성보다 작잖아.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자!!"
그리하여 우리는 조금은 무모하지만, 신탁등기가 걸려있는 학교 운동장과 푸른 바다가 보이는 통창 집을 계약했다. 연세 계약 과정도 다른 집보다 복잡했다. 집주인을 만나 계약서를 쓸 때도, 신탁사에 보낼 서류를 따로 작성해야 했고, 신탁사 측에서 동의를 받아 다시 서류를 작성하는 과정이 추가됐다. 다행히 꼼꼼한 부동산 사장님을 만나서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육지에서 제주로의 이사다. 세계여행 전 대부분 가전, 가구를 처분했지만.. 평생 쓰기로 하고 구매한 6인용 세라믹 식탁과 의자, 의류 건조기만큼은 남겨두었다. 그리고 아이의 책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없는 원어서적)과 잔 짐들, 최소한의 의류, 주방짐까지.. 이삿짐을 추려보니 생각보다 상당하다. 육지에서 제주 이사 시 곱절의 비용이 든다. 여러 업체를 비교하다가, 결국 두 대의 차량 탁송 시 최대한 짐을 싣어보내고, 잔짐은 택배로 부치기로 했다.
** 제주 이사비용
택배박스 11개 : 120,000원
차량 탁송 (링컨 내비게이터, 벤츠) : 900,000원
총 102만 원으로 서울에서 제주로의 이사를 끝낼 수 있었다. 1톤 포터 트럭만큼 커다란 링컨 내비게이터가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 스무 살이 돼 가는 클래식카를 팔 수 없는 이유다.
냉장고와 침대가 없는 텅 빈 집에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잔다. 등이 좀 베기지만, 이것보다 더한 일도 500일 세계여행에서 경험했기에, 그저 웃으며 지낼 수 있다. 앞으로 구매해야 할 목록과 해야 할 일을 정리한다. 할 일이 999가지는 남아있다. 사람 사는 냄새나는 집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틈에도, 제주를 만끽해 보자며 다짐한다.
하지만, 삶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전화 한 통에도 삶의 색이 흐려지곤 한다.
제주 이주 후 올레길 첫 산책을 나서던 날, 반갑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IB교육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아래 글과 연결됩니다.
https://brunch.co.kr/@hongcho06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