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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어른 Sep 24. 2024

전화 한 통에 심장이 철렁..

아름다운 겨울 제주 적응기, 첫 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거실 벽면을 커다란 책장으로 채우고, 아이의 비행기와 작품으로 장식한다.


필요한 가전과 가구를 구매하고 나니, 제법 사람 사는 집처럼 갖춰지고 있다. 500일 간 떠돌이 생활하며 간이 주방에서 생존을 위한 요리만 했었는데, 나만의 주방이 생기니 요리가 즐겁다. 꼭 필요한 물건들로 채워진 집에서 통창 밖 푸른 바다를 감상하며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매일매일이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매일 아침 향긋한 핸드드립 커피와 토스트 한 조각, 직접 만드는 신선한 반찬
겨울이니 마라도 대방어, 물질하고 나오신 해녀 삼춘께 구입한 초신선 해산물!
어느 날엔 분식 파티, 뜨끈한 어묵탕, 채소 듬뿍 잡채.. 요리가 즐겁다!
매일 주방 마감. 미니멀라이프를 염두하는 삶.
폭설이 내렸던 어느 날.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근처 해변으로 이어지는 올레길 산책을 처음으로 나섰다. 제주의 바다는 스산한 겨울 바다조차 아름답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하며 한창 분위기에 취해있던 중... 반갑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임대인입니다. 어떻게 집 정리는 대충 끝나셨을까요?"

"네, 감사해요. 덕분에 멋진 집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가전과 가구도 들어왔고 대충 사람 사는 모양새는 꾸려진 것 같네요."

"이사하신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말씀드리기 정말 죄송하지만, 그 집을 사고 싶다는 분이 계셔서요. 오늘 집을 보러 오신다는데, 혹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동공 지진. 

이사한 지 고작 일주일 지났을까, 연세 계약서에 잉크도 안 말랐을 것 같은데, 

집을 보러 온다고요??



산책을 나와있어 한 시간 뒤쯤 오시면 좋겠다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남편과 나 모두 순식간에 침울해진다. 연세 계약 만료인 내년 12월까지 대체 몇 팀이나 집을 보러 올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이렇게 마음에 드는 집에서 오래 살 수 없고, 당장 내년 연말이면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 새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이사센터를 알아봐야 한다. 요 몇 주 간했던 쉽지 않은 일들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것.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우울한 표정의 내 옆에서 영문을 모르는 아이만, 날아가는 철새 떼를 보며 우와~ 함성을 내지른다. 



처음 올레길에 산책나갔던 날, 이렇게 즐거웠는데...
집주인의 전화를 받은 뒤, 근심 가득한 남편의 뒷모습.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계산기를 두드린다.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세금, 생활비 등... 다주택자에 대한 잣대가 느슨해졌다지만, 언제든 정권이 바뀐다면 분위기는 반전될 수 있다. 전세 주고 있는 송파 아파트를 어떻게 하지? 두 번째 주택으로 거주용 오피스텔을 구매했을 때 취득세, 재산세며,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지역 의료보험료는 얼마가 나오는 거야? 따져야 할 게 많다. 매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도 여러 가지다. 갖고 있던 현금 외에도 주식을 일부 매도해야 한다. 새로운 도전을 했지만, 이제 시작이고, 무엇보다 제주에 적응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이의 입학과 학교 생활 적응도 잘 될는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주택 매수가 과연 옳은 일인가? 


다행히도 집을 보기로 했던 예비 매수인께서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다며 다음번 제주행에 오신단다.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기로 한다. 지금은 정우가 제주생활에 잘 적응하기만 바랄 뿐이다. 500일 간 세계여행을 하며 버라이어티 한 날을 보냈던 아이에게 겨울의 제주는 몹시도 지루한 모양이다. 20개월가량 기관생활을 하지 않았던 아이의 학습능력과 대인관계도 조금은 걱정된다. 12월 중순부터라도 유치원에 보내고 싶지만, 빈자리가 없다. 정우는 또래 친구 하나 없이 내내 엄마 아빠와 온종일 지내야 한다. 덕분에 계획했던 나의 업무도 올 스톱이다. 지금은 아이의 적응이 먼저다. 


정우의 동갑 친구 단 한 명만 있어도, 입학 후 정서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놀이터나 운동장을 배회해 봐도, 겨울이라 해가 짧고 날이 추워서 나와 노는 또래 아이가 없다. 시골 마을의 키즈카페는 500일 간 세계를 돌며 멋진 놀이공원에 수없이 가본 아이에게 시시할 뿐... 심심하다는 아이를 위해 입학 전까지 엄마 아빠의 서툰 홈스쿨링이 시작된다. 요리수업도 하고, 해안도로에서 자전거도 타고, 새로 산 레고블록으로 멋진 작품도 만들고, 도서관에도 매일 출근한다. 해가 반짝이는 날엔 두툼한 외투차림으로 오름과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자연을 만끽하기도 한다. 입학 전까지 한글 떼기를 목표로 열심히 달린다. 


오늘은 요리수업 : 구좌당근을 듬뿍 넣은 김밥 만들기
오늘은 체육수업 : 해안도로 옆 자전거타기 
목장과 바다뷰의 카페에서도 책읽고 그림그리고, 어느날엔 돌고래 보러 노을해안로.
집에서도 잘 노는 미래의 비행기 조종사








제주 입도 후 계획했던 업무들은 정우가 제주생활과 초등학교에 잘 적응할 때까지 미뤄두기로 하고, 아이 케어에 집중하던 날이었다. 세계여행 전 외식 컨설팅 업무를 함께 했던 존경하는 선배님께 전화가 왔다. 반가운 인사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제주 M호텔 중규모 프로젝트가 있으니, 제주에 사는 우리 부부가 적격이라며 합류를 제안하셨다. 3년 이상 현업을 떠나 있던 내게 메이저 특급호텔 프로젝트를 제안해 주셔서 감사하고 기뻤다. 한편으로 욕심이 났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정우 케어를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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