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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Oct 04.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두 번째 날

렐리에고스-레온(24km)


별빛을 향해 걷는 이들



   아무래도 어젯밤에 과음한 게 맞나 보다. 5시 40분에 일어날 수 있게 알람을 맞췄건만 새벽 내내 잠을 설치고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부터 3분씩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일어나서 짐을 꾸렸다. 방문 너머에 있는 주방 겸 식당에 가서 어디선가 받았던 바게트 빵에 튜브 고추장을 짜서 뜯어먹으며 일정을 확인하고 6시 40분에 출발했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숙소를 나서자마자 금세 별빛 가득한 벌판으로 들어선다. 아무 걱정 없이 별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 너무나 행복하다. 아직 동 틀 시간은 멀어서 멀리서 짙푸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까미노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이 어쩌면 여명의 새벽하늘과 서쪽 땅끝까지 흩뿌려진 별빛의 색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쪽 먼 곳에선 사위어지는 그믐달,떠오르는 태양이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갈림길 부분에서 길을 잘못 들어갔다 돌아오던 J 씨 커플과 만났다. 어젯밤에도 술 한잔 하며 만났지만 길에서 걷는 도중에 만나는 건 또 처음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둠 속에서 불빛으로 앞길만 비추고 가기에도 바빠서 굳이 이야기를 나누진 않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함께 일출을 맞았다. 만시야 입구에서 셋이 사이좋게 헤매다가 간신히 마을로 들어가서 J씨네는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걷기로 하고 나는 마을에서 아침도 먹고 좀 쉬기로 했다. 


  구글 리뷰에 패스츄리가 맛있다는 바가 있길래 들어가서 패스츄리와 카페 콘 라체를 시켜 먹었는데 정말 눈이 띠용 할 정도로 맛있었다! 이제까지 싼 빵(주로 바게트) 먹으면서 스페인 빵은 잘 못 만든다고 구시렁거리던 게 미안해 질정도였다. 그저 맛있는 빵을 못 먹어본 것뿐이었다니...... 화장실 들렀다가 다시 짐 꾸려 나와 마을을 나선다.



뜻밖의 페스츄리 맛집. 멋진 아침식사였다!     만시야의 성당. 오늘은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성당 앞을 지나가려다 잠깐 멈추고 그 앞에서 소중한 이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으며 휴대폰을 잠깐 확인했는데 투병 중인 동호회의 지인 분이 병세가 악화되셨다는 이야기를 단톡방에서 보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나마, 순례길 위에서의 축복이 있길 바라며 그분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며 사복사복 걸어 비야렌테에 진입했다. 작은 마을이라지만 포장도로와 상가들이 길 가에 있어 쉴 곳이 마땅치 않아 버스정류장에 앉아 발을 말리며 잠시 쉬었다. 기운 내서 걸어보자고 우렁차게 다시 출발한 지 10분 만에 배가 고파온다. 벌써 쉴 순 없다며 10분, 20분 버티고 걷다가 결국 발델다 푸엔테에서 고속도로 쪽 길로 들어가기 직전에 발가락을 말리며 어제 사둔 빵을 뜯어먹었다.



레온에서 레온으로



  안내책에서 레온으로 들어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횡단해야 한다고 적혀있어서 좀 긴장했었는데 도로 옆으로 우회로가 있었고 횡단해야 한다던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는 육교도 있어서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책이라 예전 정보가 적혀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안전하게 지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레온 시내로 들어가서 카스트로 달리를 건너는데 프로텍..? 페레그리...?라는 주황색 조끼에 지도를 든 사람들이-나중에 찾아보니 ‘투리스모’라는 사람들이었다- 순례객들을 향해 손짓한다. 알베르게 예약을 했냐 물어보면서 쎄요(스탬프)도 찍어준대서 부스 쪽으로 다가가서 나는 호스텔을 예약했다, 00 호스텔이다 라고 말하자 지도 위의 한 곳을 표시해서 주고 쎄요도 찍어 주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수수료가 없는 iber caja현금 인출기랑 가까워서 그쪽으로 가서 300유로를 뽑고 드디어 현금 거지를 탈출했다! 어제 J커플과 YH에게 빌렸던 돈을 갚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지친 발걸음에 설렘이 깃든 것도 잠시, 지도에 표시된 대로 찾아갔더니 이름이 비슷한 다른 호스텔이라 다리에 기운이 쑥 빠지고 말았다.


  다시 구글맵에 예약했던  호스텔 위치를 찍고 걸어가는데, 10분 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도착 다 했다고 안심했다가 다시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도착한 호스텔엔 사아군에서 만났던 루치아가 체크인 중이었고, 유쾌하고 친절한 체크인 담당 스탭 덕에 다행히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상태로 호스텔에 입성했다. 6인 도미토리였는데 홍콩 사람 미기와 루치아, 나 이렇게 세 명만 쓰게 되어 나름 여유로웠다.


   샤워를 하겠다는 내 말에 샤워실 청소까지 깔끔하게 해 줘서 샤워는 물론 손빨래까지 마치고 방 한쪽의 베란다에 빨래까지 널고서 레온을 구경하러 길을 나섰다.







레온 대성당 1열의 만찬



레온 대성당 앞에서 피자와 맥주로 점심 해결!





   시내 구경도 구경이지만 마지막 아침밥을 먹은 지 꽤 시간이 지나서 배가 많이 고팠기에 식사 먼저 해결해야 했다. 아름다운 레온 대성당 광장 바로 앞에 있는 유명한 피자집에 가서 맨  위에 적혀있는 (아마도) 시그니처 메뉴와 맥주 하나 시켜서 대성당을 구경하며 점심을 먹었다. 피자 한 판이 조금 커 보였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내 위 용량이 비대해서인지 약간 배부를 정도로 잘 먹을 수 있었다.


   부른 배를 끌어안고 드디어 레온 대성당 안으로  입장했다. 큰 도시에 큰 성당이라 그런지 오디오 가이드도 제공하고 있었는데 한국어는 없어서 간신히 아는 단어만 들리는 정도인 영어 가이드를 재생하면서 성당 내부를 구경했다. 부르고스 대성당보단 작았지만 하얀색 벽이며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며 예쁘긴 굉장히 예뻤다. 큰 규모가 아닌지라 금방 구경이 끝나고  바로 옆에 박물관도 있어서 그곳에도 들어갔는데 박물관이야 말로 보물창고였다!


  티켓박스를 지나니 커다란 회랑과 안내원이 나왔고 박물관 내부는 촬영이 안된대서 회랑만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건물 한쪽의 오래된 문을 역시 그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로 열어 나를 들여보내 주고 다시 문을 닫는다. 문 안쪽의 전시장은 제한적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촬영이 금지되어있고, 용건이 있거나 나가고 싶다면 이 문 앞에 서서 저쪽의 감시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면 직원이 올 거라는 말을 영어와 바디랭귀지까지 동원해 알려주었다.  내부의 수많은 그림과 조각, 성상들은 작품성 보단 교회의 성물로써 보관하는 듯 한 인상이었다. 15세기에 그린 그림들은 보관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 바로 어제 그린 거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색감이며 상태가 좋아 보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3층에 있던 거대한 십자고상. 하늘색 벽에 있는 거대한 십자가에 창백한 예수님의 몸과 손과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다리까지 흘러내려가는 모습, 쇄골에 파묻혀 보일 정도로 축 처진 얼굴, 못 박힌 채로 체중 때문에 살이 밀려 올라간 발등의 모습이 너무나 실감 났다. 아마 당시의 신자들도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프레임에 다 담기 힘들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레온 성당과 그 안의 회랑.


  박물관을 나와서 어디로 갈까 잠깐 생각하다 북쪽에 있다는 오래된 유적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루트가 꼬여 중국인 마트에 먼저 갔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중국인 마트로 불리고, 직원도 주로 중국계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방문하는 사람은 주로 한국인 순례객인 듯, 가게에는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라면, 컵라면, 조미료 , 김치 등등이 가득했다. 물론 나름 수입(?) 품목이라 가격은 좀  비싸고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하는 입장이라 많은 음식은 오히려 짐의 무게만 늘릴 뿐이라 간단하게  라면 두 개와 캔 김치 하나만 4.5유로에 샀다. 


   아까 동선이 꼬였던 유적을 볼까 했는데 촬영을 많이 했더니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떨어질 지경이라 레온 광장 앞에서 기념품 몇 개를 사고 크레덴시알에 쎄요도 하나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충전하며 지출 정산과 일기를 쓰고서 8시쯤 되어  야경을 구경하러 다시 길을 나섰다. 



밤의 도시에서


  낮에 돌아다닐 때는 시에스타라 그렇게 조용하던 길거리가 해 떨어질 무렵부터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완전 다른 분위기의 번화가가 되어 있었다. 가우디가 만들었다는 보티네스 저택,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과 같은 용서의 효과(?)가 있다는 용서의 문이 있는 산 이시도르 성당, 레온 대성당의 야경을 구경하고 타파스 바가 밀집해 있는 거리로 향했다.



타파스 거리에서 타파스 투어. 한잔에 먹기 딱 좋은 작은 양의 안주들이 나온다.



   바에 들어가 끌라라(레몬주스와 맥주를 섞은 것)을 시키고 홍합요리 작은 접시를 하나 받았다. 이 동네는 이렇게 술이 메인이고, 술을 시키면 간단한 안주를 조금 주는 방식이라고 한다. 또 다른 바에 가서 맥주 하나에 크로켓 하나를 호로록 먹고서 근처 호텔에서 묶는다는 J 커플을 만나러 나갔다. 내일은 걷지 않고 이 도시에 하루 더 머무르신다면서 몹시도 여유로운 모습이셨다. 빌렸었던 10유로와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까미노 배지를 선물로 드렸다. 베푼 것보다 많은 것을 받고 있는 길이지만 같은 길을 계속 걸으니 이렇게 갚을 수도 있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땐 몰랐지만 나중에 또 한 번 큰 신세를 지게 된다)


 어느새 인적이 드물어지고 적막해진, 약간은 무서웠던 골목길들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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