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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Oct 12.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네 번째 날

비야르 데 마사리페 - 아스토르가(30km)






   오늘은 30km를 걸을 계획인데 내가 묶으려 하는 곳은 공립 알베르게라 숙소 예약을 할 수 없어 일찍 출발한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5시에 일어나 이런저런 준비도 마치고 먼 거리를 배낭 메고 가기 힘들거라 동키로 보낼 배낭도 잘 포장했다. 큰 배낭으로 매고 갈 땐 중간중간 가방을 풀어서 꺼내야 할 물건들, 이를 테면 갑작스러운 비를 대비한 우비, 햇볕이 너무 쨍할 때 쓸 선글라스 같은 것들을 가방의 지퍼 부분과 가까운 곳에 배치해서 빠르게 꺼낼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게 관건이라 은근히 짐 쌀 때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었지만 동키로 보낼 때는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마구잡이로 집어넣고 배낭 커버로 뒤집어 씌우면 끝난다. 6시를 출발 시간으로 잡고도 시간이 좀 남았길래 빵이랑 오렌지를 좀 뜯어먹고 양치질까지 하고 나서 6시 1분에 출발.




어둠과 안갯속에서 본 것



   마을을 막 나설 때는 하늘에 별이 어느 때보다도 많아서 너무나 행복하게 걸었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별빛이 흐려지더니 점점 안보이기 시작한다. 단순히 구름인 줄 알았는데,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고서야 그것이 안개인 것을  알았다. 걸을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다이소에서 2천 원 주고 산 희미한 헤드랜턴만으론 내 발등 조차 비추기 어려울 지경이라 휴대폰 라이트를 꺼내 같이 비추었다. 그렇게 비추는데도 발 바로 앞의 도로밖에 보이질 않아서 정말 너무 무서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땐 멈춰서 있는 것이 상식일 테지만 아직은 추운 새벽의 도로 위에 혼자 서 있는 것도 만만치 않게 위험할 거 같아 정말 눈물과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주님의 기도를 외면서, 빠르게 안개 지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고 속도로 다리를 움직였다. 


   해라도 떴으면 회색빛 안개 속이었을 텐데, 해도 뜨지 않은 시각이라 내가 이미 죽어서 삼도천 가는 길을 걷고 있는 건지, 검고 끝없는 무한의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던 그 막막한 길은 아마도 내가 인생을 살며 마주한 가장 위험한 길이었을 거다. 간간이 멀리서 희미한 안개등을 비추며 천천히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내가 현대의 지구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위협적이기보단 반가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인적이 드문 곳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도 분명 있을 것이고, 확률은 낮지만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수상한 침입자인 인간에게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야생동물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변고를 당한다면 휴대폰으로 구조요청을 해야 하는데 휴대폰 라이트로 손전등을 켜고 있어 어쩌면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버려 날이 밝아 다른 순례자가 지나갈 때까지 도로 위에 쓰러져 있어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고 확률도 낮은 망상인 건 알고 있었지만 희박한 가능성만으로도 공포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멀리서 사람의 형체와 그의 헤드랜턴일듯한 움직이는 불빛을 보았다. 출발 직전, 알베르게 입구에 앉아서 빵을 뜯어먹을 때 부엔 까미노, 하고 작게 인사하며 나보다 30분 정도 앞서 출발한 순례자일 거라 생각했다. 기필코 저 사람과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뛰듯이 걸어 그의 뒤에 당도했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는 불과 10분, 30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에 아무 불빛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불빛과 함께 나타난 사람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난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너무 무서워서 그러니 해가 뜰 때까지 나와 함께 걸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그러자고 해주었다. 어두운 길에 갑자기 나타나는 자동차나, 한국의 산길에선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하는 야생 멧돼지와의 조우 같은 달갑지 않은 상상으로 걱정하며 기도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자 그건 단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까미노에 갑자기 나타나는 몬스터 같은 건 없다고 했다.(하지만 바로 다음날 이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튀니지 사람 Walid 와 함께 아침 먹을 바가 나올 때까지 1시간 정도를 같이 걸었는데 중간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15km를 걸은 상태였다. 평소 1시간에 4-5km 정도를 걷는 게 고작인데 어둠의 공포가 시간당 7-8km라는 놀라운 속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둘 다 너무 배가 고팠는데 잠깐씩 들른 마을엔 마땅히 밥 먹을만한 바가 없어서 결국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까지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오르비고 다리. 해는 떴지만 아직도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모습이다.



  레온에서 남서쪽, 북서쪽으로 나뉘었던 길은 이곳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마을의 남동쪽에서 마을을 향해 가던 우리는, 당연하게도 마을 동쪽에 하나 있는 (제대로 된) 바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어 개의 바에 들러 슬쩍 메뉴를 봤는데 차가운 빵류 뿐인 듯했다. 우리 둘 다 춥고 어두운 곳에서 한참을 긴장 속에 걸어서 아침식사는 뭔가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은 상태였다. 다리를 다 건너고 마을 끝 부근까지 가고 나서야 아무래도 반대쪽에 그럴듯한 바가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들어 우리는 다시 방향을 틀어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길로 걷는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그동안 알게 된 한국 순례자 대부분을 마주쳤고 모두가 왜 이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어서 ‘괜찮은 바를 찾고 있다’는 대답을 열 번쯤은 해야 했다.


   넓고 따뜻한 음식을 파는 바에 드디어 도착해서 또르띠야와  카페라테를 시켜 맛있게 먹었다. 양이 좀 많긴 했지만 춥고 어두운 길을 걸어 체력 소모가 심해 많이 배고팠기에  정말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나보다 덩치가 커서 많은 음식을 먹고, 나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져서 더 많이 쉬어야 할 것 같은 Walid를 더 쉬게 두고,  나는 다시 혼자 길을 나섰다. 작은 갈림길이 나오길래 좀 더 시골길처럼 보이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작은 몇 개의 마을을 지나다가 발데이글레시아의 성당에 들어갔다. 보통 순례길을 걸으면서 출발한 지 30분~1시간 안에 만나는 성당이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오늘은 새벽 안갯속을 헤치고 나오느라, Walid를 만난 뒤엔 밥 먹을 Bar만 미친 듯이 찾느라 어둠의 절망 속에서 했던 기도 말고는 다른 기도를 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성당 안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지만, 고요한 제대 뒤로 보이는 감실을 보며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잠깐 선 채로 어둠 속에서 무사히 걸을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감실엔 불이 켜져 있고 제대엔 초와 독서대, 마이크가 있었다. 살아있는(?) 성당이다.




   새벽 내내 나에게 시련을 주던 안개는 상공으로 올라간 것인지 하늘은 잔뜩 흐린 채였다. 햇볕이 너무 쨍하면  더워서 걷기 힘들 테니 차라리 잘 되었다. 적당한 높이의 고개들을 두세 개 정도 넘고  나니 아스토르가가 보이는 언덕에 다다랐다. 언덕 위엔 토리비오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커다란 석조 십자가가 있었다. 예전에 아스토르가의 주교로 있었던 토리비오가 추방당하면서 이 언덕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스토르가를 바라보며 탄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과연 십자가 앞에 서니 멀리 아스토르가 시내와, 그 한가운데 비현실적으로 커 보이는 대성당이 한눈에 보였다. 그에겐 탄식의 언덕이었겠지만, 아스토르가가 오늘의 목적지인 나에겐 환호의 언덕이었다. 잘 정돈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사흘 뒤에 묵을 숙소까지 예약을 완료하고 나니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아스토르가 입구


   편해진 마음으로 아스토르가로 들어가는 길에 레온 호스텔에서 만났던 미기를 다시 만났다. 그저께 레온에서부터 까미노를 시작한 그녀는 몹시도 지쳐 보여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가혹한 마지막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토르가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나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아스토르가는 꽤나 높은 성벽 안에 있는 오래된 도시였다. 중세의 여행자였다면 높은 아치문과 그 밑의 매서운 경비병들이 더 무서웠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현대의 우리는 그저 무섭도록 높은 마지막 언덕을  올라갈 뿐이었다.






   우리는 같은 호스텔에 묶게 되었다. 나는 예약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 새벽 일찍 출발한 가장 큰 이유였다 - 미기는 예약을 미리 해두었다고 한다. 체크인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알베르게 입구의 로비 쪽엔 몇 명의 순례자들이 줄 지어 앉아 있었고 우리도 얌전히 그 옆에 앉았다. 로비의 맞은편엔 소강당처럼 보이는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침에 동키로 보냈던 내 배낭도 찾을 수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4인실의 2층 침대 한 곳을 배정받고 나서 예의 샤워, 빨래, 빨래 널기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가방 속에 소중하게 들고 다녔던 삼양라면과 김치를 꺼내 점심으로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김치였다. 한국에서였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통조림 김치지만 근 한 달 동안 고국의 음식을 그리워하던 내겐 한국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기엔 충분했다.




 

외국까지 여행 와서 김치에 라면 찾는 거 너무 촌스럽다던 인간의 민낯


    이미 3시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규모가 있는 도시라 볼거리도 꽤 있다고 하여 서둘러 시내로 나가보았다. 크고 작은 광장들이 몹시 매력적이었지만 역시 가장 압도적인 건 대성당과 주교궁의 모습이었다. 대성당은 그 크기로, 주교궁은 아름다운 외관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교궁을 먼저 보려다가 마침 시에스타라 문을 닫아서 대성당을 먼저 보는 것으로 관람 계획을 바꿨다.


  아스토르가의 산타마리아 대성당은 부르고스 성당보단 작았지만 레온 대성당보단 크고 화려했다. 어딘가 모르게 장중한 느낌도 있었다. 정면 파사드가 한쪽은 붉은색 벽돌로, 다른 쪽은 흰색 벽돌로, 가운데는 두 가지 색이 미묘하게 섞인 느낌으로 장식된 게 인상적이었다. 영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성당 한쪽의 박물관까지 모두 돌고 나니 주교궁이 다시 문을 열었다.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으로 더 널리 알려진 주교궁은, 지어졌을 당시엔 주교관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까미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교와 다른 성직자들,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을 다양한 크기의 방들은 여러 가지 성화, 성물과 까미노와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중엔 이틀 뒤에 만나게 될 이라고 고개의 '철의 십자가' 진품도 있었다. 


   내부는 흰 벽을 따라 높이 이어진 천장은 붉은색의 벽돌 아치로 장식되어 있었다. 건축 쪽으론 완전 문외한이라, 로마네스크니, 고딕이니 하는 건축 특성을 전혀 몰라서 보고 있어도 다른 시대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아쉬웠다. 3층까지 알차게 구경하고 나와서 주교 궁과 대성당 바로 뒤쪽에 있는 고대 로마 때부터 있었다는 성벽을 구경하고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과 내일 먹을거리를 좀 사서 중앙광장 시계 아래서 인형이 친다는 종을 구경하러 앉아 있는데 근처를 구경하고 돌아오던 Walid를 다시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다 7시 정각이 되어 종이 울리고 커다란 종 양 옆에 있는 남녀 모양의 인형이 막대기로 종을 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규모가 있는 큰 알베르게답게 한국인들도 굉장히 많았고, 그에 맞춰 외국인들도 굉장히 많았다. 부지런한 한국 사람들은 이미 한차례 주방을 휩쓸고(?) 지나가서 음식을 만들어 테이블 곳곳에서 디너를 시작했고 그 뒤에 이어 외국 순례자들이 다시 한번 주방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었고, 나처럼 늦은 저녁을 먹겠다고 이제 요리를 시작한 한국인까지 섞여 주방은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였다. 내가 계획했던 저녁밥은 라면에 김치, 그리고 내가 직접 조립한 햄버거였는데  주방 상태를 보니 당분간(?)은 사용하기가 힘들 것 같아 식탁에서 햄버거부터 조립해 먹기로 했다.


  일전에 벨로라도에서 L이 햄버거를 여러 개 만들어 나에게도 하나 주고 저녁밥, 아침밥으로 해결하는 걸 보고 저 방법도 괜찮다 싶어 눈여겨봤다가 이제야 나도 따라 해 본다.





나름 체계적인 조립 공정으로 만들어진 햄버거 4개




   슈퍼마켓에서 4개들이 햄버거용 빵 한 봉지와 초리조, 토마토 하나, 치즈, 샐러드용 채소 작은 거 한 봉지를 사서 식탁에 펼쳐놓고 하나씩 조립하니 햄버거 4개가 금방 완성되었다. 2개는 저녁에 먹고 나머지 2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출발할 때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도시락으로 가져가면 딱이다. 알뜰한  순례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혼자 으쓱해 있는데 한국 순례자 두 분이 닭백숙을 하셨다며 함께 먹자고 해주신다 여자분 두 분이라 아무래도 양이 좀 많으셨나 보다. 맛보는 정도로 조금만 도와(?) 드리고 내가 만든 햄버거도 도와달라며(?) 나눠 드렸다. 


스페인 하숙... 아니고 스페인 백숙. 어메이징 코리안이다 정말.




  슈퍼에서도 지나치듯 봤었지만 정말 스페인 닭은 무지무지하게 컸다.. 그런데 그 크기보다 놀라웠던 건 스페인에서 닭백숙을 완성해낸 의지의 한국인들이었다. 마늘과 대파, 후추, 소금과 스페인 쌀만 넣어서 만들었다는데도 정말 그럴듯한 닭백숙 맛이 났다! 애초에 조금만 먹기로 해서 살짝만 먹고, 난 나만의 메인디쉬, 라면을 끓여 김치와 와인과 함께 먹었다. 리오하 와인은 정말 맛있었지만 내 안에 있던 어떤 한국인이 자꾸 소주를 찾는 게 느껴져서 조금 난감한 밤이었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5HTqj3JsfdQ


https://youtu.be/7DjPS7yn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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