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파 Nov 28. 2020

'우리끼리는 괜찮아'



  지난 추석, 광화문 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우려로 귀성을 자제하자는 여론에 나 역시 깊이 공감하며, 휴가보다 도 더 긴 연휴를 어찌 보내야 할지 며칠을 고민했었다. 물론 제주도를 포함한 국내외 다른 곳으로 여행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택지는 단 두 가지, KTX를 타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가서 추석을 함께 보내 고된 사회생활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거나, 서울의 집에 콕 틀어박혀 가끔 집 앞 공원 산책하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고된 사회생활에 지친 몸을 위로하거나.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의 서울살이 동안 처음, 정말 처음으로 '예매대기'가 아니고 '바로 예약'으로 원하는 차편으로 예약에 성공한 KTX를 눈물을 머금고 취소하고서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굉장한 서운함의 표현과 함께 이 말을 들었다.


"우리끼리는 괜찮지 않아?"


  연휴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추석 연휴에 고향에 내려가는지, 다른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역시 걱정되어서 안 내려가겠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지인은 나에게 고향 안 내려가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집 밖에는 아무 데도 안 갈 예정이라 그 제안을 거절했는데 역시 굉장한 서운함의 표현과 함께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끼리는 괜찮잖아?"




'우리끼리'는 어디까지일까.

'괜찮아'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 간의 비말감염으로 전파된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마스크를 벗고 생활하는 반경이 겹치는 사람 사이에서 감염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광범위한 감염이 일어났던 광화문이나, 특정 교회와 교단 근처에 (방역이 완료된 뒤에) 간다고 해도 사람에게 직접 전파되는 것만큼의 전파력이 강하진 않고, 무증상 감염자도 무시하기 어려운 정도로 많은 비율이라니  역시 가장 위험한 건 사람과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손 씻기며 방역, 소독, 마스크 쓰기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지만 단 한 가지, 식사 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밥을 먹었고 그것으로 감염이 된 것이라는 어느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마스크를 쓰고 말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입 앞에 가릴 것이 없는 상황, 즉 먹는 상황에서의 대화가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것이었다.


  혼자 살고 있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동료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이건 물론 코로나와는 상관없는 이유도 있다) 밥을 먹고, 역시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는 생활을 반년 넘게 하고 있으려니, 나는 나를 제외한 누군가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걱정되고 염려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괜찮은데, 내가 남한테 전파시킬까 봐 걱정이야'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만큼이나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도 걱정이다. 물론 이런 걱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간 '내가 바이러스 감염자로 보이냐'는 주변의 억울함, 원망을 듣게 될 것을 잘 알기에 짐짓 바이러스 자체에는 쿨한척하려 애쓰고 살고 있다.


  일과 내내 마스크를 쓰고 살다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서 마스크를 벗는 나와는 달리,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집에서까지 마스크를 쓰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하루 종일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살고, 모임이나 외식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집에서까지 마스크를 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집에서까지 마스크를 쓰고 지내라고 한다면 하루도 채 못 버틸 듯싶다.


  하지만 '집'은 우리의 생각만큼 독립되어있진 않다. 4인 기준 보편적인 가정만 보더라도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남녀와 그 사이의 아이 둘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은 정말 자신들의 집을 제외하고 어느 곳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말하며 식사를 하는 것을 자제하는 걸까? 아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인인 두 남녀는 각자 원 가족이 따로 존재한다. 원 가족인 각자의 부모와 형제를 만날 때 마스크를 착용하고 식사자리에선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그 부모와 형제들이 각자의 가족이나 형제를 만날 땐 또 어떻게 될까?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에 서로 모르는 사이는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친한 관계,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함께 먹을만한 관계로만 축소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전혀 모르지만, 나와 친한 누군가와, 그 사람과 친한 다른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 비말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 가능성으로 이 바이러스는 계속 지속되고 있다.


  '우리끼리'라는 말이야 말로 이런 신뢰를 보여주는 단적인 단어다. 여기에 들어가는 '우리'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 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우리'는 다른 '우리'들과 조금씩 겹친다. 마치 조금씩 겹친 상태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밴 다이어그램처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고, 그렇게 이 바이러스는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 아마 전문가들이 판데믹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 우려하는 것도 이 지점일 거다. 락다운을 하건, 강력한 통제를 하건,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식사, 대화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이들 역시 다른 소중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 사람 앞에서 마스크를 쓴 채로 조용히 앉아 있는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한다'는 선언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며 밥 먹는 곳에 가지 않겠다 선언하는 사람과 입 꾹 닫고 식사'만' 하는 사람에게는  '우리끼리는 괜찮아'라는 부담이 던져진다.


  몇 달 전, 즐겨보던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등장할 때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 ‘여기는 괜찮지?’하며 마스크를 벗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면 아래쪽에는 방역수칙을 지켜 촬영했다는 자막이 나타났다. 출연자와 스태프들의 발열 여부를 체크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 소독을 하고 촬영에 임했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출연자 중 단 한 명이라도 발열 등의 증상이 없는 무증상 감염자라면, 촬영 장소 소독 후에 출연자가 마스크를 벗는 그런 상황은 전혀 ‘괜찮’지 않아진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가족과 함께든 친구와 함께든, 마스크를 벗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열 체크를 하는 것이 서로를 보호하는 방법이겠지만, 그리고 심지어 무증상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대화를 자제하는 것이 맞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며 우리끼리는 ‘괜찮다’고 한다.


  ‘괜찮다’는 말에서는 서로가 감염병이 갑자기 창궐한 그런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뿐 아니라, 너로 인해 감염이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숨은 뜻도 보인다. 하지만 위에 적었다시피 위험한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사람과 마스크 없이 이야기를 하는 상황 자체가 위험한 거란 걸 생각하면 이 '괜찮다'는 말을 다들 어떤 뜻으로 말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식사를 함께 하는 의미로서의 식구가 없는 나는 누군가를 ‘우리끼리’라며 끌어 안기도 힘들고, 감염에 대한 걱정이 많은 나는 ‘괜찮다’며 그 우려를 애써 없는 듯 포장하기도 힘들다.


  나는 이렇게나 사회적 관계를 단절해가며 방역수칙을 지키고 살고 있으니 당신들도  그렇게 살라는 훈계 같은 글은 결코 아니다.  혼자 살고 있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정답게 이야기 나누며 식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저 전염병에 걸릴 위험을 낮춰주고 있는 것뿐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나 역시도 몇 달에 한 번씩 본가에 가게 되면 부모님과 함께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며 밥을 먹는다. 그것이 어쩌면 나의 부모님을 위험하게 만들고, 혹은 나를 위험하게 만들 아주 적은 가능성을 '에이 설마...' , '뭘 그렇게까지...'라는 마음으로 외면하면서.



  다만 판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끼리 괜찮아'라는 말을 교차점 없는 지인, 가족들에게 들으면서, 또 다양한 원인의 크고 작은 유행이 한국과 세계 많은 나라를 덮치는 것을 보면서 몇 달간 많은 생각을 했다. 각종 의약품과 검사방법과 백신이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에 갑자기 나타난 미증유의 재난을 마주하면서도 사람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 애써 모른 척 하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조금은 보게 된 것도 같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 

좋아하는 이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이 시대를 견디기 위해 포기하고 참야아햐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도.





아마도 다시 만나려면 오래 걸릴듯한, 작년 이맘때 지인의 집들이 밥상.


작가의 이전글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세 번째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