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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Feb 27. 2022

'주름지지 않은 삶'이란 없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존 돈반 & 캐런 저커 

미국 공보육 기관에서 잠깐 일하던 시절, 내가 맡은 만 5세 반에는 세 명의 발달장애 아동이 있었다. 특히 정도가 심했던 한 아이는 오전 3시간 정도만 원에 있고, 점심 시간 무렵이면 스쿨버스를 타고 다른 특수교육 기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아이가 우리 원에 있는 그 오전 3시간 동안, 교사들은 이 아이와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매일 아침 교실 문을 들어오는 것부터 어려워했다. 정말 많은 시도 끝에, 나는 아이의 시선을 붙들 수 있는 단 하나의 도구를 발견했다. 흔들면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나무로 된 마라카스. 그 중에서도 그 끝에 빨주노초 색끈이 길게 달려 있는 것. 알렉스가 오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면, 나는 잽싸게 악기 선반으로 가 그 마라카스를 찾아 문 앞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아이가 문간에 나타나면 짤랑짤랑, 나풀나풀, 마라카스를 흔들어 아이를 교실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어 아빠를 보냈다. 물론, 아빠가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알고서 난리가 나는 경우가 없진 않았고, 이 마라카스도 5일이면 5일 내내 다 통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아이가 좋아하는 몇 가지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면 그나마 아이와 ‘연결’되는 느낌이 순간적으로나마 들 때가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각자 자기 자리를 치운 다음 카펫에 둘러 앉아 책을 봐야 하는데, 알렉스는 스스로 치우는 것이 전혀 안 되는 아이였다. 그걸 가능하게 하려고 또 정말 많은 시도를 해봤는데, 5일 중 2일 성공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내 아이 육아 하면서는 좀처럼 하지 않는 ‘보상과 처벌(reward and punishment)’을, 이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서는 해야 했다. “알렉스, 아침 먹은 거 치우고 오면 니가 좋아하는 ‘붕어 밥 주기’ 하게 해줄게” “알렉스, 우유 컵 치우고 오면 니가 좋아하는 ‘물놀이’ 하게 해줄게” 같은 말을 하다 하다 지치는 날엔, 결국 아이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아이 자리를 내가 치우고 닦은 다음, 아이가 들고 있는 장난감을 홱 낚아채 교사용 선반 저 높은 곳에 치워두기에 이르렀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는 울고불고를 넘어서서 뒤로 넘어가는 수준의 탠트럼(tantrum)을 해댔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발달장애 아동 훈육/훈련법으로 알려져 있는 ABA나 플로어 타임(Floor Time)을  배워보고 싶었지만, 시급직 보조교사로 일하는 임시체류 외국인이 그런 걸 돈 내고 시간 들여 배울 여력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은 힘들지만은 않았다. 가끔이지만, 아이는 나와 연결되는 느낌을 본인 스스로도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안 들어준다 싶으면,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아 끌고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 섰다. 다른 선생님에게 혼이 나면,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며 나를 찾아와 그 큰 덩치를 내게 들이밀었다. 만 5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25kg의 거대한 체구를 가진 아이는, 내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꼭 내 다리 위에 앉겠다고 엉덩이를 들이밀곤 했다. 요일과 날짜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아이였기에, 아침 첫 공식 일과인 ‘모닝 미팅(morning meeting)’ 시간엔 일부러 알렉스를 지목해 오늘이 며칠,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다. 정확하게 며칠, 무슨 요일인지 답하는 아이에게 ‘잘 했다’고 추켜세우면, 다른 아이들은 ‘우와, 알렉스 똑똑해!’ 하고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어떤 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아이를 휘감았는데, 그럴 때면 팔자 눈썹을 그리며 조용히 침잠하는 아이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했다. 이 아이에게도 분명 감정이란 것이, 욕구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감정과 욕구를 알아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이 답답하고 미안했다. 


그 ‘무능력’에 대한 양육자/교육자로서의 자책. 아마 그것이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일들의 계기였을 것이다. 전기충격요법부터 ABA, 촉진적 의사소통(FC), 그리고 백신 논란에 이르기까지, 자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많은 일들은 어떻게든 아이들의 ‘자폐’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어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1970-80년대에 사용되었던 전기충격 요법은 지금 누가 봐도 잔인한 인권침해로 여겨지지만, 타임아웃이나 ‘과도교정’은 내가 일하던 원에서만 해도 지속적으로 쓰이는 훈육법이었다. (“과도교정이란 예컨대 식사 때 바닥에 주스를 쏟았다면 자기 컵에 주스를 채우고 나서,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의 컵도 채워주도록 하는 방식이다.” - p. 317)  로바스식 ABA가 주당 40시간씩 아이를 의자에 앉혀 “수백 가지 과제를 수만 번씩 반복”(p. 344)하는 거라는데, 그보다 강도는 덜 할지 몰라도 그 비슷한 수준의 기계적인 반복 훈련은 기본적인 생활 습관 잡는 것마저 쉽지 않은 발달장애 아동을 가르칠 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훈육법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로 생각이 선회하는 것도, 적어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최소한’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방향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듯 보이는 발달장애아들이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너를 알아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을 미안해하는 것’, ‘최소한의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다소 가혹하더라도 훈련하고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쩌면 오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세 장에 걸쳐 등장하는 성인 자폐인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신경다양성’ 논의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1993년, 서른한 살 자폐인 당사자 짐 싱클레어가 자폐증 학회에 나타나 ‘부모들 역시 자폐 당사자에겐 하나의 문제거리’라고 비판했을 때, 부모들은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의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 ‘완치’와 ‘극복’에 몰두하면 할수록, ‘현 상태’에 대한 부정은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건 저 정도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고기능 자폐인’일 경우에나 통하는 얘기라고. 알렉스 같은 아이를 돌보았던 내 경험만 생각해봐도, 그런 아이들의 부모라면 ‘그저 받아들이라’ ‘치료에 목매지 말라’ 같은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대로, 그런 격렬한 갈등과 논쟁의 역사는 “수십 년간 치료와 사회적 서비스와 인식과 이해의 길을 찾는 과정”(p.741) 속에서 이뤄졌고, 그 덕에 사회는 “‘어딘가 다른 개인’의 존엄성을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크게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며칠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딘가 다른 개인’을 만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다소 큰 목소리로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00역까지 가는 데 몇 분 걸려요? 지금 여기서 지하철 타면, 00역에 몇 분에 도착해요?”하고 똑같은 말투, 똑같은 문장으로 두, 세사람에게 반복해서 묻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를 누군가는 대답 없이 헛기침을 하며 못 들은 척 했고, 다른 누군가는 짧게 답을 해주었다. 그가 빈자리에 앉자 그 옆 자리의 누군가는 슬쩍 몸을 피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지켰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지나는 사이, 열차 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올라 타면서 붐볐고, 그의 목소리는 곧 인파에 묻혔다. 그렇게 그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 훈련의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사회’ 속에 들어와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싶던 그 일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본 것 같았다. “자폐증을 겪는다는 것, 자폐인이라는 것은 인류라는 옷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름일 뿐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름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p.741)는 인식. “어딘지 다른 사람이 사실은 “우리 중 하나”,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p.770)하는 것.


“. . . 나이 들어가는 부모들을 넘어선 훨씬 큰 공동체가 자폐 성인들을 옹호한다는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 . . 그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개인의 자폐증적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직장에서든, 토요일 오전에 브런치를 즐기는 동네 식당에서든, 오후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서든, 사람들이 흔히 마주치는 어떤 장소에서도, 심지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든 사람이 어딘가 다른 누군가를 금방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들이며 보호할 조치를 취할 것이다.” (p.769) 


이 일이 정말로 가능해지려면 더 많은 ‘어딘가 다른 개인’들이 집 밖으로, 시설 밖으로, 특수학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낯설고 불편한 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경험이 많아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공존’하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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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Eugene Bm, 정덕, 외 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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