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남성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사당으로 왔다. 서울까지 오는 내내 친구와 통화를 해서 맨 앞자리에 앉은 나로서는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라디오를 듣거나 사투리를 쓰며 친구와 통화하는 중년의 기사님들이 익숙한지라 좀 새로웠다.
가양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타기 전에 든든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김밥천국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메뉴들 중 내가 선택한 건 바로바로 순두부찌개. 두부와 계란이 공급하는 단백질, 그리고 한국인의 패스트푸드답게 후다닥 익혀 나오느라 아직 아삭아삭한 양파와 애호박이 담당하는 야채가 모두 포함되어 건강하게 먹기 힘든 현대인의 죄책감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쪼막만 해서 맛도 별로 안 나는 바지락을 시간 들여 까야하는 콘텐츠까지 제공해 주는 완전식품이다.
한때 내게 순두부찌개는 어른의 상징이었다. 어릴 적 일주일에 한 번 서울로 학원을 다녔는데, 고속버스를 타고 집 근처 터미널에 도착하면 저녁 시간쯤 되어 그날은 항상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 셋이서 김밥천국에서 저녁밥을 먹곤 했다.
메뉴가 그렇게 많은데 우리는 항상 고정된 선택을 했다. 동생은 고기만두, 나는 피자돈가스 그리고 엄마는 순두부찌개. 가끔 한두 입 얻어먹으면서 맛있다고 생각했지만서도 당시 나에게는 피자돈가스의 유혹이 더 강했기에 한 번도 메뉴를 바꿔본 적이 없다.
다 자란 지금 내게 순두부찌개는 김밥천국 최애 메뉴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는데 입맛까지도 물려받지 않았나 한다. 바글바글 끓으며 나온 순두부찌개를 떠서 밥공기에 부었다.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곁들여 먹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국은 말아먹고 찌개는 부어먹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고상해 보이진 않지만서도.
덜 익혀 나온 계란은 국물과 함께 호로록 떠먹을 수 있도록 살짝만 풀어준다.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휘휘 저으면 국물이 탁해지고, 아예 젓지 않으면 덩어리째 익어서 국물 맛이 안 배니 중간을 잘 찾아야 한다. 라면을 끓일 때도 항상 이 철학을 적용하곤 한다. 계란이 익어 나오는 경우 큰 덩어리를 아꼈다가 마지막에 쪼개 먹곤 한다.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다니 매일 순두부찌개만 먹으며 걸어 올라온 것 같지만 사실은 종주를 하는 동안 순두부찌개를 주문한 게 처음이다. 어느 순간부터 매운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서 화장실 찾기 어려운 종주 특성상 위험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서울. 공중화장실 밀도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 선택할 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주기로 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전날 종주를 마친 강서구로 돌아왔다. 점심 먹을 곳이 애매할 것 같아서 모듬김밥도 하나 포장해 왔다. 모듬김밥이 야채김밥 같은 게 아니라 소고기, 김치, 참치 등 모든 특수김밥 재료를 다 조금씩 넣은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아무튼 힘든 여정이니 이런 럭셔리를 좀 즐겨주기로 한다.
예상치 못하게 SBS 사옥을 지나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공방 뛴다며 방송국 앞에 줄 서는 장면을 SNS로 자주 보곤 했는데 이런 거였군 싶었다. 역시 국토종주, 한국의 이모저모를 목격할 수 있는 여행.
과다 섭취한 탄수화물 때문인지 졸려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데도 왜인지 힘이 넘쳐서 뚜벅뚜벅 걸었다. 워치를 확인해 보니 속도가 무려 6.2km/h. 종주하는 내내 5km/h만 나와도 겁나 빨리 걷고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날이 너무 더워서 마침 만난 벤치에 앉아 쉬며 후드티를 벗었다. 김밥이 상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역시나 김밥은 겨울종주의 음식이구나.
서울 강서구의 끄트머리, 방화근린공원에 진입했다. 공원이 생각보다 잘되어 있어서 놀랐다. 10년 전 종주할 당시에는 1일 차 기록을 많이 남겨놓지 않아서 이런 기억은 모두 휘발되고 없다. 이번 종주는 그래도 다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할 수 있어 다행이다.
세상에나, 종주하면서 풀꽃을 다 보네. 전날 매화를 보긴 했지만 땅에 핀 꽃은 또 느낌이 다르다. 내내 회색빛을 띈 죽은 풀들만 보다가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보니 새삼 신기하고 설렌다.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많이 보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해치의 새로운 캐릭터. 엄청나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 캐릭터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저 초록 공룡이 너무 내 취향.
이 좋은 날씨를 즐기러들 나오셨는지 자전거 타는 사람이 정말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자전거도로를 피해 비교적 조용한 흙길로 들어와 걸었다.
와중에 자꾸 잠이 와서 벤치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종주 내내 해오던 짓인데 비교적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하려니 좀 민망스러웠다.
죽창 (아님)
끊임없이 지나가는 자전거를 피해 고요해 보이는 사진 한 장 찍기.
한강을 지나며 찍었던 사진인데 같은 표지판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김포로 넘어가는 경계선에서 서 재현사진을 찍었다. 누가 볼까 부끄러워 동동거리던 10년 전의 손발이라니.
질러가면 금방 갈 거리를 빙 둘러서 자전거도로를 내놓았길래 풀씨 좀 붙으면 어때 빨리 가야지 하고 고개를 돌리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놓은 길이 눈에 들어와서 피식 웃었다. 한국인 성질머리란.
국토종주의 마지막 관문인 아라자전거길에 입성했다. 아라 한강갑문 인증센터 도장을 찍고 나니 앞으로 남은 도장은 단 한 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언제나 인증부스 앞에서 사진을 찍어 왔는데, 이날은 자전거가 정말로 끊임없이 들어와서 치일까 두려운 마음에 뒤쪽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자전거 인구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자전거 라이딩 명소답게 간이 자전거 수리센터가 여럿 보인다. 심지어는 자전거 손세차(;;)까지 있다. 기름 냄새를 반찬삼아 김밥을 꺼내 먹었다.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았지만 더 버텼다간 다 상해서 배탈 당첨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라이더가 되어볼까 잠깐 상상해 봤다. 마흔에 세 번째 국토종주를 하게 된다면 도보로는 불가능해서 자전거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내키지 않는다.
내 몸 상태는 내가 느끼고 조절할 수 있다. 실제로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크고 작은 통증을 감지해 내서 휴식이나 식사의 타이밍, 숙박 위치 등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자전거는 기계다. 어딘가 잘못되어 감을 내가 직접 느끼기 어렵기에 예상치 못한 고장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는 내 성격에 달갑지가 않다.
김포시 안녕. 진입할 때 표지판을 못 만나서 김포 마지막 표지판에서라도 찍어주기로.
길을 잘못 들어서 조금 돌아왔다. 수치로 보면 먼 길은 아니었지만 쓸데없는 데에 에너지를 낭비한 것 같아 기분이 좀 사그라들었다.
날이 더우니 걷기가 힘들다. 끔찍하게 더운 날은 잘 버티는 반면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보일러를 29도로 올리고 집에 틀어박히는 추위 싫어 인간임에도 그랬다. 여름 종주보다는 겨울 종주가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김포에서 인천 가는 길목에는 정말 많은 물류센터와 터미널들이 있다. 평일에는 북적거릴는지 모르겠지만 일요일에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 드넓은 공간에 중장비만 가득하고 사람은 안 보이니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공원에 들어서니 다시 인구밀도가 높아진다.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다.
긴긴 국토종주의 종착지이자 이 여정에서 걷는 마지막 도시가 될 인천에 드디어 진입했다. 인천이다, 인천!
강을 향해 나있는 데크들에 '플라잉가든'이라고 표시가 되어있어서 뭔가 싶었던 마음, 몇 분 안 되어 해결. 멀지 않은 곳에 공항이 있어서인지, 이곳에 서 있으면 정수리를 스칠 듯 가깝게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다.
해가 너무 쨍쨍해서 눈이 부셨던 탓에 찡그리고 걷느라 미간이 욱신거렸다. 모자라도 쓰고 올 걸, 후회가 됐다. 햇볕이 강하지 않다는 것도 겨울종주의 장점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편인지라 맑고 따뜻한 날씨는 언제나 내게 기분 좋은 존재였는데,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자니 어색하기도 하고 날씨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매점이 보여서 물 한 병을 사 먹고 엎드려서 쉬었다. 14km 정도 남았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힘들다 힘들어.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 소리를 지르며 다른 아저씨에게 싸움을 거는 바람에 오래 쉬지는 못했다.
국토종주는 메멘토 모리 여행이라고 여러 번 농담조로 언급했는데 마지막 날까지 시체를 만나게 되다니. 죽어서 말려진 채로 이곳에 왔는지, 살아서 이곳에 온 다음 죽어서 말라버렸는지, 알 길이 없는 바짝 마른 생선 시체.
걷는데 왼쪽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문득 몇 달 전 PT 트레이너와 오랜 미스터리를 밝혀낸 순간이 떠올랐다. 운동할 때마다 '회원님은 왜 오른쪽 발목 힘이 더 좋을까요? 미스터리네.' 하셨는데, 피아노 연주회 한다는 얘기를 하다가 함께 무릎을 탁 쳤다. 피아노를 치면 오른발로 페달을 밟는데,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에 까딱거리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많이 되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원인이라 웃겼다.
10년 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을 따라 걸으며 구간마다 떠 있는 숫자를 보고 '이 숫자가 어디까지 갈까, 마지막 숫자를 보면 그다음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다.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라 그 길을 되짚어 걷는다. 1번을 보고 나면 완결에 가까워지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이 길을 왕복하는 중이니까.
교회 예배가 끝난 참인지 삼삼오오 모여 걷고 있는 신실해 보이는 사람들을 길동무 삼아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동네에서 멀어졌는지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중학생뻘 되는 남학생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은.
'와- 엉덩이 봐. 내가 따먹어야지!'
'ㅋㅋㅋㅋ 미친 새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근방에 사람이라곤 금방 점이 되어 사라진 그들과 나뿐이었으니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부산부터 인천까지 홀로 걷는 웅장한 여정을 마무리하려는 참인데 엉덩이 얘기나 들어야 하다니.
재미있는 건 10년 전 막 부산에 도착해서 설레하던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10년 전 그날의 가해자는 성기를 꺼내 보여준 아저씨였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이렇게나 많이 변화했는데, 이 땅의 남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내게 한결같은 불쾌함을 안겨주고 있구나. 굉장하네.
한밤중 산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처럼 머리가 차게 식었다. 현실적으로 저들을 처벌할 수 있나? 그들은 이미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서 사라져 버렸고, 대신 잡아줄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경찰을 부른들 강력범죄도 아닌 건에 CCTV를 돌려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기가 어렵거니와 이 외진 곳까지 출동할 것을 기다릴 시간도 내게는 없었다.
내게는 한 가지 선택뿐이었다. 그들이, 그 사건이 내 기분을 망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들은 이미 내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그러쥐고 분노할지, 그것을 얼른 삽으로 떠내 내 세계 밖으로 던져버리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지는 내 손에 달려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강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안다.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나는 분노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음속 유리파편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 올려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방향으로.
기적처럼 불쾌한 마음이 잦아들었다. 몇 걸음 안 가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두근거리던 모험가의 기분을 되찾았다. 나 이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제 이런 방식으로 나를 지켜낼 수 있구나. 스스로가 너무나도 기특하게 여겨졌다.
4시쯤 되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서 후드티를 입어도 덥지 않았다. 쉼터를 지나며 빵이나 라면을 사 먹을까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도착하고 싶었다. 잠깐 앉아 쉬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떨어지는 해는 항상 야속했지만 이날만큼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갑작스럽게 만들어낸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마지막 인증센터에 가까워지니 화물 터미널이 더욱 많이 보인다. 사람은커녕 개미새끼조차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고요한 항구를 초조하게 걸었다. 한쪽에는 석양이, 다른 한쪽에는 달이 떠 있었다.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이 두 존재와 자주 씨름해야 했지, 지는 건 항상 나였지만서도. 마지막 날이라고 둘 다 마중 나와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비현실적으로 큰 풍력발전기가 이곳저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인증센터까지 500m, 다리가 뒤틀릴 듯 아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걷고, 걷고, 걷는 것밖에는. 어디에선가 라일락 향기가 풍겨왔다. BGM도 아니고 배경향기라니, 참으로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에는 뭔가 특별한 생각을 하려나 했는데 언제나처럼 똑같은 생각, 집에 어떻게 가지, 저녁에 뭐 먹지, 힘든데 언제 쉬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를 머릿속으로 무한 반복했다.
완주까지 5m, 4m, 3m, 2m, 그리고 1m... 인천에 도착했다. 10년 전 떨리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던 그 자리에 10년 만에 다시 왔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를 걷고, 10년간 회사에서 일을 하고, 그리고 부산에서 인천까지 다시 걸어서, 이 자리에 돌아왔다.
10년 전 종주를 마치고 마지막 도장을 찍었을 때의 마음은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려나, 뛸 듯이 기분이 좋겠지? 이런저런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뜻밖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점심밥을 다 먹은 것처럼, 별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여행 중 만난 어른들이 모두 나보고 대단하다고, 이 기억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할 거라고 말해주었는데, 왜 막상 마치고 나니 아무렇지 않지? 뭔지는 몰라도 더 굉장한 마음이 들고 벅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종주를 하면서 그때 감정의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나의 국토종주는 완주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인천부터 부산까지, 그리고 부산부터 인천까지 걸어오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맡고 맛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 그 자체가 내게는 귀한 수업이었다.
울며불며 걸어내고 만 낙단보 구간과 감정을 배제해 버리고 전투적으로 걸어내 버린 원주 구간, 주겠다는 도움을 거절하지 못해 얼떨결에 점프해 버린 구미보 구간과 간절했던 마음을 알아보고 흔쾌히 내밀어 주신 도움의 손길 덕분에 걸어낼 수 있었던 의령 및 창녕 구간, 먹고 싶지만 꾹 참았던 10년 전의 꿩고기를 스스로에게 먹여주기 위해 단숨에 올랐던 이화령 고개...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수업이었고 또 얼마나 성장했는지 일러주는 성적표였으며 앞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해결해야 할 과제 꾸러미였다.
완주 지점을 뛰어서 통과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과 엎치락뒤치락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이 긴긴 여행을 두 번째로 완성해 냈다. 덤덤했던 10년 전과는 달리, 기뻤다.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찍었던 마지막 도장과 인천에서 찍는 마지막 도장. 그리고 정말 마지막 인증센터 인증사진.
느닷없이 목표로 삼은 '해지기 전 완주하기'도 가까스로 달성했다. 몰랐는데 정서진이 해넘이 명소인 모양이다. 국토종주 따위는 모르지만 멋진 해넘이를 보러 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아니나 다를까 근사했다. 국토종주 내내 그토록 두려워했던 노을이었는데. 이때까지는 그 뒤에 바짝 쫓아오는 어둠이 무서웠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서른의 여정인 여기에서 일단락이니까. 나는 이제 빛이 가득한 내 도시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노을이 아름답게 보였다.
해가 지는 하늘을 만끽하며 집에 갈 방도와 저녁 메뉴를 궁리했다. 옵션 여러 개를 두고 요리조리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하고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이내 도착한 택시 기사님은 내게 '인천에 오래 살았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네, 뭐 이런 곳에서 콜이 오나, 가면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했어요' 하셨다.
문득 10년 전 종주를 시작하기 위해 이곳에 택시를 타고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기사님은 목적지를 듣더니 한참을 횡설수설하며 '하 참, 젊은 사람이...'와 같은 말을 반복하고 결국에는 다른 번화가에 나를 내려주었다. 내가 나쁜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겠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부산에서 인천까지 걷는 여정을 마친 참이라며 자랑도 아끼지 않았다. 참 대단하다는 기사님의 말에 기쁨이 가중되었다. 오래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망의 '국토종주 마지막 메뉴'는 바로,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먹는 황두면. 마제소바의 중국식 버전 느낌인데 듣도보도 못한 메뉴인지라 맛이 없으면 어쩌지 하고 고민을 한참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황두면은 정말 정말로 맛있었다. 기름진 고기와 간혹 씹히는 야채의 식감 그리고 쫄깃한 면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내 취향이었다.
아침에는 난생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출발했는데, 저녁은 학창 시절 추억이 잔뜩 묻어있는 동네에서 마무리하게 되다니.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전혀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게 국토종주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국토종주자로서 최후의 만찬인 황두면을 싹싹 비운 다음, 전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정말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나는 서른 살 국토종주의 마지막 챕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 '서른, 두 번째 나 홀로 국토종주'는 다음 화를 마지막으로 완결됩니다. 그동안 읽어 주시고 좋아요 눌러 주시고 댓글 달아 주셔서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