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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과 서른 살, 두 번의 국토종주: 무엇이 달랐나

인생 두 번째 국토종주를 마친 뒤의 소회

by 나래 Mar 02. 2025


이로써 내 인생 두 번째 국토종주가 마무리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던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감각은 한 달이 지나서야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해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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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간 길 위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그전에는 당연스레 누리던 일상의 요소들이 새삼 신기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하루종일 끼니 때울 곳을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 아침에 김밥을 사서 하루종일 들고 다니다 먹거나 젤리 따위로 저녁밥을 대신하는 날들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나의 허기를 해결할 방법을 24시간 내내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누워서 기다리다가 현관문 앞에 걸려 있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까지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편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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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먹고 길에서 지내던 날들


나는 더 이상 발목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낼 필요가 없다. 발 딛는 곳에 흙도 풀도 없기 때문이다. 20일 만에 해지고 만 내 러닝화는 이제 잘 닦인 아스팔트 길과 보도블록 위만을 걷는다. 비가 퍼붓고 난 뒤에도 하루면 바삭하게 마르는 깨끗한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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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눅눅한 속옷과 양말을 집어 들고 '하루를 더 입을까, 말까' 하던 고민 역시 잊힌 지 오래다. 추우면 네 겹, 따뜻하면 세 겹 하는 식으로 두께만 바꿔 가며 내내 입던 똑같은 옷들은 고이 접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깨끗하게 빨아서 개어 놓은 속옷을 입고, 때가 타면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는 잘 다려진 옷을 입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내내 마음을 불안케 하던 잠자리에 대한 고민, 오늘은 과연 어디에서 밤을 보내게 될지, 벽이 있고 천장이 있는 곳에서 눈을 붙일 수 있을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깨끗한 이불을 덮는 사치가 허락될지에 대한 걱정도 이제는 할 필요가 없다. 밤이면 보일러가 팽팽 돌아가는 따뜻한 집에서 콸콸 쏟아지는 온수에 샤워를 하고 뜨끈뜨끈한 전기장판과 바삭한 이불 사이에 몸을 쏙 집어넣은 다음 단잠을 잔다. 아-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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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과 2024년의 국토종주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 십 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여행을 두 번 반복했다. 강산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한강도 끝을 모르고 넓고 길게 펼쳐진 낙동강도 모두 그대로였다. 많이 바뀐 건 세상이었다. 10년 전 종주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기고 길을 나선 나에게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바로 스마트폰 기술의 발전. 10년 전 나와 동행해 준 핸드폰은 갤럭시 노트2였다. 종주 초반 경로 기록을 해보겠다고 GPS를 켜고 걸었다가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배터리가 다 닳아서 허둥지둥 전원을 끄고 필요할 때만 잠깐씩 켜서 확인했는데, 그럼에도 숙소를 찾기 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난감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숙박할 곳을 찾아 충전기를 꽂는 그 순간까지 핸드폰을 살려놓는 것이 당시에는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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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종주는 갤럭시 S23 Ultra와 함께했다. GPS를 내내 켜놓고 경로 기록 어플을 두 개나 돌리며 걸어도 하루종일 핸드폰을 살려둘 수 있다. 고장 난 모텔 충전기에 꽂아두고 잔 날을 제외하면 사실상 배터리 때문에 마음 졸인 날이 하루도 없다.


배터리 기술의 발전은 핸드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대륙의 실수라는 샤오미 보조배터리 10000mA 짜리를 새로 사서 챙겨갔는데, 밤새 충전해서 챙겨나가면 핸드폰을 두 번 완충할 수 있을 용량이라 오후 네 시쯤 핸드폰과 스마트워치를 한 번씩 채워주면 늦은 밤 걷기도 문제없었다. 10년 전에는 여분 배터리(그렇다, 당시에는 스마트폰 배터리도 분리할 수 있었다)와 보조배터리 하나씩을 챙겼는데, 보조배터리 용량이 얼마였더라 하고 확인해 보니 1800mA였다...! 그걸 누구 코에 붙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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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지원하는 기능의 범위도 훨씬 넓어졌다. 가장 유용했던 것은 바로 지도 어플. 요즘은 지도 어플에 '숙소', '식당' 등의 키워드를 치면 주변에 위치한 업장들을 모아서 보여주지만 10년 전에는 이런 기능이 없었다. 그러했던고로 일단 포털 사이트에 '왜관읍 숙박'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서 블로그 포스팅 등을 클릭, 업장명을 알아낸 후 지도에서 위치를 검색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당시에는 종주한 사람이 지금보다 없어서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도 했고, 지도 앱에 후기 및 연관 포스팅 기능이 없어서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지도 어플에 기능이 많아져서 식당과 숙박 찾는 것 외에 자전거도로 대신 인도, 또는 우회로 찾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


카메라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다. 강산은 그대로이고 그걸 찍은 핸드폰 기종만 달라졌을 뿐인데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 줄이야. 화질뿐 아니라 편리성도 개선되었다. 카메라 세팅해서 타이머 맞춘 다음 셔터 누르고 와다다 뛰어가서 포즈 잡고 확인하고 다시 찍고, 무한 반복하던 예전 종주와는 달리 이번에는 스마트워치의 리모트 카메라 기능을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구도와 포즈를 확인하며 사진을 찍었다. 시간과 에너지는 단축되었는데 퀄리티는 어마어마하게 상승하는 놀라운 현상. 요즘은 핸드폰 기본 갤러리 어플로 각도조정, 크롭, 영상편집 등의 보정도 가능해서 간중간 정리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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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스마트워치. 축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지만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안 사고 버티다가 국토종주를 위해 하나 구매해 가지고 간 바 있다. 실시간으로 내 심박수와 속도, 누적걸음수와 거리를 측정해 줘서 컨디션을 체크하는 데에 유용하게 썼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너무 디지털화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출발을 위해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 현금을 인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나게 불안해했던 기억이 있다. 하필이면 현금 인출 기능이 막혀 있는 체크카드를 챙겨 온 탓이었다. 기능을 해제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한데, 신분증이랍시고 들고 온 공인인증 어플 주민등록증은 주민번호 뒷자리가 나오지 않아 사용이 불가했다. 정말이지 대환장파티.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데 어쩌나. 나중에 필요하면 편의점 현금서비스라도 받을 생각으로 일단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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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금을 쓸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0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지방의 아주 작은 마을들에도 편의점이 두세 개씩 있었기에 삼각김밥 하나 사며 카드 내는 데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낡은 식당들도 모두 카드를 받고, 붕어빵 노점들은 계좌이체를 받는다. 10년 후에 다시 종주를 한다면 그때는 아예 현금 없이 길을 나서도 별 문제가 없을 성싶다. 거지 적선도 QR코드로 받는다는 중국 얘기를 듣고 놀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국도 이제는 화폐의 디지털화가 많이 진행되었구나 싶었다.


체감한 세상의 변화, 그 마지막은... 바로 '더 따뜻해진 지구' 되시겠다. 10년 전에는 날씨 때문에 종종 고생을 했다. 2일 차 되던 날은 얼굴가죽이 뜯어질 것처럼 추웠고, 이화령을 올랐던 8일 차에는 눈이 잔뜩 쌓여서 눈썰매를 타고 내려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결국 용기 내서 도전했는데 실패해서 조용히 걸어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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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종주를 하는 동안은 눈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11일 차에 나와 반대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는 자전거 종주자로부터 눈을 맞으며 왔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날 그 길을 걷는 동안 바위에 매달린 고드름을 이따금 목격할 때마다 '아 눈이 오긴 왔구나-' 생각한 것이 전부다.


와 얼음이다 신기하다-!!와 얼음이다 신기하다-!!


그렇다고 날씨 때문에 고생을 안 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창녕과 여주, 원주, 그리고 서울 강남을 걷는 동안은 비가 정말 너무너무 많이 와서 옷이 다 젖고 핸드폰이 침수되는 등 고비가 많았다. 청주와 문경을 걷는 동안에는 바람이 하도 불어서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안 밀리고 버티는 데에만도 에너지를 써야 했다. 괴산을 향해 가던 날에는 춥기는커녕 날이 더워서 내복 대신 반팔을 챙겨 왔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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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인데 날이 이렇게 안 추워도 되는 건가. 10년 후 종주는 정말로 반팔을 입고 하게 될 것인가. 물론 하루종일 바깥공기에 노출되어 있어야 하는 종주자 입장에서야 나쁠 것 하나 없는 조건이라지만, 지구 위 땅 한 조각에 세 들어 사는 입장으로서는 초조해질 만한 현상이다. 온난화에 대한 경고야 항상 듣고 있지만, 이렇게 변화를 직접 체감하고 나니 좀 오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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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과 서른 살의 국토종주


세상만 변한 것이 아니다. 나도 변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존재할 영생의 세상에게도 10년이란 발전을 이뤄내기에 충분할 만큼 긴 시간인데, 하물며 한정된 시간을 사는 나에게는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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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는 어렸다. 그때와 지금의 사진을 붙여놓고 보면 얼굴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당시에는 콤플렉스였던 동글동글한 얼굴에서 젖살이 빠지면서 이제는 광대뼈와 턱이 도드라지게 되었다. 이 역시 젖살이 빠진 덕인지, 아니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쌍꺼풀 수술을 하고 온 친구들에게서 안검하수라는 개념을 처음 전해 듣고 '이마 쓰지 않고 눈꺼풀 힘만으로 눈 뜨기' 연습을 거듭한 덕에 눈에 힘이 생긴 덕인지, 또는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 모양도 찢어진 모양에서 둥근 모양으로 좀 바뀌었다.


당시에는 누가 봐도 앳되어 보던, 아니 실제로 앳되었던 탓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미성년자는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 법적으로 숙박업소 출입이 가능해진다. 즉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 되면 주류 구매와 숙박업소 이용 모두 합법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숙박업소에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합법이라는 자료를 들이밀어도 '모르겠고 우리는 미성년자 안 받아요' 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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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곳이 널렸다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는 곳을 찾았겠지만, 국토종주길의 숙박 사정이란 게 그리 녹록지가 않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찜질방을 주로 이용했기에 선택의 폭이 더욱 적었다.  나와 옥신각신하는 찜질방 카운터를 단골 아주머니가 설득해서 들여보내준 적도 있고, 하여간에 잠은 어디든 들어가서 다 자기는 했다만, 여린 마음에 거절을 당하고는 속상해서 엉엉 운 날도 하루이틀이 아니다.


서른의 국토종주는 이런 관점에서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숙박 어플이 잘 되어 있어서 사전에 예약하고 키를 받은 경우가 많기도 했고, 이제는 '쟤를 재웠다가 무슨 험한 일을 당하려고' 하는 불안을 안겨주지 않는 '누가 봐도 성인 얼굴'이 된 덕분도 있다. 일단 잠자리만 찾으면 잘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큰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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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사실의 단점은... 뭐니 뭐니 해도 신체적 능력. 10년 전에 써둔 글을 보면 '나는 평소에 운동을 전혀 안 하는 체력 쓰레기 인간인데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아냐, 그게 네 인생 최고의 몸 상태야...


어느 날은 이런 문장도 적어두었다. '오늘의 목표거리는 33km. 말하자면 기어가도 갈 수 있는 거리.' 놀랍게도 33km는 이제 과장 조금 섞어 기어야만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으니. 당시에는 35km 정도는 그냥저냥 힘들다 하며 걸었고 45km를 넘긴 날은 울면서 걸었다. 이번에는 27km 정도 걸으면 적당했고 35km가 넘어가면 부상이나 통증, 또는 다음날 컨디션 저하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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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 체력이 좋다는 말은 젊을 때 '오오 힘이 넘친다! 너무너무 건강한 나!'를 외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따로 관리하지 않으면서도 건강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던 내가 이전보다 쉽게 다치고 쉽게 병들며 이전에는 없던 병을 얻고 '아니 내 몸에 이런 신체 부위도 있었어?'를 깨닫는 빈도가 높아질 때, '아 내 썩은 생활 습관을 이때까지 젊음이 커버해 줬던 것이로구나. 계속 이렇게 살다간 앞으로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겠구나!'를 깨우칠 때 비로소 젊음이 좋다는 인생 선배님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젊음이 인생 초반에 주어진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하다는 말, 사무치게 공감된다.


사실 출발 전에는 기대를 좀 하기도 했다. 학생 때는 운동을 싫어했고 아예 하지를 않았는데, 20대 중반부터 운동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종주를 출발하던 시점에는 쭉 PT를 받으며 웨이트를 한 지가 2년째에, 주말이면 등산이며 사격이며 축구, 풋살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기러 바쁘게 쏘다니는 운동 덕후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스무 살 때보다 수월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조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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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체력이 아니었다. 뭐, 그렇게 운동을 해댔으니 그나마 체력이라도 문제가 안 된 것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서도... 아무튼 진짜 문제는 몸의 내구성이었다. 에너지가 떨어져서 힘들었던 날보다는 어딘가가 아파서 괴로웠던 날이 더 많았다. 골반, 무릎, 발목 등의 부위에 자꾸만 통증이 도져서 체력이 남는데도 더 걷지 못하고 쉬었던 적도 많다.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빠른 회복이 되지 않아 결국에는 고통을 참고 걸어야 했다. 툭 치면 와장창쿠당탕 무너져내리는 유리몸이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나이 들었음을 여실히 체감한 여정이었지만, 딱히 서럽지는 않았다. 백세시대에 서른이면 아주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어차피 떠나가고야 말 젊음이라면 나이를 먹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이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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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이 먹고 무엇을 얻었냐고? 그건 바로 재력. 서른의 나는 스물의 나보다 훨씬 돈이 많았다. 십 년의 직장생활로 쌓아온 부는 비록 회사를 당장 그만둘 정도로 넉넉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십 년 전의 내가 돈이 없어 하지 못한 것들을 실컷 즐기도록 해 줄 정도는 되었다.


누가 훔쳐갈세라 '국토종주 중인데 제발 가져가지 말아 달라' 호소문을 써서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둔 핸드폰을 꼭 끌어안고 찜질방 구석에서 자곤 하던 나를 안마의자가 있는 모텔 특실에 재워줄 때, 10년간 먹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온 수안보 꿩고기를 코스요리로 먹여줄 때, 그 외에도 삼랑진 딸기라떼며 향어회 덮밥이며 먹고 싶은 거라면 다 사 먹고 배를 두드리며 걸을 때, 아 나 이제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에 어찌나 뿌듯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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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된 장비 역시 언급을 빼놓을 없다. 당시 국토종주 룩에는 '신규 구매'가 없었다. 마의 옷장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옛날 기모 바람막이와 웃옷, 추운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셜커머스에서 최저가로 구매했던 보풀 잔뜩 인 레깅스와 목도리, 그러니까 그냥 있는 옷 중에 제일 따뜻해 보이는 조합으로 꿰어 입고 나온 셈이다.


신발 역시 그냥 신발장에 있던 것 중 가장 편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었다. 당시에는 운동을 하면 운동화를 신는다 정도의 아이디어만 있었지, 어떨 때 어떤 운동화를 신는지 구분이 되어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신발은 너무 딱딱하고 커서 여정 내내 질리지도 않고 무한정으로 물집을 공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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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배낭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이었던 당시의 내가 들고나간 가방은 다름 아닌 책가방이었다... 좋아하는 가방이라 선택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귀여운 발상이다. 그 조그마한 가방에 이것저것 쑤셔 넣고 잘도 다녔지 싶다.


두 번째 종주라고 해서 아주 대단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지만서도, 그때에 비하면 신경을 쓰기는 썼다. 옷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있는 걸 입었지만, 나름 더 비싸고 나름대로 기능성이며 색의 조합이 괴랄하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큰 주머니가 여러 개 확보되어서 걷는 내내 유용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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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화는 발 측정해 주는 곳에서 새로 하나 샀는데 종주하는 내내 물집이 단 한 개도 잡히지 않아 신발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낭은 신입사원 연수 때 받아서 마르고 닳도록 쓰고 있는 빈폴 백팩으로 선택.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무거운 짐을 넣어도 매 보면 가볍게 느껴져서 좋아하는 가방이다.


하나 아쉬웠던 것은 뒷모습 사진을 찍으면 보이던 날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름에 날개라는 뜻이 있어서 나름 의미가 있는 문양이었는데 말이다. 원래는 빈폴 백팩에 날개 패치를 붙이려고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딱히 마음에 들 정도로 예쁜 것이 없어서 그냥 없이 걷기로 했다. 대신에 보라색 리본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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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더 먹은 덕을 본 건 경제력뿐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훨씬 어른이구나' 느낀 순간들이 제법 많았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바로, 이번 종주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사실. 10년 전 종주 기록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울 일이 많았는지, 여관에서 숙박을 거절당해 서러워서 울고, 물집 잔뜩 잡힌 발이 아파서 울고, 해는 졌고 다리는 아픈데 잘 데가 없어서 울고, 텍스트가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눈물 흘린 날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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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엉엉 울만한 힘든 날이 한두 번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그런데 20일 내내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정말 힘들거나 어려운 상황이 오면, 즉 '좆됐다!'라고 느껴질 때면, 감정의 스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지금 내 몸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고, 어디까지 가는 게 나에게 최선이지? 위기 가운데서 냉철하게 머리를 굴리는 스스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야 너 일상에선 이렇게까지 냉정하지 않았잖아?! 너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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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또 스스로가 어찌나 장하던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가. 이렇게 착착 스스로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게 된 건 다 과거의 내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눈물을 닦고 상처에 새 살을 돋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마흔 살과 쉰 살, 그리고 그 이후의 나에게 서른의 나는 여전히 어리숙한 모습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내가 스무 살의 나보다 현명하고 침착하다는 사실에는 확신이 든다. 왜인지 모를 두려움에 덜덜 떨며 지나온 터널들도, 죽은 것과 산 것 둘 중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무서운 마음에 눈물 가득 머금고 콧물을 훌쩍이며 걸었던 해진 뒤의 어두운 길들도, 두 번째 국토종주를 하는 동안은 무사히 가로질러올 수 있었다. 그전과 이번 종주 모두 마지막 날에 성희롱을 겪었지만 혼란스러웠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불쾌함을 신속하게 떨쳐내고 완주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하고 더 단단해졌다. 이제는 편치 않은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또 지켜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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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확고하고 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체감한 변화다. 10년 전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쭈뼛거림이 느껴진다. 그때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아주 중요했기에, 남들이 보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나란 인간, 지난 10년간 남들 안 하는 짓만 하며 살아왔다. 타인의 시선 따위 이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지. 덕분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아주 많이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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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뿐 아니라 국토종주라는 여정 자체에도 이 확고함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 종주는 시작부터가 선명했다. '이 고생을 왜 또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는 상태였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여행이었으므로. 걷는 동안 무엇을 얻고 싶은지를 오래 생각해 왔기 때문에 어떻게 경로를 설정하고 어디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일지 결정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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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낙단보 자전거민박에서 묵은 다음날의 일이다. 자전거민박이 낙단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트럭을 타고 다시 낙단보로 돌아가 여정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구미보까지 점프를 제안했다.


'자전거 종주하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해~ 구미보까지 데려다줄 테니, 그냥 거기서부터 걸어요.'


우유부단하고 소심했던 나는 달리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반강제적으로 낙단보-구미보 구간을 점프하게 되었는데, 구미보에 내린 뒤 마음도 발걸음도 무거워 걷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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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종주에서는 스스로 원칙을 세웠다.


1. 다치지 않는 것이 제1원칙. 마지막까지 부상이 없어야 한다.

2. 궁극적인 목표는 '부산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다. 부산에서 인천까지 이어지는 길을 온전히 내 발자국으로만 잇는 것이 목표이며, 제1원칙 준수를 위해 우회로, 도보경로를 적극 활용하고 부상이 염려될 경우 하루고 이틀이고 쉬었다가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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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심각한 통증을 겪고 세운 이 원칙들은 고민될 때마다 결정의 기준이 되어주었다. 13일 차 삼각대를 두고 왔을 때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가 탑승한 자리에 하차해서 여정을 이어간 것도, 마지막에 감기몸살에 당첨되어 연차를 쓴 기간 내에 완주하지 못하고 몸을 회복한 뒤에 마저 걸어 완주한 것도, 이 기준에 따라 내린 결과였다.


어찌 보면 구미보 구간을 점프했던 것처럼 마음이 무거울 수도 있었을 만한 결정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를 속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발걸음이 무겁지도 않았다.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허무했던 10년 전 완주의 순간과는 달리, 이번의 완주가 내게 가슴 터질 듯한 기쁨을 안겨준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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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특: 꽃 사진임.


나이를 먹을수록 자연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건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인 걸까? 더 어릴 적에는 봐도 별 감흥이 없었던 풍경과 식물 그리고 동물의 존재들이 이제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윤슬과 탁 트인 남한강의 정경, 얽히고설킨 겨우살이들이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들과 함께 떠낸 복잡한 패턴들, 그런 장면들에 나는 걷는 내내 진심으로 감탄했다.


국토종주를 한 건지 탐조 여행을 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많고 다양한 새를 목격한 것도 하나의 변화. 이 새들이 한국에 하루이틀 살았을 것도 아니고, 십 년 전에도 분명히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종들인데, 이제 와서야 이렇게 눈에 들어오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마흔 나래의 눈에는 또 어떤 새로운 존재가 보일지,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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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


안락하고 따뜻한 집을 벗어나 궂은 날씨를 맨몸으로 들이받아가며 20일간 험난한 걷기의 여정을 이어가다 보면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고 성찰할 기회가 넘치도록 주어진다. 걷는 동안 깨달은, '아, 나 이런 사람이구나!'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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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연달아 여러 날을 걸어야 하기에, 국토종주를 하는 동안은 평소처럼 자제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날것의 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각종 양념 싹 덜어낸 내 모습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힘든 날이면 나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음식을 주문하고, 목구멍 너머로 와구와구 쑤셔 넣곤 했다. 목표한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것도 뜻밖에 고난이었다. 저녁에 과식을 한 다음 소화시킨다는 핑계로 늦게 자고, 아침에 미적거리다가 늦게 나오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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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이런 모습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회사 열심히 다니며 일상을 사는 동안에도 나는 똑같이 행동했다. 특수한 상황에 분리해 놓으니 더욱 선명히 도드라져서 파악하기에 수월했을 뿐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내가 어떤 패턴으로 행동하는지 긴 시간 관찰한 경험은 이후로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스트레스 수치를 탐지해 내는 안테나의 감도가 향상되니 적절한 때에 쉬어줌으로써 탈진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적당히를 모르고 스스로를 갈아 넣는 성격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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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깨달은 것은 길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재미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10년 전 원치 않게 구간 점프를 해야 했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거의 집착 수준으로 자전거길을 따라 걷기에 매달렸던 나는 사흘차에 부상을 당한 뒤 목표를 수정다. 우회로를 적극 활용하며 완주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내 국토종주는 그전보다 배로 다채로워진다. 자전거길과 인도는 거쳐가는 풍경부터가 다르다. 전자는 오로지 자전거 통행을 목적으로 강변 외진 곳에 깨끗하게 닦아놓은 길인 반면, 후자의 목적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경로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따라가면 자연스레 사람 사는 땅들을 굽이굽이 후벼 파며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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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살의 나이차를 둔 두 명의 후보자가 경쟁하는 농업협동조합 대의원 선거의 현장이라던지, 세 가지 맛을 한 마리 붕어빵에 응축시킨 예술적인 붕어빵 트럭, 잠깐 눈만 붙이고 출발하려다가 새벽예배 드리러 오신 분들에게 딱 걸려 아침밥까지 얻어먹게 된 작은 마을 교회 같은 것들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귀한 존재들이다.


잘 닦인 길을 걷는 일은 안정을 줄지언정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면 험난할지언정 예측불가한 미래가 풍기는 설렘의 향기를 끊임없이 들이킬 수 있다.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해방됨으로써, 도전일 뿐이었던 내 국토종주는 비로소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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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 위에서 입사 10주년을 맞이했다. 좌충우돌이었던 신입사원 시절과 비교해 보면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자리를 잘 잡고 앉은 상황이었다. 나를 믿어주는 좋은 상사들이 있었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간 열심히 일군 덕분에 마음껏 쓰고도 저축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월급이 매달 꼬박꼬박 통장으로 꽂히는 안락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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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국토종주를 마무리한 뒤 몸이 서서히 회복되어 갈 즈음, 나는 또 한 번 잘 닦인 길을 벗어나 보기로 결심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늦깎이 석사 유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이, 살아보지 않은 삶이 궁금했다. 끝을 알 수 없는 험한 길을 걸으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더 많은 것들을 배워보고 싶었다.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안전한 행복을 포기하기가 어려워 막상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걸었던 첫 번째 국토종주와 기꺼이 루트를 벗어난 두 번째 국토종주를 완주하며 비로소 확신을 얻었다. 나는 나지에서도 길을 낼 수 있는 사람이며, 뿐만 아니라 길을 닦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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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익숙한 내 나라를 벗어나 영국 런던으로 왔다. 묵직한 월급을 포기하고 10년 만에 풀타임 학생이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배우며 내 세상을 넓혀가고 있다. 길을 벗어나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재미난 인생을 위해서는 때때로 좀 무모해질 필요도 있음을, 국토종주를 통해 배웠고 유학생활을 통해 실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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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국토종주를 하던 당시, 한강 구간 끄트머리인 하남 즈음을 지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영영 잊지 못할 '인생 장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로 내가 이때까지 걸어서 지나온 길이 펼쳐져 있었다.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저 다리까지만 가보자' 하며 스스로를 달랬는데, 그 다리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리는 미미하기에, 걷기란 제법 따분한 작업.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던 그 지난한 반복의 시간. 그런데 돌아보니 이토록 멀리 나아왔다. 그 작은 걸음들을 멈추지 않고 반복한 것 외에는 한 것도 없는데.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해서 반박의 여지도 없는 사실인데, 막상 눈으로 보고 실감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후로 나는 걷다 지칠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고통을 견디며 가로질렀던 그 공간이 저 멀리 점처럼 작아져 있는 것을 보며 이 고루한 여정에도 진척이 있음을 실감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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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국토종주를 완주한 뒤 나는 살다가 종종 뒤를 돌아보았다. 회사 일이 힘들 때, 퇴근 후 하는 공부가 버거울 때, 매일같이 연습하는 피아노와 축구 실력이 늘지 않아 속상할 때, 어깨너머를 돌아보며 내가 출발 지점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가늠해보곤 했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노력의 나날을 버텨낼 힘이 났다.


그로부터 십 년 뒤. 같은 길을 되짚어가며 열심히 걷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나, 이때까지 뒤를 한 번도 안 돌아보고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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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걸어낸 뒤쪽 길이 밀어주어 걸었던 지난 종주와 달리, 이번 종주는 걸어내야 할 앞쪽 길이 끌어준 덕에 걸었다. 벌써 이만큼 걸어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안보다, 저 멀리 목표삼은 지점까지 가야겠다는 결심이,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충분히 저기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20대의 나에게는 해낸 것이 중요했다. 무엇을 이루어냈느냐가 곧 나의 가치였다. 이런 완벽주의적 면모는 내 등을 떠밀어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무한한 불안을 부채질해 되려 일을 그르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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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갈등의 폭풍이 여러 차례 일었다. 벗어나고 싶었기에, 2년 가까이 상담을 받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이때까지 받아온 사랑들은 나의 성과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언가를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강박을 이제는 조금 떨쳐낸 듯싶다. 두 번째 종주를 하는 동안은 내내 스스로의 속도에 집중했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자전거 종주자들의 스피드가 별로 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내 컨디션이 어떻고,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고, 오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것들만을 생각하며 지금 당장 내디뎌야 하는 걸음걸음에 초점을 맞췄다.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들에게 지난날은 돛에 부는 순풍 같은 것. 형체도 소리도 없지만 더 쉽게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힘. 30대는 해낼 것을 생각하며 살아보고 싶다. 수식어와 트로피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스스로의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싶다. 남들이 겁을 내며 피해 가는 방향으로도 용감하게 나아가보고 싶다. 이제는 확신이 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또 그게 내 길일 거라는 확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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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 길고 어려운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분명 감동적일 마지막 장면을 걷는 내내 상상했다. 완주를 하면 기분이 어떨까? 눈물을 왈칵 쏟을까? 기분이 엄청 좋고 행복하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으니. 감동은커녕 감흥조차 없었다. 마음이 하도 고요해서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분명 길에서 만난 어른들이 나보고 대단하다고 했는데, 평생 기억할 경험이 될 거라고 했는데, 눈물도 안 나고 기쁘거나 설레지도 않고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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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그 덤덤함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는 다를까, 물음표를 품은 채 두 번째 종주길에 올랐다.


걷는 내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후투티와 댕기흰죽지를 난생처음으로 목격했고,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향어회를 맛보고서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피아노를 쳤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시는, 또 신을 믿지도 않는 나를 위해 당신의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는 감사한 분들을 만났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무덤들 그리고 죽은 채로 부패된 듯 보이는 고라니와 물고기 뼈를 마주치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이겨내며, 다치고 회복하며, 나라는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됐다. '나 운용 매뉴얼'이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걸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나, 이러려고 나온 거구나? 길에서 재미난 거 발견하고,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고, 나 자신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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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부터 인천까지'는 이것들을 할 수 있도록 깔아준 판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완주 자체는 나에게 부차적인 가치였던 것이다. 매일 다른 마을에서 잠들고 눈뜰 수 있다면, 인내하고 견디며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게 인천이든 순천이든, 열흘이든 보름이든, 내게는 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상담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면 나래씨는, 결과가 없거나 좋지 않으면 과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네."

"그래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뭔가 배울 수도 있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을 한 건데, 목표를 못 이루면 의미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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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내가 가지고 있었던 확고한 잣대에 내 두 번째 국토종주를 가져다 대어 보면 실패작이 따로 없다. 맨 처음 목표했던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서 18일 만에 완주하기'를 해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서른이 되기 전에 배웠다. 어딘가로 향해 가는 와중에도 재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20일 걷는 그 시간 자체도 즐거울 수 있음을. 그렇게 해도 결국에는 목적지에 닿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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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두 번째 국토종주를 완주하면 어떤 기분일지. 여전히 생생하므로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가슴이 터질 듯 기뻤다. 갓 이루어낸 성과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져서, 온몸으로 성취감을 가득 누렸다.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이제 과정도 결과도 기꺼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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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들보다 나은 이 하나 있다면 그건 언제나 더 좋은 방향을 향해 머리를 두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와 결과지향주의를 과거에 두고, 나는 30대라는 새 챕터로 나아간다.


종주를 하며 발견했듯 여전히 나에게는 문제가 많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고쳐나가면 되니까. 문제를 들여다보고 바꿔보려 애쓰면 나아지니까. 20대의 내가 그렇게 해주었듯이, 30대의 나는 마흔의 나에게 더 나은 버전의 스스로를 넘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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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종주를 마 스무 살의 나는 한 달도 안 되어 신입사원이 되었다. 두 번째 종주를 마친 서른의 나는 두 달 뒤 대학원 합격 통지를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마흔의 나는 과연 세 번째 종주를 하게 될까? 세 번째 종주 뒤에는 어떤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 이번 주 이번 달 올해를 충실히 살아내련다. 마흔의 나 그리고 쉰 예순 일흔의 나들을 위해서. 아니 어쩌면 열 살 스무 살의 나들을 위해서도. 어린 나, 그리고 나이 든 나와 함께 후회 없는 삶을 꾸려가련다.


언젠가 다시 길을 떠날 그날을 고대하면서, 길고 길었던 국토종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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