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주 18일 차, 서울 강동구-서울 용산구 구간
대망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으켜야 하는 몸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몸살 당첨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니 무릎이 아파 걷기가 힘들었다. 꽉 막힌 코로 겨우 숨을 쉬며 과연 더 걸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을 해야 하기에 무리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긴 나날 자리를 비운지라 복귀해서 바로 내 빈자리를 채워 넣고 싶었다.
전기장판을 후끈하게 켜둔 침대 안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낑낑 앓다가 결국 나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완주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진도를 많이 빼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미래에 마저 걸을 나 자신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더 걸어주고 싶었다.
출발할 때는 새것이었던 신발이 한 달도 채 안 되어 해지고 말았다. 신발을 해질 때까지 신는 건 또 처음이다.
전철을 타고 전날 일정을 마감했던 천호역에 도착했다. 번화가에서 종종 보곤 했던 십원빵을 또 마주쳤다. 이때까지 사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날따라 맛있어 보여서 요기할 겸 하나를 사 먹었다. 반죽도 안에 든 치즈도 꽤나 맛있었다.
강동구의 상징물이 빗살무늬토기라는 사실 다들 알고 계셨나요.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유니크한 건지 올드한 건지 헷갈린다.
천호대교를 건너 강북으로 간다. 보행자도로 분리가 잘 되어 있어서 예전처럼 다리 건너기가 힘들지 않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 맞으며 걷기야 국토종주 내내 하던 일이지만 열이 나니 버티기 힘들었다. 비도 피하고 몸도 좀 쉬어줄 겸 건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들어갔다.
쇼핑몰에서 또 십원빵을 만났다. 원조임을 여기저기에 강조해 둔 것을 보아하니 이곳이 원조고 지하철역에서 사 먹은 것이 짝퉁인 모양이었다. 자제력을 잃고 십원빵을 또 사 먹었다. 몸이 아파서 뇌에 힘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출발할 때 먹은 것만큼 맛있지가 않았다. 짝퉁이 더 맛있다니 이게 무슨 일.
비는 잦아들 생각을 안 하고 발길은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아서 한 시간 넘게 쇼핑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 마음이 흐트러진 탓인가, 아니면 정말 몸 상태가 최악이라 걸을 수가 없는 걸까, 스스로의 끊임없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해가 지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다. 자전거 국토종주길 한강 동쪽 구간에는 인증센터가 두 개 있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 인증할 수 있다. 10년 전에는 강남에 있는 광나루인증센터를 선택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강북에 있는 뚝섬인증센터로 왔다.
인증센터 바로 뒤에 화장실이 있어서 들렀다. 비를 피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저문 시각이라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서울 한복판이기에 망정이지 산속이었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위 사진은 남양주 넘어가기 전에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다리인지 찾을 수가 없어서 눈앞에 있는 다리에서 재현 사진을 찍었다. 텁텁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 다리와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영동대교의 대비. 원래 코스대로라면 영동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가야 하는데, 공사 때문에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다. 내친김에 강북으로 쭉 걸어보기로 했다.
다리 아래에서 또 비 잠깐 피하고. 자꾸만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힘들었다.
비는 어찌하여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가. 이번 종주 내내 비 오는 날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강우량 최고인 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로운 날씨였다. 그나마 짐이 없을 때 이런 날씨를 겪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 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서울이라서 가능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아름다운 야경.
그 야경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겨보려고 했지만 애매하게 파닥거리며 눈을 감은 사진이 건질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강변북로를 걸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성수대교를 건너가기로 했다. 이렇게 다리를 자주 건너는 날은 또 처음이다. 힘든 와중에 불 켜진 한강 대교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설렜다.
렌즈가 젖어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젖지 않은 부분이 한 군데도 없어서 렌즈를 닦아낼 수도 없었다. 대구에서의 교훈으로 비 오는 날이면 침수방지를 위해 충전기를 계속 꽂아두었기에 여러모로 사진을 자주 찍기 어려운 날이었다. 내 사진도 풍경 사진도 많이 남기지 못해 아쉽다.
좋아하는 식당과 카페가 잔뜩 있는 압구정을 코앞에 두고 강만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슬슬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 막차를 잡아탈 수 있는 목적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결국 한남에서 마무리하자는 결론을 냈다. 집까지 한 번에 가는 광역버스가 있기에 이 근방에서 가장 쉽게 복귀할 수 있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막차 시간을 고려하면 몇 시간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비 맞으며 더 걸었다가는 다음날 출근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아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바지와 신발, 양말은 물론이요 안에 입은 무릎보호대까지 푹 젖어서 추웠다. 얼른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완주까지 남은 거리는 약 44km. 이틀, 무리하면 하루 만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인지라 아쉬움이 컸다. 그날 조금 더 걸을걸, 그날 조금 덜 쉴걸, 하는 생각들이 자꾸만 밀려왔다.
하지만 딱히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만약 기한 내 완주하지 못하고 끊어가게 된다면, 구미에서 구간 점프를 했을 때처럼 마음이 무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쳐서 남지에서 하루 쉬어간 이후로 내 국토종주의 제1 목표는 '부상 없이 부산부터 인천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었기에.
몸이 아프긴 하지만 다치지는 않았고, 부산에서 이곳 한남동까지 600km 남짓한 거리를 이때까지 내 발자국으로 온전히 채워왔다. 남지에서 하루를 비워서 쉬고 여정을 이어갔듯이,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컨디션을 회복하고 남은 길을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나는 그렇게 용산구에서 18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미래의 내가 남은 거리를 꼭 걸어주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