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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Feb 01. 2024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그녀는 정신분석 자가심리치료사



“예술은 언제나 현대적이다.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작업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해서 안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재를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심리치료에 있어서도 가장 핵심 키워드이다.

어쩌면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수년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몰두했었던 부르주아는 스스로 치유의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부르주아의 삶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될 갖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삶을 미술활동을 통하여 표현해 갔고, 자가치유해 나갔다. 그녀의 작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운다는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기억은 내면 깊숙이 숨어 있다가도 그것을 건드리는 어떤 상황이나, 기억, 이미지, 냄새 등으로 인해 불현 듯 의식으로 떠오르게 된다. 바로 이때 과거의 감정, 그 당시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느껴진다. 불쾌한 기분이 들거나 슬픔이 느껴져 눈물이 나기도 하며 심한 경우엔 공포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극심한 트라우마로 인한 경험은 더욱 더 강력하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잠시 묻어두는 것 뿐이지 없어지지 않는다. 방법은 견디는 수 밖에 없다. 나쁜 생각이 나는 것을 억지로 누르면 누를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것은 풍선을 물속에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하면 더 강하게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원리와도 같다.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방법은 계속 토하듯이 개워 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뎌지고, 스스로 받아드려지게 되고, 꺼내도 아프지 않을 때까지.. 이만하면 뭐 견딜 수 있어.. 괜찮아 하고 말 할 수 있을 때 까지 말이다.

 

"예술은 정신의 건강함을 보증해준다. 이것이 바로 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얘기다. 나의 예술은 카타르시스이고,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했다."

부르주아의 작품 과정은 애도과정과 닮았다. 그녀는 자가 치유 방식으로 작품을 시작해서 훗날 여성과 남성, 이성간의 갈등, 나아가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 등을 조각 작품에 담아냈다. 이러한 그녀의 자기 자전적 작업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부르주아를 ‘20세기 최고의 페니미즘 작가’로 부르는 것도 미술의 사조가 아닌 자신의 시각, 여성의 시각으로 주제와 가치관을 표현한 이유에서다. 그녀는 70세가 넘어서야 작가로서 조명을 받았다. 1982년 71세가 되던 해에 여성 작가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1999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2010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그녀는 현존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힌다.     


 191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부르주아는 타피리스트리 복원을 가업으로 하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드로잉을 접하게 된 이유이다. 폭군이자 알콜 중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영어 가정교사이자 내니와 바람까지 피게 된다. 그것을 참고 묵인했던 어머니는 결국 병으로 일찍 죽게 된다. 이로인한 트라우마는 부르주아에게 어머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녀는 이러한 트라우마 사건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환멸은 그녀가 예술에 집착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다.  


 부르주아는 후에 솔본느(Sorbonne)에 입학하여 수학과 기하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부르주아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수학과 기하학도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된다.      

 부르주아는 1938년 자신의 아버지와는 정 반대 스타일이었던 미술사가 로버트 골드워터(Robert Goldwater)를 만나 결혼하여 뉴욕 맨하탄으로 이주하게 된다. 결혼과 뉴욕으로의 이주는 그녀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뉴욕은 부르주아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1936년경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이주해 온 초현실주의자들과의 만남은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며 예술적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변에 많았다.  


그녀는 특별히 이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인 무의식은 그녀의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처음에는 판화로, 나중에는 조각과 설치 작품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석고가루, 라텍스, 나무, 돌 등의 다양한 물질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반경을 넓혀 나간다.    

  

 인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부르주아의 프랑스적 뿌리, 그리고 뉴욕에서의 예술 신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환경은 상처 많았던 한 여성 작가를 키워준 원동력이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아픔이 많은 삶이었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잘 승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땅으로 갔고, 자극제가 되어 주었던 미술계 사람들을 만났다는 건 그녀가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운명같은 사건이었을까.     


 내가 살던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문화 배경에서의 경험은 나를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새롭게 적응해 가며 생존을 위한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부르주아의 프랑스에서 뉴욕으로의 이주는 사람을 이해 하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되는데에 더 힘을 부추겼을 것이다. 결국엔 이러한 고뇌와 경험들은 그녀의 조각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게 된다.    

Louise Bourgeois, Maman, Guggenheim Museum Bilbao Spain Photo : Didier Descouens/Wikipedia

                   

특히 그녀는 '마망'(Maman)이라는 거미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이 거미는 그녀의 어머니를 묘사한 작품이면서 그녀의 대표작이다. 태피스트리 일을 해 온 어머니를 거미로 표현하였고, 알을 배 깊숙이 보호하듯 숨기고 불안한 듯 얇은 다리로 힘겹게 서 있는 거미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 사랑, 연대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그녀는 <고백 예술confessional art>의 창립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상처를 치유받고자 평생을 미술에 바친다. 그녀의 작품은 자서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간적이고 서사적이다. 모든 인간들은 인생을 살아 가는 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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