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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Feb 05. 2024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희망을 부르짖다 못해 절규한 화가

절규The Scream/유화, 템페라, 파스텔/91×73.5㎝/노르웨이 국립 미술관/1893년


비명 / 석판화 / 35.5x25.4cm / 1895
“예술은 인류가 마음을 열기 위한 강박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강박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뭉크. 그가 표현주의 대표적인 화가로 불리우는 이유다.

뭉크는 인간 내면, 자신의 심리상태를 그림으로 투영시킨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이다. 뭉크의 그림은 불안 그 자체이다. 거친 선과 강렬한 색채, 어두운 화면, 직관적인 표현들로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불안한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해 준다. 그 감정 상태가 너무도 강렬하여 마치 우리에게 전염이 되는 것 같아서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기 까지 하다. 


뭉크의 인생에는 죽음이 항상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아버지의 폭력과 여동생의 우울증, 그 후에 또다시 겪어야만 했던 남동생의 죽음 등 그의 삶엔 죽음이 너무 일찍부터 연달아 따라다녔다. 얼마나 불안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뭉크 자신 역시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을 앓았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다보니 뭉크의 정신상태와, 알코올 중독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뭉크는 그가 그린 그림처럼 절규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뭉크의 그림 <절규>는 뭉크가 “생의 공포”라고 부르던 것을 표현했다. 인생 자체가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웠을까. 주변의 가족들이 죽음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뭉크의 내면은 항상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의 기괴한 표정들은 그런 뭉크의 심리를 짐작케 한다. 그림의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다. 뭉크의 인생은 어두웠고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삶에 대한 희망을 처절하게 갈구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을 것이다. 뭉크의 입장에서 희망이란 처절하게 원할 수 밖에 없었던 절규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생이 무엇인지는 바닥까지 내려가 봤을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그때에서야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밝은면만 인생에 가득하다면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당연한 것인 마냥 자만하게 된다. 

인생의 저 밑바닥의 경험, 죽음 혹은 이별, 아픔, 고뇌는,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내 주변의 작은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해 준다. 

뭉크에게는 이 작은 것들 마져 찾기 힘들 었을 것 같다. 

고난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고난이 인생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 때문에 힘들고 아프지만, 오히려 그것을 수용하고 안고 살아 가야 하는 인생의 숙명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인생의 한 부분인 고난을 인정해야 삶이 조금은 편안해 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가 발버둥 쳐도, 노력한다고 해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경험하고 심리적으로 힘듦을 겪었을 때,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으로 계속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나에게 병이 된다. 그런점에서 그림을 그려 표현한다는 것은 건강한 표현 방식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방법을 사용하는 치료 방법 중 하나가 미술치료이다. 

미술치료에서는 미술의 표현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앞서 루이스 부르주아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남에게 말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캔버스에 아니면 그냥 어떤 종이에라도 나의 감정을 색으로, 선으로, 형태로든 끄적거려서라도 내면의 에너지를 표현해 보는 건 어떨까.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해 내는 작업을 평생동안 해왔고, 그들의 삶을 쏟아낸 예술 작품들은 후대에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예술가들의 작품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을 진실되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어떤 것도 거짓은 결국 살아 남지 못한다. 진심을 담아 그것이 평생을 바쳐 계속 될 때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고 마음이 움직인다. 


 아마 뭉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살려고 그림을 그렸고,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평생 정화해 나갔을 것이다. 뭉크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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