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를 품은 마을(아구아스깔리엔테스)에서 마지막 밤이다. 좋아하는 일은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지나간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일이면 기차와 조그마한 버스를 타고 처음 출발했던 쿠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마추픽추를 내려와 머물렀던 마을로 내려오니 초저녁이 되어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 않아서 저녁을 먹기 전 소소하게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도시는 여행자들이 머무는 곳과 주민이 머무는 곳이 분리되어 보였다. 관광지에는 숙박시설과 레스토랑 등 상업시설들이 밀집되어있으니 집값이나 소음 등의 이유로 거주지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듯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주변 곳곳에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현지의 재미를 느끼고자 중간중간 군것질을 하면서 같이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잘 가꿔진 축구경기장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었는데 속으로 생각하기를 남미는 역시 남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전체적으로 보면 건물들이나 생활 등이 그렇게 발전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축구경기장은 참 좋아 보였다. 전자식 전광판도 달린 정식 축구경기장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였지만 남미의 축구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다. 물론 귀찮아하는 것도 있지만 개인의 성향 때문에 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목적지 하나 만들고 나머진 그 주위를 돌며 차근차근 밟아 가고 세세하게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그 공간을 더욱더 가깝게 느끼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무는 걸 좋아한다. 다만 남미나 아프리카에선 낯선 곳에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또한 나를 지켜줄 안전장치 또한 없기에 항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어느덧 도시는 어둠이 짙게 내려 앉아있었고,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향했다. 그리고 적당한 곳을 골라 밖에 보이는 곳에 친구들과 나란히 앉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바깥 풍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왠지 모를 허전함이 갑자기 찾아왔다. 주변은 축제 같은 분위기로 시끄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혼자 고립된 것 마냥 침묵 속에 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보단 나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원론적 의문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문득문득 한국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현실에 마주한 나 자신을 보면서 여행자였을 때의 자유롭고 의지가 활활 넘치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이 나도 모르는 사이 밀려들어 와 버렸다. 한국 나이로 치면 한창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을 시기인데 말이다. 어느덧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외국에 나와서 내 기억 속에서 잊고 있던 아니 잠시 내려두고 싶었던 걱정들이 다시금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이런 불편한 생각은 언제쯤 그만할 것인가? 아마 죽을 때까지 할 것인지?? 진짜 어른들을 말이 맞는 것 같다. 걱정도 팔자다!
음식이 나왔다는 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눈앞에는 생소하지만 맛있어서 보이는 음식이 있었다. 오늘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맛있게 보였다. 음식과 함께 현실 속으로 돌아오니 밤은 더욱 깊어 도시는 마치 축제라도 된 마냥 더욱 진하게 취해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추픽추만을 생각하느라 정작 내가 머무는 이 도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밤이 되니 도시는 마치 오랜 영화나 판타지 애니메이션에 나올 듯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잉카문양이 새겨진 조명의 불이 들어오면,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모여든 여행자들로 마을은 불야성이 된다. 좁은 골목 오르막길을 따라 쭉 늘어선 레스토랑에서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속삭임들로 옛날 잉카인들의 전성기를 보여 주는 듯 북적였다.
나와 문석이 그리고 다영이까지 우리 세 명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듯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오늘 밤 돌아가는 문석이를 위해 배웅해 주기로 했다. 즐거웠던 식사는 그렇게 마치고 역과 가까운 광장으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기차 시간 동안 우리는 여기서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한국 사람을 찾기 굉장히 힘들 정도였는데 여기서 문석이를 만난 건 어쩜 행운이었을 지도... 광장에는 여행자들 말고 현지 마을 주민들도 많이 있었다. 그중 내 눈에 띈 건 늦은 시간인데도 책가방을 메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우리로 따지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아이들이 광장에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늦은 시간에 집에 안 가고 뭐하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쿠스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혜진 누나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페루가 교육열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 우리나라만큼 아이들의 교육에 부모들은 열과 성을 다한다고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은 공부한다며... 어디를 가나 학생들은 공부라는 배움의 굴레는 벗어나기 쉽진 않을 듯하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는 느낌과는 다른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만이 느꼈던 공부에 무게감 같은 거 말이다.
쿠스코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차가 이제 곧 출발한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문석이를 보며 다영이와 나는 손을 흔들었다. 내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자는 짧은 인사를 건네면서 말이다. 이미 밤늦은 시간, 헤어지고 나서 뒤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피곤이 밀려왔다. 아마 쉬지 않고 캐나다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듯 하다. 첫날 도착했을 때에는 내일 마추픽추를 본다는 설렘으로 피곤한 것도 몰랐으나, 목표를 이룬 후 모든 설렘과 긴장이 한순간에 피로가 되어 몸속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어서 뜨거운 물에 씻고 누워야겠다. 하지만 전날 샤워하면서 알게 된 사실 뜨거운 물이 지속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력은 8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지만, 고산지대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낮과 밤의 일교차는 제법 컸으며 밤에는 쌀쌀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눈이 껌벅껌벅한다. 최대한 빠르게 씻기로 한다. 군대 시절 유격 훈련을 마치고 쓰러져갈 듯한 간이 샤워장에서 수많은 장병이 3분 샤워를 진행했던 경험을 살려 씻었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3분은커녕 10분을 훌쩍 넘겨, 나는 그냥 포기하고 찬물로 씻었다. 뭐 춥긴 해도 개운해서 그런지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기절했다. 그렇게 나는 마추픽추가 보이는 여행자의 마을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