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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쟁이 Dec 11. 2020

나는 2018년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 그 포도밭에서 난 그 해의 와인을 기다리며...

 빌바오에서의 사고를 뒤로 하고, 드디어 이 여행의 두 번째 본 목적인 와인의 도시 보르도(Bordeaux)로 향했다. 보르도와 빌바오는 기차로 5~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사실 굉장히 설렐만한 길이었는데... 빌바오에서의 사고로 정말 너덜너덜해진 채, 보르도 기차역에 도착하게 됐다. 와인의 도시! 누구나 한번즘 들어봤을 법한 보르도 와인, 그 산지에 도착하니 그 너덜너덜한 와중에도 나는 간이 떨렸다.

보르도의 전경, 특히 시청의 앞 물이 자작하게 깔린 곳의 전경이 정말 좋다.

 보르도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유럽의 '도시'스러웠다는 점이다. 여행의 재미를 위해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볼 때를 제외하곤 보르도에 대해서 많이 찾아보지 않았었는데, 막연히 와인의 도시라 하니 시골 같은 인상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꼭 와인이 아니더라도 이 보르도라는 도시는 그냥 그 자체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예뻤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사이엔 펍 같은 식당들이 정말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형형색색의 음료들을 한잔하며 한껏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첫날에는 도시 전반을 구경하며, 보르도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했다. 사실 이 도시 전경은 보르도의 극히 일부분이며, 그 유명한 와인 산지로서의 면모 또한 충분히 둘러보고 싶었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로, '신의 물방울'이라던가 '소믈리에르' 같은 만화들을 보면서 보르도의 5대 샤또, 부르고뉴의 고오급 와인 등에 대한 로망은 이미 터지기 직전까지 차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한 달 남짓의 여행 기간 중 보르도에서만 4박 5일의 일정을 보내기로 했고, 와이너리 투어도 2번을 계획했다.


 보르도에서는 크게 지롱드 강의 좌안과 우안으로 와인의 성질을 구분한다. 이는 토질 때문이라고 하는데, 강의 좌안은 자갈질로 배수가 잘 되고, 이 때문에 물과 친하지 않은 까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삼는다. 반대로 강의 우안은 점토질이 많고 물을 많이 머금어, 가볍고 섬세한 스타일의 메를로 같은 품종들을 주로 쓴다. 필자는 글로만 읽어봤던 차이를 직접 보고 느껴보고 싶어서 강의 좌안과 우안 투어를 하루씩 예약했다.


 먼저 간 곳은 강의 좌안인 메독(Medoc) 지역이었다. 메독 지역 안에서도 마고(Margaux), 생줄리앙(Saint-Julien), 생떼스테프(Saint-Estephe) 등등 다양하게 소분된 밭들이 있고, 그 안에 다양한 와이너리들이 존재한다. 보르도 와인 중에서도 이 메독 지역은 고급 와인들이 많이 나오는 산지로 유명하다. 까베르네 쇼비뇽이라는 품종을 필두로 해서 만들어지는 와인들은 주로 묵직한 느낌과 카시스 같은 독특한 과실 향을 낸다고 한다.


 백날 글로 설명해서 뭐하겠는가, 당장 마트에 달려가서 보르도라고 적힌 와인을 한 병 골라보자! 아마 이게 무슨 맛인가 하며 필자를 욕하고 싶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도라고 적힌 와인은 말 그대로 저 넓은 지역 어딘가에서 난 포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제대로 된 보르도 와인을 맛보고 싶다면, 적어도 보르도 안에 있는 저 소분화된 지역들의 이름이 붙은 와인을 맛봐야 한다. 아마 주변에서 메독(Medoc)이나 생줄리앙(Saint-Julien)이 붙은 보르도 와인이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조금 벗어나자 넓디 넓은 포도밭들이 보였고, 중간중간 익숙한 와이너리 이름들도 보였다. 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자갈질의 토양이다...

  포도밭들 사이사이로 샤또들이 보였고, 걔 중에는 마트에서 많이 보던 유명한 와이너리들도 있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안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고(Margaux) 지역의 샤또 마르케스 데 떼르메(Cheateau Marquis de Terme)였다. 와이너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투어 패턴은 비슷했다. 포도밭의 모습을 보여주고, 언제 수확을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양조를 하는지 설명해준다. 이 마고 지역의 와인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급 와인 중 하나인데, 소설가 헤밍웨이는 자신의 손녀딸 이름마저 마고라고 지었다고 한다. 헤밍웨이와 술에 얽힌 썰들이 은근히 많은데, 아마 술 깨나 마시고 글을 썼던 것 같다.

와이너리 내부와 시음 코스. 사용하는 오크통 종류에 대해서도 다 설명해줬는데 사실 지금은 많이 까먹었다...

 여행 중 스페인을 지나는 동안 시음을 쉬었더니, 간만에 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시음하는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르도의 강 좌안 쪽 와인들은 뭔가 굉장히 고혹적인 느낌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과실향이 막 상큼하다기보다는 우아한 벨벳 패브릭의 질감처럼 혀에 감기는 그런 감각. 취하는 게 걱정되면 뱉으라고 스피투스까지 마련해줬지만, 그럴 이유가 있겠나. 언제 이런 호강을 해보겠나라는 생각으로 마시는 거지. 솔직히 이 첫 번째 와이너리는 그저 그랬다. 막 엄청 맛있다기보다는 와이너리에 직접 방문해서 마신다는 게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생 줄리앙의 샤또 라그랑주. 라벨에 붙어있는 집의 모양이 왼쪽에 보이는 샤또(Chateau)의 전경이다.

 두 번째로 방문한 샤또 라그랑주. 이곳에서 마셨던 와인들이 정말 맛있었는데, 처음에는 시음용으로 2013 빈티지를 내놓길래 실망을 금치 못했다. 보르도의 2013 빈티지는 정말 날씨가 좋지 않아 망한 빈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의 와인들은 정말 맛있었다. 약간 스모키하고 스파이시하면서도 검은 과실 향, 마고에서 마셨던 것보단 조금 가벼운듯하면서도 색깔이 뚜렷이 느껴지는 와인이었다. 아... 이즘 마시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와인 투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바로, 와이너리에서의 식사였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양조장이나 증류소에서 자체적으로 호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여행에서는 그런 곳에 묵어볼 생각을 못했었는데... 언젠가 꼭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다. 아무튼, 샤또 라그랑주에서의 식사는 당연히 라그랑주의 와인이 페어링 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

  

샤또 라그랑주에서 제공한 점심, 이 뒤에 디저트도 있었고 두 세종류의 와인으로 페어링 되었다.
말로만 듣던 곳에 내가 실제로 왔구나, 저 포도들도 언젠간 와인이 되겠지

 아직은 설익어서 새파란 포도알들이 검붉은 과실이 되고, 그것들을 수확하고 발효과정을 거쳐 숙성해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 된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를 볼 때도, 와인바에서 보르도 와인을 마시면서 강의 좌안과 우안이 어떻고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사실 잘 외워지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한번 다녀오니 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언젠가, 저 포도들이 와인이 된다면 우리 집 주변에서도 팔겠지?

 생각해보니 내가 2018년 빈티지의 라그랑주 와인을 마시면 이때 본 포도로 만든 와인을 마시는 샘이구나 싶었다. 이날 보았던 쨍한 하늘 아래에서 내가 만져본 어떤 포도알이 정말 내 입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고 만들어지는 곳을 직접 찾아온 이 날의 경험을 나는 평생 못 잊을 술안주 거리로 삼을 것 같다. 그리고 또 그 해에 만들어졌을 와인을 마시면서 이 이야기를 곱씹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색다른 안주거리가 될 테니. 그런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2018년 그날의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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