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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쟁이 Dec 13. 2020

호주 할아버지의 가르침

와인은 6병 단위로 사는 거라니 저는 그런 돈이 없어요

왜 보르도는 스크류 마개를 안 쓰죠?

 같은 투어 팀에 있는 한 호주에서 온 할아버지의 질문이었다. 가이드를 맡아주신 할머니는 한 평생을 보르도에서만 살아오신, 설명 하나하나에서 보르도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런 분이셨다. 와인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두 분의 대화를 봤다면 평범한 질의응답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좀 더 각국의 와인에 대한 은근한 기싸움이 있었다.

 와인의 종류를 나눌 때, 크게는 신대륙과 구대륙으로 나누곤 한다. 아무래도 와인의 원조격 나라인 유럽권 국가들을 구대륙이라고 보고, 그 외의 국가들을 신대륙으로 구분한다. 딱 단정 지어 말하긴 힘들지만 보통 구대륙권의 와인들은 좀 더 풍부한 아로마들을 섬세하게, 신대륙권 와인들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맛있는 맛을 추구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호주는 쉬라즈라는 대표적인 품종과 함께 묵직하고 강한 풍미의 레드와인을 필두로 '쉬운 와인'을 추구해온 경향이 있다. 여기서 쉽다는 건, 와인을 열고 기다리고 할 것 없이 대충 흔들어서 마셔도 맛있는 대중적인 맛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몰리두커 사의 '복서' 같은 와인은, 와이너리에서 아예 병을 뒤집어서 흔들어 마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와인 병을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는 프랑스의 어느 와인들과는 분명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생떼스테프 지역의 샤또 라퐁로쉐. 노오란 샤또의 건물이 정말 예쁘다.
우리는 절대 스크류 캡을 쓰지 않아요. 코르크 자체가 하나의 오랜 전통이거든요

 투어 내내 호주 할아버지는 스크류 캡, 보관 방법, 와인의 스타일 등에 대해서 가이드 할머니에게 꾸준히 질문을 했고, 하나하나가 은근히 보르도의 와인에는 '왜' 이런 쉽고 효율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지 같은... 공격 아닌 공격을 계속했다. 물론 보르도 할머니도 본인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쉬이 기죽진 않았고, 나는 투어 내내 팝콘 하나 들고 쫓아다니는 기분으로 두 분의 질의응답을 관전했다.

  소년(Boy), 혹시 너도 묵직한 와인들 좋아하니?

 한창 두 분의 논쟁을 재밌게 구경하고 있는데, 호주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붙였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등 호구조사를 하더니, 한바탕 본인의 와인 철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셨다. 나도 쉬라즈(Shiraz)를 좋아한다 했더니, 내 폰 메모장을 열어 20병 가까이 와인을 추천해주셨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호주 쉬라즈였다. 약간 와인 애국자 같은 분이셨는데, 이분의 마지막 멘트가 끝내줘서 기억에 남았다.


어떤 와인이 마음에 들면 꼭 6병을 사렴. 그중에 2병은 친구들과 마시고, 1병이나 2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렴. 그리고 남은 두세 병은 셀러에 넣어놔. 그리고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사는 거야. 그러다 니가 나처럼 은퇴하고 쉴 나이가 되면, 죽을 때까지 그 와인들을 한 병씩 꺼내 마시는 거야. 그렇게 살아야 한단다.

 

 정말 멋있고 감명 깊은 말이었는데... 할아버지 제게는 그럴 지갑도, 와인을 천병 단위로 쌓아놓을 셀러도 없습니다... 본인의 셀러에 와인이 몇 병인지, 어떤 철학을 가지고 모으고 마시는지, 존경심이 절로 솓았지만 내겐 너무나 머나먼 수준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 마음가짐 하나만은 철저하게 배워, 지금까지도 명심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서너 병 정도는 필자가 특별한 날에 먹으리라 마음먹고 재워두고 있는 와인들이 있으니.

 호주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적긴 했지만, 대부분의 와인들이 코르크를 쓰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스크류 캡은 외부와의 기류 접촉을 완벽하게 차단하지만, 코르크는 미세하게 기류를 통과시킨다. 이 때문에 와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세하게 맛이 변해간다. 전통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와인과 위스키 같은 술들에는 이런 시간의 미학이 있다. 기다림으로써 변화가 생기고, 그 시간 동안에 의미가 생긴다. 쟁여둔 술들을 마시는 것이 단순히 맛의 변화뿐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의미를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호주 할아버지는 그 미학을 즐기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확고했고, 보르도 할머니도 나름대로의 전통에 대한 철칙이 있어 보였다. 술을 마시는 데에 무슨 정답이 있겠냐만은, 나름대로의 방식과 철학을 가지는 것 또한 분명,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멋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샵 L'Intendant. 저 셀러가 내 셀러였으면... 현실은 그 중 한병 겨우 사서 마시는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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