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여행을 마치고서는 빌바오(Bilbao)라는 도시로 향했다. 많이들 오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빌바오 인근의 와이너리를 들를 생각으로 일정을 짰다. 허나, 생각보다 빌바오에서 보데가스 무가 와이너리가 멀었고, 기차도 드문드문 다녔다. 미리미리 일정을 짠다고 짰는데...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이 빌바오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와이너리를 가려면 새벽 4시에는 일어나서 기차역으로 향해야 했고, 그마저도 주말이라 와이너리 운영 여부도 미리 확인해보지 못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빌바오 주변 구경이나 하고서는 와인을 한 병 사 와서 게스트하우스 부엌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흠... 아마 이 장면이 드라마나 만화였다면, 아래에 이런 자막이 떴을 것 같다.
이땐 몰랐다... 이 날 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마 와이너리를 가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이른 저녁에 자기 시작했을 텐데... 나는 스페인의 가성비 좋은 와인들에 맛들려, 마트에서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사다가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부엌에서 홀짝거리고 있었다. 한 반병즘 비우고 있으니, 뒷 테이블에 앉아있던 외국인 친구들이 같이 마시고 놀자며 말을 걸어왔다. 학창 시절부터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필자이지만, 이미 와인 반 병이 들어간 상태에선 같이 술마시자는 또래들이 국적 불문하고 반갑기만 했다.
나는 마시던 와인들을 한잔씩 건네고, 그 친구들이 마시고 있던 칼리모쵸(Calimocho)라는 음료를 한잔 받았다. 콜라와 와인을 1:1로 섞어 만든 칵테일이라는데, 이게 맛이... 정말 오묘했다... 달기도 단데 와인 향은 조금 나면서 시큼시큼한 것이... 스페인에서 또래들이 즐겨마시는 음료라기에 외국에서라도 인싸 시늉을 내보려고 열심히 마셨다.
칼리모쵸. 저만한 통에 와인과 콜라를 1:1로 타고서 라임을 조금 넣는다.
부족한 영어로 이래저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에 몇몇 친구들이 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독일인이었는데, 마침 월드컵 이야기가 나와서 2:0으로 독일이 진걸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간이 지나니 자리에 일행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나를 제외한 이들은 이미 며칠 여기에서 묵으면서 서로 안면을 꽤 튼 모양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체크인할 때부터 카운터 직원이 나에게 자기 한국말할 줄 안다며, "Ssi Pal"이라고 말하고 웃더라니... 아무래도 다들 친화력이 보통은 넘는 모양이다. 아무튼 나를 자리에 끌어들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도 인사를 시켜주어 얼추 모두와 통성명을 할 때즘, 나가서 술을 마시자는 식으로 분위기가 잡혔다.
낮에는 정말 한적한 동네라고 생각했었는데, 밤이 되어 나가니 무슨 축제마냥 곳곳의 펍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외국에서 술을 마시며 가장 적응이 안됐던 것이, 딱히 자리를 잡지 않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 들렀던 '바'들에서는 자리에 착석해서 술을 마셨지만, 이곳에선 그냥 술을 사서 대충 길바닥에 자리 깔고 앉거나 자리를 돌아다니며 마시는 모양새였다.
빌바오의 밤거리.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분위기다.
이날은 무슨 용기가 났던 것인지... 사람 붐비는 곳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간만에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마시는 술자리 분위기에 취해 펍을 옮겨가며 맥주를 여러 잔 마셨다. 대충 맥주를 세잔즘 마시고 있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급작스런 제안을 했다.
야! 우리 게이바 가자!
음...? 아무리 개방적인 분위기라지만 갑자기 5~6명의 혼성 무리에서 게이바를 가자는 제안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옆의 독일인 친구가 막 웃더니 내게 안심하라며, 그런 곳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주인장이 그냥 그 근방에서 유명한 게이란다. 그게 뭐냐고 웃으면서 쫓아갔더니, 약간 빅뱅이론의 레너드가 수염 기르고 빨간 뿔테를 쓴 것 같이 생긴 아저씨가 열심히 샷잔을 돌리고 있었다. 일행을 그리로 이끈 친구가 그 바의 시그니처 샷을 한잔씩 하자고 해서 주문했는데, 아... 이게 그 주인장이 가장 맘에 드는 일행의 뺨을 빈 고무장갑으로 착 때리고 주는 술 (Slap shot)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절대 내가 주문하러 카운터에 서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했다.
외국에서 그 날 처음 만난 친구들과 퍼마시는 술이라니, 참 다신 못해볼 경험이긴 했다.
아주 잘 노는 일행 덕분에, 한국에서도 못해본 경험도 하고 정말 로컬한 허름한 클럽도 따라 놀러 갔다. 2018년에 클럽에서 YMCA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정말 레트로 감성의 극을 달리는 공간이었다. 얼마나 놀았을까... 슬슬 술이 좀 올라오기에 잠시 밖에 나와 바람을 쐬던 중이었다.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약간 왕좌의 게임 테온 그레이 조이를 닮은 흑발의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호스텔에서 온 또 다른 일행인가 하고서 반갑게 인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좀 너무 가까이 붙어서 이야기한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뒷주머니의 무게가 갑자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고... 어라?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까지의 그 인상 좋게 웃던 사람은 어디 가고 딱딱하게 굳은 인상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너... 눈치챘구나
반전물에서 범인이 드러났을 때의 그런 눈빛으로 잠시 나를 째려보던 그 남자는, 정말 순식간에 내 지갑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위험하니까 쫓아가지 말라는 말을 평소에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겁도 없이 전력질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폴리찌아!!! 폴리찌아!! 뻐킹 씨프!!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정말 겁도 없이 목청 터져라 소리 지르면서 뛰어가다가 문득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혼자 저 도둑을 쫓아가는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운동화가 아니라 샌들을 신고 있던 터라 발도 엄청 아팠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도둑이 뛰어간 방향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체격 좋은 경찰이 골목에서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매치기를 당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자 경찰이 갑자기 내 지갑을 내밀었다. 저쪽 골목에 떨어져 있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범인의 인상착의와 이런저런 상황을 물어야겠다며 경찰차에 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짜 너무 힘들고 무서웠던 터라 경찰차에 타고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문득 이 경찰차는 진짜 경찰차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 싹튼 의문은 술기운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바뀌었고, 나는 운전석과 뒷자리를 가로막는 아크릴 벽을 마구 치며 내려달라고 소리쳤다.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운전하는 경찰의 뒷모습이 점점... 더 경찰 같지 않아 보였고, 나는 급기야 발로 문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내리라고 문을 열어줘서 내리고 봤더니 경찰서가 맞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길바닥 주저앉아 있으니, 경찰이 와서 소매치기의 인상착의를 물었지만...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가뜩이나 부족한 영어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상태를 살펴본 경찰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고, 터덜터덜 걸으니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로비로 들어서자 몇몇 일행들이 어디로 사라졌었냐고 놀라며 나를 반겼고, 정말 갓 태어난 염소마냥 나는 주저앉아 울먹거리며 방금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술에 만땅 취한 데다 전력질주까지 했더니... 거진 필름이 끊길 지경이라 더 감정적이었던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 친구들의 다독거림에 겨우 추스르고 숙소로 올라가 뻗으니... 아, 사실 지갑에 딱 5유로 있던 터라 잃은 돈은 없었는데, 숙취로 다음날 하루를 통째로 잃었다. 이 날이 한 달 간의 여행 중에 딱! 하루... 술을 못 마신 날 되시겠다...
아무튼 술을 좋아하는 만큼 더더욱 조심했어야 했는데 여행에 대한 신남과 과음, 내 부주의가 만들어낸 아찔한 사고였다... 하지만 또 동시에 그 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들과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든 날이기도 하다. 술을 좋아하는 만큼, 술을 마셔야지 내가 술에 먹혀서는 안 된다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