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쟁이 Nov 16. 2020

특별한 날엔 특별한 술을 '쟁인다'

특별한 날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쟁이는 술

 

 포르투에는 특별한 문화가 하나 있다. 기본적으로 포트와인은 빈티지가 붙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해의 포도가 풍작이고 컨디션이 좋은 경우에 한해 빈티지 와인을 만든다. (http://wine21.com/14_info/pop_info_preview.html?InfoIdx=7752) 포도가 수확된 해가 적힌 빈티지 포트 와인은 그만큼 고급지고 희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포르투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해에 포도 농사가 잘 되었으면, 그 해의 빈티지 포트와인을 따로 빼서 보관한다. 아이는 그 빈티지 포트 와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특별한 날에 개봉해서 마신다고 한다. (결혼이었는지, 성인이 되는 날이었는지 헷갈리는...) 보통 이렇게 나와 나이가 같은 와인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탄생빈이라고 부른다.


와이너리에서 전시 중인 빈티지 포트와인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와인들이 수두룩 하다. 누군가의 탄생빈이겠지.

 빈티지 포트와인은 희귀한 만큼 어디 가서 보기도 힘들고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그 본고장인 포르투에 오면 주변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필자도 포르투를 뜰 때, 선물을 드리고 싶어 부모님의 탄생빈을 찾았으나 너무 비싸서 조용히 내려놓았다... 불효자는 그저 웁니다.

 보통 특별한 술은, 특별한 날에 마시는 특별한 술로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와인에는 '숙성'과 '보관'이라는 시간의 미학이 더 있다. 앞서 이야기한 '탄생빈'처럼, 특별한 날에 특별한 술을 쟁여 두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술의 맛 변화를 통해 흘러간 시간을 음미해볼 수 있다. 근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신혼부부들이 결혼할 때에 특별히 따로 라벨을 디자인한 와인을 주문해서 쟁여두기도 한다. 그러면 매 결혼기념일에 1년씩 더 숙성된 와인을 통해, 함께한 시간의 흐름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번 여행 목표 리스트 중 하나가 또 이렇게 '쟁일 수 있는 특별한 술'을 찾는 것이었다. 당시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박사과정 시작 전에 한 학기를 휴학한 상태였는데, 이 여행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 마실만한 술을 한병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내 탄생빈을 찾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내 탄생 빈티지 포트는 없는 듯했다.

 

 포르투(Porto)는 비긴 어게인에 소개되면서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도우로 강의 양 옆으로 솟은 언덕 곳곳엔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고, 밤이 되면 그 야경이 정말 장관인 도시다. 위 사진만 봐도, 꾸리꾸리 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저 강 건너에 보면, 건물 위에 크게크게 이름이 적힌 건물들이 전부 포트와인 와이너리들이다. 이 도우로 강 양 옆으로 정말 많은 와이너리들이 위치해 있는데, 샌드맨이나 테일러 같은 낯익은 이름들도 많이 보인다. 사실 포르투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곤 해도, 관광지로서는 이 와이너리들과 강의 풍경 이외에 특별히 볼 만한 것들이 많지는 않다.


테일러 와이너리의 저장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샌드맨의 타우니(Tawny) 포트와인을 맛있게 마셨던 기억이 있어서, 바로 달려갔으나... 하필 딱 여행기간에 걸쳐서 휴일이었다. 그래서 그 직후에 달려간 테일러(Taylor) 양조장은 투어 프로그램이 딱히 있다기보다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고서 알아서 돌아다니는 식이었다.


 포트와인은 와인의 양조과정에서 브랜디(증류주) 원액이 섞여 들어간다. 마셔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포트와인은 상당히 단 편인데, 이는 당분이 효모에 의해서 알콜로 변하는 중간에 브랜디 원액이 들어가게 되면서 높아진 알콜 농도로 효모가 다 죽어서 반응이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즉, 포도의 당분이 다 알콜로 변하기 전에 발효과정이 멈춰서 더 달고, 브랜디 원액이 들어가기 때문에 알콜 도수가 일반 와인들보다 훨씬 높은 술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포트와인에도 여러 종류가 존재하는데 크게는 루비, 타우니, 화이트 정도로 나뉜다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시음 순서가 되면 저 세 종류 정도를 맛 보여 주거나, 빈티지 혹은 레이트 빈티지를 맛 보여 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타우니 포트를 가장 선호하는데, 메이플 시럽이나 캐러멜 같은 정말 좋은 디저트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향들이 느껴진다. 특히 10년 단위로 보통 숙성기간을 구분해서 파는데, 20년 이상의 타우니 포트에서는 피칸 파이나 호두, 감식초 같은 맛들이 정말 강렬하게 식욕을 자극한다.


보통은 포르투 여행을 하면 양조장을 굳이 한군데 이상 가진 않지만... 나는 못참지

 

 포트 와인은 포르투에서 나고 자란 주정강화(Fortified) 와인만을 말한다. 즉,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산지가 포르투가 아니면 포트 와인은 아니다. 또 포르투에서 만들어졌지만 주정강화(증류주를 첨가하는)가 이뤄지지 않으면 포트 와인이 아니라 그냥 포르투갈 와인이다. 흔히는 포트 와인만이 포르투갈 와인의 대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포르투갈 와인 중에는 정말 맛있지만 가격이 착한 와인들이 많다. 근래에는 수입도 많이 되고 근처 대형마트만 가도 찾아볼 수 있으니 한번즘 시도해보길 추천한다.

 

와이너리 투어 사이사이에 시간이 비면, 그냥 도우로 강 옆에 주저 앉아서 와인을 홀짝홀짝


 시내에 바틀 샵이 많이 보이진 않지만, 찾아가 보니 포르투갈 와인만 취급하는 샵을 찾을 수 있었다. 포트와인의 맛이 너무 달고 진해서, 좀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가벼운 화이트를 찾아서 도우로 강 앞 노상에서 홀짝거리기 시작했는데 웬걸...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워낙에 안주(라고 쓰고 절경이라 읽는다)가 좋아서도 그렇겠지만, 꼴랑 7유로짜리 와인 맛이 이렇게 괜찮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포르투는 항구 도시인만큼 와인뿐만 아니라, 해산물 요리도 맛이 좋다. 에그 타르트를 꼭 먹어봐야 한다고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구나 문어 요리를 꼭 먹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에서 노상 와인 홀짝거리다가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오니 저녁 시간이 다가왔고, 근처에 식당에 가서 요리와 글라스 와인을 주문했다.


약간 이프로 음료 같은 느낌의 화이트 와인과 대구 요리


 식사를 마치고서도 다시 도우로 강으로 향했다. 밀린 일기도 정리를 하고, 아까 남긴 와인을 홀짝 거리고 있으니 지나던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한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던 찰나에 비가 쏟아졌고, 우산도 없이 뛰어서 숙소로 급히 돌아왔다. 그렇게 포르투에서의 짧은 일정이 끝났지만, 아쉽지 않을 만큼 먹고 마셨다. 그리고 이 여행이 끝날 때 즈음에, 나는 어떤 술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게 될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한 가지 권해보고 싶다. 혹시 특별한 날을 앞두고 있다면, 아니면 몇 년 정도 안에 이뤄야 할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와인 샵에 가서 한번즘 물어보시길. 묵혀두고 몇 년 뒤에 마실 와인을 찾고 있다 하면, 직원분께서 친절히 추천해줄 것이다. 넉넉히 2~3병 정도를 사고 지금 한 병을 마셔보라. 그리고 잘 쟁여 뒀다가 당신이 소망하는 그 일을 이룬 날 와인을 열어서 마시면, 그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시간을 삼키는 일이 될 것이다.


포르투의 밤과 떠날 때 새로이 산 와인. 마데이라라는 화산섬에서 만들어진 와인으로, '그 선수'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이전 11화 위스키냐 와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