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쟁이 Nov 12. 2020

박물관이 취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박물관은 지상낙원이다

 흔히들 박물관이라고 하면 매우 지루한 공간을 떠올릴 것이다. 보통은 아이들을 가진 부모님들이 일찍이 아이가 무언가를 배우고 알게 되는 즐거움을 깨우쳐 주기 위해 데려가는 지루하고 촌스러운 공간이 연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박물관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고 싶은 공간이 된다. 뿐만 아니라 박물관은 당신의 생각보다 첨단 기술들을 활용해, 훨씬 더 흥미롭고 신기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자 오크통 열차 타고서 위스키의 세계로 가보자~


아 심지어 술독에 빠진 귀신이 한국어로 설명해준다.

 에딘버러의 로얄 마일에 가면, 위스키 박물관이 하나 있다. 사실 이 곳에 대해서는 어느 지인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필자가 좋아할 만한 장소라고 추천을 받았던 적이 있어서 딱 리스트에 넣어놓고 벼르고 있었다. 들어가면 어떤 코스로 관람할지 고르게 되는데, 고민할 것 없이 프리미엄 코스를 골랐다.라고 쓰고 술 많이 주는 코스로 골랐다고 읽는다.


스코틀랜드의 5가지 위스키 산지에 따른 스타일들을 설명해주는 공간. 오른쪽 사진의 저 엽서를 문지르면 해당 산지에서 나는 위스키의 특징적인 향이 난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이 유럽에서 박물관을 두세 군데 정도 들렀는데, 하나같이 너무 흥미롭고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다는 점이다. 위의 사진처럼 오크통 열차를 타고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술독에 빠져 죽은 거 같은 귀신 하나가 벽에 나타나 쫓아오면서 위스키의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고는 서재 같은 공간에 들어가서 위스키의 원료와 그에 따른 종류들을 설명해주는데, 매 순간순간에 설명을 위해 다양한 미디어들이 활용된다. 프로젝션 매핑을 통해 술병 안에서 정말 술이 빛나는 것처럼 보여준다던가, 원하는 스타일의 술을 주문하기 위해 프로젝션 된 불빛 아래에 잔을 둔다던가, 엽서를 문지르면 위스키의 향이 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설명이 끝난 뒤에 가이드 뒤편에 있던 책장이 스픽이지 바의 입구처럼 드르륵 열리면서 어마어마한 술 저장고가 나타났다.

서재의 책장이 드르륵 옆으로 열리면 드러나는 술 창고. 어느 수집가가 모아서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은 애초에 어느 돈은 술쟁이 하나가 위스키를 모으다가 만들게 된 박물관이라고 한다. 그의 컬렉션들로 만들어진 비밀 창고 느낌의 전시장이고, 스카치위스키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누군진 몰라도 더럽게 돈 많고 부러운 인간이다. 모르는 이름의 위스키들도 태반이었지만, 내가 아는 위스키들의 올드 바틀들이나 특별한 병들의 디자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상당히 쏠쏠했다.


 특별히 좀 많이 빈 술들이, 천사들이 좋아하는 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양조장이나 증류소에는 '천사의 몫 (Angel's Share)'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옛날에 술을 숙성하는 과정에서 증발하는 일정량의 술을 보고서 천사가 마신다고 생각해서 붙인 용어라고 한다. 천사들이 술을 세금마냥 떼어 가고서 그다음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일종의 토속 신앙 같은 거라고 볼 수 있겠다. 투어 가이드가 이를 언급하면서, 특별히 많이 비어 있는 술병들이 천사들의 '최애'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재밌는 비유다. 하지만 실상은 밀봉(Sealing)이 제대로 안 된 거겠거니...


 

투어의 끝은 언제나 드링킹

 보시다시피 필자의 투어 코스 선택 기준은 '몇 잔을 주는가'에 있었다. 일반 코스는 앞서 서재에서 준 한 잔 뿐이지만, 프리미엄 코스는 그 한잔을 제외한 나머지 산지의 대표적인 위스키들도 맛볼 수 있는 기회와 재방문 시 할인 조건을 적용해준다. 마음 같아선 4박 5일 동안 6번 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잠을 저 술독 귀신과 오크통에서 자야 할 판이니 참았다.

 아무튼 이 이전에 갔던 맥캘란 증류소도 그렇고, 이 이후에 가게 된 포트 와인 양조장이나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도 프로젝션 매핑부터 홀로그램이나 인터랙티브 인스톨레이션(Interactive Installation) 같은 다양한 미디어들을 통해 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사실 더 이상 우리가 아는 '박물관'의 범주보다는 미디어 아트 전시장 같은 인상도 많이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지역 사람들의 '술'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정성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게 참 신기한 부분인데, 우리나라에서 '김치' 박물관이나 '전통주' 박물관을 만든다고 해서 이런 굉장한 장소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떤 문화, 제도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일까 싶다. 개인적으로 누가 나에게 전통주 박물관을 니 맘껏 한번 꾸려봐라 라고 한다면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이 여행에서 거쳤던 다양한 박물관들의 컨텐츠들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나를 몰입시켰다. 아, 물론 나는 그 박물관들에서도 취해 있었다.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와인 생산자가 직접 와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맥캘란 증류소의 오크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미니어처 위에 홀로그램을 얹어 와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전 09화 술 중에 술은 노상 낮술이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