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간의 나 홀로 보르도 여행기,
보르도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에서 처음 알게 됐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지롱드 강의 좌안과 우안의 차이라던가 와이너리의 등급이라던가... 와인에 대한 많은 흥미를 갖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관광을 위한 도시로서는 그렇게 볼거리가 많거나 큰 도시는 아니지만, 4박이나 되는 긴 일정을 잡아두고 참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일정이 끝날 때 즈음, 와인 색깔만큼이나 녹진한 노을의 광경을 보며 보르도라는 도시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혼자서 와인 바에 들어가 와인 디스펜서에 있는 다채로운 프랑스 와인들을 홀짝홀짝 맛보다가, 나른하게 취하면 시청 앞 공원 풀밭에서 늘어져 광합성도 좀 하고... 다시 술이 깨면 레스토랑에 들어가 코스요리를 시켜 찬찬히 음미하기도 했다. 보르도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기까지 전체 여행 중 3주 남짓 됐을 때 즈음인데, 유독 한국인 관광객이 드문 동네다 보니 말 붙여볼 일도 유독 없고 영어조차 통하지 않아서 정말 입에 거미줄 칠 것 같이 조용히 돌아다닌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혼자 타지에 떨어져 돌아다닌다는 것은, 도리어 내 본래의 일상에 대해 곰곰이 곱씹어볼 기회가 됐다.
휴학을 결심했었다. 학부 4년과 석사과정 2년을 마치고서 스스로 할 만큼 하지 않았냐고, 남들 다하는 휴학 한번 안 하고 이만치 했으면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한번즘 신나게 놀고 싶었을 뿐이면서, 나름 열심히 합리화를 했던 것 같다. 박사과정도 입학이 확정되어 있던 터라, 입학과 동시에 지도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휴학계를 냈다. 일반적으로 있는 일은 아닌 지라 그래도 꽤 큰 마음을 먹어야 했고, 이왕 하는 김에 뒷 생각은 하지 않고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기로 마음먹었었다. 특히, 때마침 관심을 갖게 됐던 '술'에 푹 빠져 보고 싶었다.
휴학을 시작하던 날, 학회에 제출했던 논문의 리젝(reject) 소식을 들으니, 약간은 본업으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어떠한가 어차피 이후 반년은 쉬기로 마음먹었으니, 훌훌 털어버리고 본가로 향했지만 약간의 패배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외주작업을 하면서 여행경비를 모으는 동안, 이내 좀 신경이 덜 쓰이나 했지만 한동안은 이래저래 불안함과 초조함이 함께했다. 괜한 짓으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이후의 학업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지... 시험기간에 쫄면서 노는 학생의 심정으로 여기저기 온갖 바(Bar)와 바틀 샵들을 전전했다. 여행에 대한 예습이기도 했고, 무턱대고 시작한 휴학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꼬박 모은 돈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사실상 이런 걱정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여행 내내 완벽하게 덮어두지는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남들보다 뒤처지진 않을까 싶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이내 보르도를 떠날 때 즈음,
이 여행을 시도하길 참 잘했다. 이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좋아하게 된 것들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었고, 그것들이 탄생하고 숙성되는 시간을 잠깐이나마 함께할 수 있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과 만나고, 여행을 공유했던 모든 기억들이 인생에 다신 없을 기회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스키 여행, 바 투어, 그리고 이제 와이너리 투어를 거치면서 필자는 '술'이라는 문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취미관을 쌓아온 것 같다. 소위 '오덕'끼가 있던 사람인지라 지금껏 만화, 영화, 자전거, 농구, 영상제작 등등 여러 취미를 즐겨왔는데, 이 술에 대한 것만큼 열정적으로 파고들어본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조금 거창하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보르도에 이르러서 조금은 그 이유를 스스로 깨달은 것 같다. '술'에는 그 기원부터 생산자, 생산지, 그곳의 문화와 환경, 더 나아가서는 양조의 과학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매력적인 음료다. 영화를 보면 매력적인 배우와 감독, 연출들의 뒷 이야기를 찾느라 영화보다 서너 배의 시간을 쓰는 필자로서는 와인과 위스키에 빠지는 게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두서없는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보르도를 떠나 마지막으로 또 다른 와인의 성지인 부르고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