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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왕 Apr 17. 2023

2000년대생의 두 번째 세대적 특징 ≪초자율≫

[23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에 대해

오늘은 <2000년대생>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세대적 특징'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 두 번째 키워드로 '초자율' 뽑아봤습니다.

초자율이라 함은 쉽게 말해서 자율성이 넘친다는 뜻으로, 2000년대생들이 이 전 세대에 비해서 조금 더 '완전한 자율성'을 선호하고, 조직과 사회에도 이러한 자신들의 공통적인 특성을 요구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결정권은 '통제감(Sense of Control)' (혹은 '통제의 욕구(Need for Control)')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죠. 통제감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서 원하는 사건과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식'을 의미하는데, 통상적으로 이 통제감은 우리의 자존감과 정신건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통제감의 상실은 곧 인생이 불행하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차드 라이언(Richard Ryan)가 1975년 수립한 그 유명한 ‘자기결정성 이론(SDT, Self-determination theory)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결정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율성과 관계성, 그리고 유능감이라는 세 가지 기본 욕구를 가지며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자기결정성’이란 ①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행동을 선택함과 ②다른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③바람직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인간에서 자율성과 관계성, 그리고 유능감이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됩니다. 특히, 이 세 가지 욕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욕구는 자율성(Autonomy)으로 이것이 훼손되거나 충족되지 않을 때 인간은 누구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관련된 연구(한민 외 4인, 2009)에 따르면, 한국인은 중국·일본인에 비해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인하고 확대하는 ‘주체성’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중국인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지지만, 자기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성도 높은 편으로 확인됩니다.


저는 지금의 젊은 세대로 가면 갈수록, 주체성 보다 자율성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로 대표되는 주체성 높은 개꼰대의 모습이 많이 사라진 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는 게 뭐가 문제가 돼?"와 같은 개인의 자율성이 우선시되는 모습이 새롭게 나타났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 모두 본인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와 더 많은 관계를 할수록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저(!)를 빗대서 생각해 보면, 사회생활(특히 조직생활)에서 자기 결정권이 사라지는 부분을 어느 정도 순응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많은 사회초년생들은 그러한 부분을 순진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들이 살아온 환경 자체에 있어서 통제를 할 수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 더 촘촘했다는 점을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이를 조금 더 쉽게 이야기 해보자면, 예전에 ‘통제가 가능하지 않았던 영역’이 지금의 누군가에게는 ‘통제와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20세기의 중고등학생들이 찍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사랑의 매를 비롯한 다소 비합리적인 교육 방식을 그대로 넘어갔다면, 21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은 발전된 카메라폰과 녹음기술을 통해 폭력적인 (일부) 교육 현장을 개선했고, 평가에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기 결정권’을 지키고, '통제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능적이고 본능적으로 ‘어떤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있고, 어떤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지’를 사전에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회사 근무 형태]로 좁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은 회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많은 회사들이 감염병 확산에 대응하고자 반강제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한 사건을 뽑을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전부터 유연근무제를 시행했던 회사들은, 근무 시간에 있어서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 모두에 있어서 개인이 선택과 통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2022년 말을 기점으로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접어들면서, 국내와 해외의 많은 수의 기업이 근무형태를 다시 이전과 같은 형태로 원복(!)을 시키는 데 있어서, 기성 조직과 신 세대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죠.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2023년 말부터 조직 생활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할 지금의 [2000년대생] 신입 사원들이 위의 표 중에서, 시간과 장소의 자율성이 떨어지는 조직을 원할까요? 아니면 반대로 시간과 장소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조직에서의 근무를 바랄까요?


전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언론 보도에서는, 국내와 해외의 유수의 기업들 대부분이 재택근무를 폭파시키고, 근무 형태를 [9 to 5의 오피스 근무]로 돌렸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지만, 제가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기에는 많은 기업이 일률적으로 과거의 근무 형태로 돌아가기보다는, 같은 회사라도 그 회사의 조직과 직무별로, 구성원의 의견을 들어 가장 적합한 형태의 근무형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가령, 직접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소통을 해야 효율이 나는 몇몇 부서는 기존의 형태로 돌아오고, 반드시 시간과 장소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개발과 기획 파트와 같은 곳들은 일주일에 1회만 합의된 시간에 회사로 출근하는 형태로 합의를 보는 식이죠.


<코로나 19> 이후, '배달원 취업자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배달원 취업자수가 2019년에서 2022년 사이에 약 2배 정도 증가(2019년 상반기 119,626명 → 2022년 상반기 237,188명)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배달 건수가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배달 건수 급증과 단가 상승에 따라, 배달업 자체의 수익이 늘어났고, 이와 반대로 일할 수 있는 곳은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달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사실 제 주위에도 몇몇이 새롭게 배달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들이 배달업에 종사하는 이유에는 단순히 돈 외에도,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배달업 자체의 특성을 뽑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취준생들이 지방근무를 기피한다라는 뉴스를 아마 보셨을 겁니다. 위의 뉴스에서 [지역 취업 마지노선]이 세종과 대전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많은 취준생들의 취업 마지노선은 사실상 '수원'에 가깝습니다. 진짜 신의 직장이라면 지역 오지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수도권을 벗어나기는 힘든 것이죠.


하지만 배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적어도 내가 원하는 지역에서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100%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처럼 정해진 시간을 무조건 얽매이는 것은 아니죠.


지금과 같이 팬데믹의 공포가 줄어들고, 경기 자체가 하강되면서 배달 수요와 배달업 인기가 함께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직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주말 성수기를 제외하곤 눈에 띄게 배달 건수가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시간과 장소 선택에 있어서의 우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기업과 유명 스타트업 기업이 유연근무와 재택근무를 점차적으로 줄이거나 없애고 있는 상황은,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자율성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인재가 있다면, 그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게 될 테니깐요.


그리고 저는 수년 전부터 유행한 단어인 '누칼협'이란 단어도, 현세대의 초자율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누칼협이란 단어는 "칼 들고 박했어?"의 줄임말로 '어떤 사람이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이나 직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데 대해 누가 그걸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한 사람도 없으니 그럼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단순하게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의미를 넘어서, 누군가를 조롱하는 상황에 자주 쓰이다 보니 최근에는 어설프게 썼다가 반대로 역풍을 맞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개인의 선택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부당한 업무 환경 등이 자리 잡고 있는 일이기에 모든 부당함의 외침을 "누칼협?"으로 종결시키려는 시도가 합당하다고 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와 같은 '개인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중시하는 행태'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지금의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정의론 자체가 로널드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또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짧게 요약해 보자면,  '자유주의적 평등론자'들은 개인의 선택의 결과로 발생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공정한 것으로 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코인에 전 재산을 올인했다가 인생이 망해버린 사람에게 정부가 파산지원을 하는 것은 부당한 일에 해당합니다. 반대로 이들은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불운에 대해서는 사회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에게 정부가 적극적인 복지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서 불공정하고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초자율과 관련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는 많습니다만, 이번화에서는 줄이고 앞으로 더 많은 공부와 논증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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