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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토닥 Feb 13. 2023

우리 집에는 정신과 의사가 산다

[Intro] 뭐? 정신과에 가겠다고?


그 남자와의 첫 만남

그를 처음 만난 건 내 나이 스물셋.

취업준비로 자존감이 바닥 치던 어느 날, 친구의 뜬금없는 소개팅 제안에 '에라이~ 취업도 안되는데 연애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인생 첫 소개팅을 나가게 되었다.


나와 동갑내기로 당시 본과 3학년(예과2년+본과4년)에 재학 중이던 그를 처음 만난 신촌 독수리약국.

'부농의 아들' 느낌이라던 친구의 소개와는 달리 내 이상형에 가까웠던 그에게 나는 처음부터 호감을 느꼈고, 그도 내가 맘에 들었던지 우린 정확히 세 번의 만남 뒤 연인이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에게 난 11번째 소개팅녀였다고 한다. 심지어 앞선 열 번은 나 만나기 전 6개월 동안 했던 소개팅이란다. 아이고 억울한 거!!)  

우리가 처음 만난 <신촌 독수리약국>. 현재는 리모델링으로 새로운 간판이 달려있다.


뭐? 정신과에 간다고?

만난 지 3년째 되던 해, 초주검 상태로 인턴생활을 하던 그가 내게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나 아무래도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에 가야 할 것 같아."

순간 심장이 덜컹. 요 몇 달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만 하더니 드디어 마음의 병이 찾아왔나 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어? 너 어디 아파?"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내가 뭔가 오해했음을 깨달은 그가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 내과 말고 정신과로 레지던트 지원하고 싶다고."


의대생 시절부터 내과에 지원할 거라고 말해왔던 터라 나 역시 처음엔 조금 의외였지만 본인 직업 본인이 선택하겠다는데 이건 연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음... 넌 내가 정신과에 지원하는 거 괜찮아?"

"내 의견이 중요한가? 네 직업이고 평생 그 일로 먹고살아야 하는 것도 넌데 본인이 알아서 판단해야지."


당시 신입사원 신분으로 나 먹고살기도 바빴던 내게 연인의 전공과 선택은 '알아서 잘하면 되는' 일 정도였고 그래서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결혼을 생각하면 좀 더 돈 잘 버는 과를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고, 과마다 근무환경도 워낙 다르니까… 네 의견도 중요할 것 같아서."


우선 깜빡이 없이 치고 들어온 그의 '결혼' 이야기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덤덤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반했고,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집에는 정신과 의사가 산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정신과에 지원했고 곧 이은 합격 소식과 함께 4년 간의 레지던트 과정이 시작되었다.

 

요즘에야 방송매체에 오은영 박사나 윤홍균 작가(『자존감 수업』저자) 같은 정신과 의사들의 활약으로 정신과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지 못했다.


실제로 주위에서 "남자친구는 전공이 뭐예요?"라고 물어봐 정신과라고 답하면 대게 언덕 위 하얀 벽돌에 둘러싸인 병원, 폐쇄병동, 철창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추리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병원...)


나 역시 그가 처음 정신과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첫 질문이 "거기서 근무하면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말이었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당시만 해도 정신과에 대한 이미지가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의 기우와는 달리 남편은 본인 적성을 제대로 찾았는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전공의 생활을 했다. 어떤 날은 본인 담당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는 걸 보면서 행복해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환자의 자살, 무단 퇴원 등)에 마음 아파하며 잠 못 이루는 날들도 있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일로 인해 때때로 무너지는 그를 옆에서 지켜보자니 '그때 정신과에 지원하지 못하게 말렸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드는 날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과의 싸움에서 환자가 이겨낼 수 있도록 자신의 20대 청춘을 다 바쳐 수련하는 그를 보며 결국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연애 4년 차가 되던 해, 우리는 드디어 연인에서 부부가 됐고



우리 집에는 정신과 의사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결혼식장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입장하던 날,

나는 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켜.
네 마음은 내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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