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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Oct 14. 2022

부캐가 성장하니 본캐도 성장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본캐로 산다. 부캐로 사는 시간이 길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이 나의 일상을 빛나게 만들어 준다고 믿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대부분 부캐로 사는 동안에 일어난다. 그래서 종종 욕심이 난다. 시간을 조금만 더 투자하고 싶다, 그러면 더 잘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모임에도 시간을 더 투자하면 좋은 기획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멤버들을 한 분 한 분 더 챙겨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부캐로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주 관심사가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뭐든 빨리빨리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주 뭉그적거리는 아이들을 다그쳤다. 내가 확보하는 시간을 위해 다른 가족들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직장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본캐와 부캐로 사는 일상이 적절하게 어우러지기를 바랐다.   

  

단순한 일상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생활을 단순화시켜야 했다. 육아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집안일 같은 최소한의 필수적인 일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책 읽기와 글쓰기, 모임에 집중하는 시간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간을 확보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지나면서 보니 예전보다 불안하다는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불안증’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작은 문제가 하나 생기면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무슨 일이든 그 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니 쓸데없이 공상을 하거나 불안에 불안을 키우는 생각들이 차츰 사라졌다. 쇼핑을 하며 시간을 때우거나, 불필요한 감정 소비를 줄이니 자연스럽게 덜 소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보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다.     

 

조급한 마음 대신 집중력이 높아졌다. 직장 업무를 하는 데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9시부터 6시까지 풀타임 근무를 하면 종종 근무시간에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딴짓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퇴근 즈음 일이 밀려 종종 퇴근이 늦어졌다. 근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처리하는 습관을 통해 일의 능률이 올랐다. 

    

최소한의 관계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일상을 단순화한 이후 내가 맺고 있던 관계들을 자연스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고, 나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느라 애쓰던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집중해야 할, 마음을 써야 할 관계들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돌아보기보다 내 감정을 살피게 되고, 내가 진짜 살펴야 할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시간을 통해 거절이 필요한 순간 거절해야 한다는 것. 거절한다고 해서 그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 만약 그래서 끝날 관계라면 언제든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는 관계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많은 관계들이 명쾌하게 정리됐다. ‘나’의 감정을 앞에 두니 예전엔 보이지 않던 불공정함이 보였고, 불편한 사람들이 보였다. 앞에선 "네네." 하고 돌아서서 징징거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앞에서 당당하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당연한 요구를 당연하고 당당하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밥을 차리지 않아도, 청소를 제때 하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모임 때문에 아이들을 남편이 돌봐야 할 때 ‘미안한데’라는 말을 앞에 자주 붙였다. 스스로 아이들의 돌봄이 모두 내 책임인 것처럼 굴었다. 아이들에게 역시 엄마가 부재하는 시간에 대해 자주 미안해했다. 그게 나 스스로 만든 굴레였구나,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나'구나 생각하니 천천히 바꿔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나의 괜한 걱정이 맞았다. 아빠는 아이들과 잘 놀았고, 아이들도 이유 있는 엄마의 부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언제나 걱정은 나 스스로 만들고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였다. 차츰 내가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니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걸 요구하며 당당해질 수 있었다. 미안함보다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서 무조건 참는 사람이 아니라 명확하게 요구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상사에게 밑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직장에서 역시 무조건 네네 하는 직원보다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하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속도보다 방향      

꿈에 대해 막연하게 상상하는 시간에서 ‘삶의 방향’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꿈에 대해 생각할 땐 자주 겁이 났다. 벌써 나이가 마흔셋인데, 이제 꿈을 이루기엔 너무 늦었구나. 이번 생에선 망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모임을 시작하고,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고 줄 것도 많다. 나는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며 때로 그 어려움 앞에서 겸허해진다. 나는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불안하고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 『비커밍』, 미셸 오바마, 웅진지식하우스, 2018     


부캐로 즐거운 일이 많아질수록 본캐로 사는 일상도 즐거워졌다.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일상생활에서의 나도 달라졌다. 쉽게 지치고 무기력해지던 나는 이제 없다. 올해도 상반기가 끝날 무렵 올 한 해 부캐 활동을 위해 세웠던 목표만큼 본캐로 세웠던 목표 역시 대부분 이룰 수 있었다. ‘둘 다 어떻게 다 잘하지?’ 의심하지 않는다. 여전히 조급증을 내기도 하고, 이 방향이 맞나 자주 점검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해 슬퍼질 거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의 삶을 묵묵히 살아 내고 싶다.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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