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는 봤니? 별 사탕 들어있는 옛날 건빵?
별 사탕 찾는 시간 -2
집에 있을 때는 언니와 나도 고생이 많았다.
내 밑으로 삼 년 터울의 동생이 있었는데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갈 만큼 덩치가 커서(금복주 그림과 거의 똑같다) 언니와 둘이 힘을 합쳐 유모차를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일반 유모차는 감당이 되지 않은 동생의 체격에 특별히 나무로 주문제작을 했는데 하늘색 페인트를 칠한 유모차(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목마에 가까운)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무거운 데다가 동생의 무게 또한 장난 아니어서 언니와 나는 끙끙거리며 유모차를 밀었던 기억이 난다.
딸 둘 이후 후 첫아들이었던 남동생은 동네에서 개똥이라고 불렀다. 아들선호 사상이 지대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봐도 귀여운 기색이라고는 없는 완전 돼지처럼 뚱뚱한 남동생을 할머니는 개똥이라고 부를 것을 선언했다. 너무 귀한 아들이라 더 천한 별명으로 불러 액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개똥이 누나라고 불리는 것이 진짜 싫었다.
둘째 남동생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2월 태어났다. 엄마는 젖 냄새 가득한 작은 방에 아기를 끼고 누워 이래라저래라 모든 지시를 입으로만 했다. 결국 동네의 모든 친구들이 엄마 손을 잡고 손수건을 달고 입학식에 가는데 나만 혼자 학교에 가야 했다. 불과 10분 거리의 학교지만. 털이 복슬복슬한 부티 하는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할머니가 동백기름 발라 땋아준 단정한 머리 모양과 야무진 입매 덕분이었을까, 나는 천 명(베이비부머 시대였고 한 반에 90명 넘게 때려 넣을 때였는데 10반까지 있었다!)에 육박하는 일학년 입학생 중에 뽑혀 단상에 올라가서 유희 시범까지 보였다.
"서산 너머 햇님이 숨바꼭질할 때에 수풀 속에 새집에는 촛불하나 켜놨죠. 아니 아니 아니죠. 켜논 촛불 아니죠. 저녁 먹고 놀러 나온 아기아기별이죠" 지금도 아니 아니 아니죠, 대목에서는 고개를 흔드는 동작, 켜논 촛불, 대목에서는 한 손으로는 다른 한 손의 팔꿈치에 대고 초가 흔들거리는 동작을 한 기억이 생생하고 선명하다.
갓 입학 한 코찔찔이 아이들이 운동장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데 단상에 올라가 유희 시범을 보이는 나를 본 동네 엄마들이 모두 엄마에게 달려가 세상에 그렇게 똑똑하다니, 엄마도 없이 혼자 학교에 간 것도 기특한데 단상에서 유희 시범까지! 그렇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때부터 동네에서 누구 집 둘째 딸 똑똑하다는 소문이 나를 더 똑똑스럽게 키운 것은 확실하다. 나는 어디서나 칭찬받는 아이였다.
막내 동생은 내가 3학년 때 겨울 즈음 태어났는데 치맛바람 장난 아니었던 엄마와 담임선생님 (이정자 선생님이시다)이 어찌나 친했던지 산달이 가까워오자 담임선생님은 매일 나에게 엄마가 아기 낳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매일 물어보는 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학교 가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담임선생님이 애를 낳았느냐고 물어보셔서 네, 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반색을 하시며 뭐를 낳느냐는 것이다. 아들이냐 딸이냐 그걸 물으시는데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나는 딸이라고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렸다.
남동생 둘에 치인 나는 귀엽고 예쁜 여동생을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서야 엄마는 드디어 몸을 풀었는데 또 아들이었다. 나는 정말 실망했고 담임선생님에게 다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꽃단장을 한 엄마가 어마무시하게 예쁜 이불보에 아기를 싸안고 교실 문을 들어서는데 나는 그만 죽고 싶었다.
(이 글이 겨울 방학 때 외갓집에서 건빵을 먹으면서 별사탕을 찾는 시간까지 가려면 대체 얼마 큼을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여기까지만 썼는데 다음에 또 언제 계속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은 우리 시대 획기적 사건 중 하나였다.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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