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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바다 Jul 01. 2019

바위에서 쉬다 | 시간이 많은 제주 카페


처음 만났을 때 K님은 계산대 앞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앉아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직물 디자인>이라는 원서가 놓여있었다. 벽돌만큼 두꺼운 <직물 디자인>을 흘끗 보고 계산을 한 뒤 자리에 앉으니 비로소 카페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자수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직물 디자인>을 보던 그는 카페의 주인장이었다. 잠깐 마주친 그로 인해 이런 글을 쓰게 되었으니,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그를 K님이라 칭하겠다.


K님이 얼마 후 음료를 가져왔는데 음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컵 받침대였다. 자그마한 크기에서 시간이 느껴졌다. 커다란 자동차도 3D 프린터로 뚝딱 찍어내는 시대에. 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컵받침에서 나는 K님이 촘촘한 바느질로 한땀한땀 채워간 시간의 구비구비를 느꼈다.


그렇게 고개를 돌려보니 플러그를 꽂는 콘센트마다 달려있는 덮개가 눈에 들어왔다. 220V라는 글자와 배터리 모양이 재치 있게 수놓아진 아이보리색 덮개였다. 하얀색 창틀 앞에 오밀조밀하게 놓인 유리컵 안에서 자라는 비트에게 씌인 ‘정우성’이라는 이름표도 보였다. (왜 정우성인지 이해하려면 90년대 감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백미는 글자 하나하나를 수놓은 메뉴판이었다.


그쯤 되니 잘 믿기지가 않아서 컵 받침대를 들고 “이거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라고 물어보니 고개를 씩씩하게 끄덕이며, 한 삼십 년 사는 동안 한 번도 상처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 같은 얼굴로


“네! 시간이 많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맞다. 어쩌면 모든 멋진 것들은 그걸 만들어낸 사람이 들인 무수한 시간 덕분일 텐데, 나는 그걸 재능 때문일 거라고 쉽게 생각하며 정직한 노동의 양을 가벼이 생각했던 것 같다.


가격이 바뀌면 좀 난감하겠다 싶은 메뉴판


약한 것들에 대한 환대


사실 이 카페에 들어서기 전에 약간 걱정을 했었다. 가족들과 함께 어린 조카를 데리고 가는 길이어서다. 노키즈존 혹은 들어가 있으면 싫은 눈치를 주는 곳이 많이 있고, 제주 해안가의 카페들은 조용한 시간을 보내려는 청년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입장도 전에 퇴짜를 맞을까봐 고민이 됐다.


하지만 같이 간 조카와 나눠 먹으려고 하나 시킨 한라봉 에이드를 두 잔 주는 (대책 없는) 사장님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놓일 수밖에 없었고, 가끔 들르는 동네 묘 선생을 반기며 먹을 것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자니 완전히 안전한 느낌까지 들었다.


여기는 웰컴 키즈존, 아니 모든 인간과 동물에게 열린 곳이겠구나. 작고 약한 것들을 돌보는 마음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전좌석 바다 전망 테이블 + 제주 낙조 감상 가능


이 카페가 특별한 환대의 공간이었던 것은 호스트의 화려한 서비스나 언변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환대란 ‘서비스 마인드’로 가능하지 않다. 형식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장소에서 사람을 만났는가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 같은 체인 커피점에 가면 나는 사람(점원)을 만나 커피를 건네받는다. 하지만 매장의 점원들은 스타벅스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접속하는 개별 인터페이스 역할을 할 뿐이다. 포털사이트에 접속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덕분에 나는 전 세계 어느 매장에 가도 익숙한 느낌으로 스타벅스라는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가 돌아온 혼자된 밤. 가만 생각해보면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한 것처럼 쓸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위에서 쉬다> 카페에서만 볼 수 있는 콘센트 커버



기술 발전의 열매는 다 얘들이 가져갔나 싶을 만큼 서비스 기술은 화려해졌다. 그중 내가 가장 싫은 건 감성 마케팅 같은 것들인데 - 한편으로는 그게 참 교묘해서 가끔 내가 받은 환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가만히 자문해본다. 내가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가 기억나는가. 그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면 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적당히 비슷한 유니폼의 색깔이나 계산대의 기계적인 목소리만 기억난다면, 하루 종일 한 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 해안의 이 작은 카페는 따뜻한 환대의 장소였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말투나 태도를 기억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을 만났다.


몇 번이나 손님이 왔다가 돌아가는데도 빈 공간에 테이블을 빽빽하게 들여놓지 않는 사장님. 고품질의 베이커리를 어디서 사 오지 않고 수고스럽게 직접 만드는 무모한 사장님. 정말로 나는 그의 ‘가성비’를 고려하지 않는 선택들이 좋았다. 셈이 빠른 경영학도가 보면 혀를 끌끌 차겠지만 말이다.


#제주 #귀덕리 #귀덕해변 #바위에서쉬다 #석양




제게 특별했던 공간을 소개하는 글묶음을 내면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욕도 굴욕도 없는, 사람에 대한 우정이 있는 장소를 찾아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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