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먹는 게 여행의 8할 23.11.07~09
골목마다 오만 참견을 해대느라 몸의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상황. 초 저전력 모드로 간신히 북신시장에 들어섰다. 떨리는 눈꺼풀을 참아내며 블로그에서 본 입간판을 찾아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젠가 군산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오후 3시부터 만석 꿰차고 앉아 자리를 내주지 않아 시장통 맛집 입성에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미닫이 문을 여는 순간 심장이 섣부른 두방망이질을 하려는데, 쩌어 안쪽으로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분들께 사랑받고 있는 식당이라던 소문답게 테이블마다 이미 거나한 술상들이 차려져 있었지만, 우리에게 술 한 잔 대접할 온정(=빈자리 ㅋㅋ)도 마련되어 있었다.
"반다찌 2인이요. 술은 여기서 꺼내 갈게요!"
아...! 너무 좋다! 다찌는 통영의 대표 술상 문화다. 술을 주문하면 기본 상차림에 그때그때의 제철 해산물을 재료로 한 다양한 안주가 조금씩 계속 나온다. 수십 년 전엔 술값만 치르면 안주는 공짜로 주는 식이었다는데, 이후 손님이 많아지니 술값이 비싸지다가 근래에는 술값과 별개로 상차람 값 인당 얼마, 최소 몇 인 이상 주문 가능한 식으로 변형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이모카세, 할마카세를 맛볼 수 있는 가게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반다찌는 이름에서 예상 가능하듯, 우리처럼 술도 음식도 통 크게 먹어치우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안주의 양을 줄이고 가격도 조금 낮춰 받는 semi-다찌, half-다찌라고 보면 된다.
이곳 '술따라길따라'는 22년도까지만 해도 반다찌 가격이 1인 1만원이었다는데 지금은 2만원으로 인상됐다. 강남에선 순댓국 한 그릇에 1만원이 넘는 집이 수두룩한 걸 생각하면, 올라도 여전히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다. 무엇보다 그날그날 시장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제철 해산물을 여러 가지 맛볼 수 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암만.
술을 꺼내오니 당장 집어 먹을거리들이 차려졌다. 제철을 맞은 싱싱한 생굴과 먹물까지 통째로 데친 총알오징어 숙회 그리고 이름 모르는(미안) 소라들. 연이어 석화찜과 군소, 갈치조림이 등장했다. 군소는 '삼시세끼'에서 보고 궁금했었는데 쫄깃한 식감에 바다 비린맛과 쌉싸름함이 느껴졌고, 사실 그 이상의 특별한 맛은 잘 모르겠더라. 이렇게 조금씩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다찌의 기쁨 중 하나다. 갈치는 반건조하여 무치듯이 살짝 조려 나왔다. 첫 입에 사로잡히는 맛은 아니지만 말리면서 수분이 날아가며 농축된 감칠맛이 자꾸만 젓가락을 불러들였다.
음식 준비와 서빙은 사장님 한 분의 손에서 모두 이뤄졌다. 회무침을 무치며 직전에 내준 생표고버섯과 기름장이 입에 맞나 확인하고, 회무침을 테이블마다 내려놓으며 개불을 썰어주겠노라 공표하신다. 단골손님이 들어와도 인사는 '어이~'가 다지만 우리 테이블과는 달리 석화찜이 대접으로 올라가는, 투박한 정이 있는 시장통 술집. 마음 같아선 바다부터 여기까지 너얿게 퍼서 집 근처로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바쁘게 돌아다니는 수밖에. 야속한 노릇이다.
둘이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으로 소맥 말아먹고 나니 잔치는 끝이 났다. 더 뭉개고 있으면 안주야 뭐라도 더 나오겠으나 나온 들 더 밀어 넣을 방도가 없다. 가야지 가야지.
시장을 나온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의 여행은 걷거나 먹는 게 8할이다. 다시 서포루 근처를 지나며 야경을 내려다보니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시간대에 다른 각도에서 같은 골목을 보고 또 보는 게 우리 여행의 8할인 거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니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다리를 건너며 반대편 노트르담 성당을 올려다봤을 때가 생각났다. 바다와 언덕, 꼭대기 위에 건축물이 있다는 것 정도의 공통점일 뿐이지만 비슷하거나 대조되는 포인트를 찾아 나만의 추억들을 연결 짓다 보면 그 순간들이 더 풍성해지는 것 같아 좋다.
다시 충무교를 건너 통영운하를 따라 숙소를 향해 계속 걸었다.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있는 좁은 물길이 바로 통영운하인데, 1930년대 운하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간조 시 땅이 드러나 바닷물이 끊기는 구간이었다고 한다. 이를 모르는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이리로 피신해 들어왔다가 떼죽음을 당해 '송장목'이라고도 불렀다고. 지금은 그저 평화롭고 잘 정비된 바닷길이다. 캄캄한 바다 위 불을 훤히 밝힌 어선들이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어민들은 고될지 모르나 여행자 눈엔 낭만스러운 철없는 바닷길 말이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편의점에서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사 '그르르, 갉' 진실의 의자에 앉았다. '잠깐 쉬었다 갈까?' 하고 앉아선 온갖 속내를 다 털어놓게 된다는 편의점 의자지만, 몇 달째 24시간 붙어있는 우리에겐 새삼 털어놓을 속내랄 게 없다. (맞십니까?) 안 먹어봤다고 사본 짐빔 하이볼과 꿀배버블 맥주 맛을 평가하며 시시덕거리면 평소와 같은 밤이 유유히 지나갈 뿐이다.
이튿날 아침. 자주 마음 먹지만 열에 여덟은 실패했던 조깅에 성공했다. 역사적인 아침이다. 통영항 근처 서호시장에 있는 '통영시락국'에서 멸치된장시락국으로 해장도 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 동네, 시래깃국이 유명하다. 근처에 식객에도 나왔다는 장어육수의 시락국집도 있었지만 우리는 깔끔한 멸치육수의 된장 시락국을 선택했다. 아예 추어탕이라면 모를까 시래기가 유명한 거라면 기본의 맛으로 먹어보자 했던 건데, 특별할 거 없는 그래서 실패할 일도 거의 없는 선택이었다. 반찬도 깔끔하고 가격도 6천원이면 나쁘지 않은 아침식사다.
조깅에 성공했다는 것은 다시 걸어서 숙소에 가야 한다는 것. 아까는 뛰어 오느라 보지 못했던, 아침 햇살에 윤슬 반짝거리는 바다를 끼고 느리게 걸었다. 고기잡이 배들은 새벽같이 일을 끝냈는지 차곡차곡 들어서 있고, 한 켠의 수조에는 번호가 달린 바구니마다 물고기들이 꼼짝없이 갇혀 있다. 비건을 하지도 못할 거면서 굳이 심란해지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하며 숙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달리기를 했다면 아침 할 일은 다 한 거다. 이제는 쉬어야지, 쉬어야지. 숙소로 돌아와 한참을 널브러졌다. 체크아웃 후 최단 동선으로 그란데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12시가 넘어야 문을 연단다. 그래도 카페와 연결된 옥상 포토존은 개방되어 있어 평소답지 않게 꽤나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