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라잖아!" 어제의 쏘아붙임은 사과할게.
-오늘은 다정하게! 화이팅!
열렬한 '다모 폐인'이었던 나는 늘 드라마에 진심이다.
한 드라마에 빠져버리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드라마에 몰입해 버린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는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보내줄 수 있지만, 새드엔딩의 드라마는 그 여운이 몇 달이나 가서 나를 힘들게 한다.
한 예로 나는 아직도 '미스터 션샤인'만 보면 눈물이 난다.
요즘 채널을 돌리다 보면 자주 '미스터 션샤인'이 눈에 띈다.
'미스터 션샤인'만 봤다 하면 리모컨 화살표를 끊임없이 눌러대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멈춰버린다. 이내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려 하면 어김없이 방해꾼이 나타나버린다.
"또 보나? 어휴, 지겨워. 에~~ 또 울려고 한대요~ 에~~에~~에 베베베"
드라마에 감정이입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아 제일 웃기다는 J는 슬픔이나 감동의 감정이 격해져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나를 발견하면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감정선을 흐트러뜨려 눈물콧물 쏙 들어가게 만들어 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아! 진짜!! 너랑 같이 드라마 못 보겠어!! 드라마 보는데 방해 좀 하지 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드라마 보면서 우냐? 어휴 진짜 이상하다 이상해."
악에 바쳐 소리소리 질러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듯 J는 입만 삐죽할 뿐이다.
드라마를 보며 오롯이 나만의 감정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외에 J가 자주 하는 방해 공작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뭐? 뭐라고? 지금 방금 뭐라 그랬어? 나 못 들었어. 뭐라 그런 건데?" 라며 주인공들의 대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물어대는 것이다.
"아!! 쫌!!! 그다음 대사 못 들었잖아! 대사 다 끝나고 물어봐도 될 것을!!"
"하... 또 이것 봐... 드라마만 봤다 하면 미쳐가지고는... 나한테 뭐라 그러고... 안 들려니까 물어본 거지!"
"알겠어. 다음부터는 해당 장면이 다 끝나고 물어봐 줘. 그래야 나도 상황을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
"됐어! 치사하다, 치사해!"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소 귀에 경 읽기'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인공들의 대사가 한창 오가고 있는 와중에 기차통 삶아 먹은 큰 목소리로 "뭐? 뭐라고? 안 들려? 뭐랬어?"를 또 남발하는 J다.
"어? '소용없어 거짓말' 한다. 너 이거 챙겨보는 드라마 아니야?"
"아~ 아냐. 심심해서 그냥 한 번 본 건데, 안 봐도 돼."
거짓말이다. 사실은 이 드라마를 엄청 챙겨보고 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서로 기분 상해 진심으로 싸우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면서, J와 함께 있을 땐 웬만하면 드라마를 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드라마에 풍덩 빠지고 싶은데 J만 있으면 전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러다 보면 또 싸우게 될 테니까.
어제저녁 J와 함께 TV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숨은 맛집이나 명소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서 '노란색 코스모스'가 핀 어느 지역을 소개하고 있었다.
신기하면서 예쁜 노란색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장소를 성우가 소개해주려던 찰나,
"어? 저거 뭐야? 민들레야? 노란색이네? 무슨 꽃 이래? 무슨 꽃인데 저렇게 많이 피어있대?"
성우 목소리를 다 잡아먹고도 남을 J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귓가에 내려 꽂혔다.
"코스모스라잖아!"
소리를 질러버렸다.
살짝 놀라기도 어리둥절하기도 서운하기도 한 표정으로 J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몰라서 물은 건데 왜 또 화를 내..."
"작게 한 번만 얘기해도 알아들어. 성우 설명 다 듣고 내가 설명해 주려는데, 오빠 때문에 나도 아무것도 못 들었잖아! TV볼 때는 조심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드라마 볼 때만 조심하라며!"
"그거나 그거나! 응용 안돼?"
"너 진짜 못돼 빠졌어!"
"오빠도 진짜 드릅게 배려 안 해주거든?"
밥 잘 먹다 또 서로 감정이 상해버린 저녁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 이유 없이 이상하게 기분이 처졌다.
필라테스를 끝내고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치다 컵을 쳐 커피를 쏟아버렸다.
"하... 되는 일 없는 날인 건가?"
평소와 달리 한 시간밖에 앉아있지 않았는데도 좀이 쑤셔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이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해졌다.
의미 없이 TV채널을 돌려대다 기분전환이라도 하자 싶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 앞 공원에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40분 동안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댔더니 끈적한 땀이 온몸을 에워싸 찝찝해졌다.
자전거 도로를 힘없이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꽤 많은 분홍색 꽃들이 얼핏 얼핏 보였다.
코스모스였다.
"와, 정말 벌써 코스모스가 피었네?"
분홍색으로 예쁘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니 어제 TV에서 봤던 '노란색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노란색 코스모스'를 생각하니 J에게 버럭 하며 신경질 냈던 어제저녁의 내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내가 좀 심했나? 하긴, 드라마 볼 땐 심하리만치 신경이 예민해지긴 해...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예쁘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니 "너 진짜 못됐다."라며 원망하던 J가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오늘 저녁엔 같이 유부초밥을 먹기로 했다.
유부초밥을 먹으며 다정히 내가 찍어 온 분홍색 코스모스를 J에게 보여줘야겠다.
그리고 어제의 쏘아붙임을 사과해야겠다.
아직 만개하진 않았다. 다음에 J와 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