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한마디에 대한 아쉬움인지, 괜한 어깃장에 대한 후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일상' 이 있다.
그날은 유독 짐이 많은 날이었다. 노트북과 책 3권, 텀블러와 카디건 등 각종 소지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카페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원래는 카페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었지만, 놀러 오라는 친구의 전화에 집이 아닌 좀 더 먼 곳으로 행선지를 정해 버스에 올라탔다. 친구 집은 지하철역 도보 3분 거리에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동네엔 지하철이 없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환승은 필수다.
버스 창가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지만,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를 갈 때는 복도 쪽 좌석에 앉는다.
먼저 하차하게 될 경우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 나기가 위해 '실례하겠습니다.'라는 제스처를 하며 옆에 앉은 승객의 앞을 쓸고 지나가야 하는, 서로에게 번거로울 행동을 줄이고자 나 자신과 내 옆 좌석 승객을 위한 나름의 배려다. J는 버스 좌석 하나에 뭐 그리 생각이 많냐며 진저리를 치지만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다.
지하철 환승역까지 다섯 정거장 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였기에 복도 쪽 좌석에 앉았다. 허리를 구부러 짐을 정리한 뒤 꼿꼿이 앉은 자세를 취하자마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평소엔 통화 가능하냐며 먼저 나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시작하던 박 대리가 이직한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의 안부는 건너뛰고 격앙된 목소리로 숨쉬기도 건너뛴 채 말하기 시작했다.
남의 일에도 내 일처럼 쉽게 흥분을 잘하는 타입이라 박 대리의 이야기들이 내 화를 돋우려던 찰나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에 서서 말을 걸어왔다. 무선 이어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오른쪽 이어폰을 뺐다.
"어디서 내려?"
대뜸 반말이었다.
"저 지하철 환승역이요."
"난 그전에 내려."
커피 광고가 생각나는 한마디였다. 그렇지만 이 상황은 커피 광고에서처럼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자신의 하차역을 알리며 관심을 표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할머니의 말에 난 그저 할머니를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는 좀 더 길게 말했다.
"내가 먼저 내리니까 네가 안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라고."
이게 무슨... 논리인가? 이 버스가 지정석이었던가? 내 자리가 창가석이었던가?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지나갔고 나의 어이없는 상황과 별개로 내 왼쪽 이어폰에서는 박 대리의 격앙된 목소리가 계속 쉬지 않고 들려왔다.
"저도 금방 내려요. 비켜드릴 테니 안에 앉으시면 되세요."
하고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 내 옆에 앉는다고 하여선 짐도 많은 나를 귀찮게 하시나 잠깐 짜증이 났지만, 아마 이 분도 나와 같이 서로의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하는 배려 깊은 마음에 내뱉은 말들이라 믿기로 했다.
"아니, 내가 먼저 내린다니까 거참 나."
투덜대며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결국은 내 옆 창가 좌석에 앉으셨다.
-과장님, 제 말 듣고 있어요? 누구랑 같이 있어요? 전화 나중에 할까요?
-아냐, 괜찮아. 계속 얘기해봐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제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냥 '네, 네'라고 말하고 자리로 왔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박 대리는 아직 회사에서의 모든 관계가 어렵다고 했다. 일이건 사람이건 어떻게 대응을 해나가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며 나와 함께 일하던 그때를 그리워했다. 그럴 수 있다고, 나라도 그럴 것 같다고, 더군다나 너는 지역까지 옮겨 이직한 터라 더 힘들 수 있다고 다독이던 찰나였다.
"에이씨, 거봐!! 내가 먼저 내린댔잖아!"
내 옆에 있던 할머니는 본인이 내릴 정거장에 다다르자 갑자기 화를 내며 내 노트북 파우치를 발로 밀며 하차문으로 향했고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이런 화를 받고 있어야 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의 울컥함에 고작 한마디 내뱉었다.
"저도 다음 역에 내린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미 할머니는 내린 상태였고, 내가 내뱉은 말은 엄한 다른 승객들만 듣게 되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좌석 때문에 어른과 언성 높인 버릇없는 젊은것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날이었는데, 버스 안에서의 좌석 문제 때문에 괜히 언짢아졌다.
통화 중이던 박 대리에게, 놀러 오라던 친구에게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죄다 일러바쳤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 전달하고자 노력했지만 나의 목소리가 이미 너무 격앙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내 감정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은 그 할머니가 무례했다며 나의 편을 들어줬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J에게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굳이 내가 번거로워하면서까지 비켜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며 다음에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내 편을 들어줬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버스만 타면 그날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오늘도 비어있는 버스 좌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날이 생각났다.
내가 안쪽 좌석으로 옮겨줬어야 했을까?
자리도 많았는데, 하고 많은 자리 중에 나보고 비키라는 태도는 합당한 요구였을까?
어르신이 요구하는 자리 양보는 나의 상태가 어떠하든 무조건 당연히 응해야 될까?
다시 생각해보니, '지난 일상' 이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나의 어깃장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저도 곧 내려요. 보시다시피 무거운 짐도 있고요. 제 옆의 창가석이 싫으시면, 다른 좌석의 복도 쪽 자리에 앉으시는 건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