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거 없이 쉬는 방법
퇴사하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좋다.
다르게 말하면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오후에는 다들 회사에 있어서 혼자 놀 수밖에 없다.
쳇바퀴에서 함께 뛰던 선수 한 명이 내려와서 쳇바퀴를 바라보며 '친구들 언제 내려오지' 하고 있을 순 없는 것 같다. 곧 나도 잡혀 들어갈 예정이라면, 쳇바퀴와는 다른 멀고 먼 숲으로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혼자 또 훌쩍 화요일 오전 애써 푼 짐을 다시 싸고 제주도로 떠났다. 당시 내가 향한 곳은 서쪽 애월 부근 곽지해수욕장이었다. 지난 모녀 여행에 본거지였던 동쪽을 벗어나 한적한 에메랄드빛 해변이 곳곳에 있는 서쪽에 숙소를 잡는다. 그리고 늘 제주도 가면 하고 싶었던 '오름 투어'와 '제주 올레길 걷기'에 도전하기로 한다.
삼십 대가 되어 좋은 것은 진짜 나의 목소리와 마음에 귀 기울 수 있고, 혼자 의연하게 도전해볼 수 있다는 점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제주도에서 뭐하지' 고민의 끝도 결국 '나'였던 것 같다.
제주도에 가면 항상 하고 싶었던 게, 오름 투어랑 올레길 걷기였다.
사실 한라산 등반하거나 제주도 한 바퀴를 걷거나 자전거로 돌고도 싶었다.
그런데 준비할 게 참 많았다. 은근히 많았다. 그리고 난이도 '중'짜리 코스를 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해 오름 투어와 올레길 걷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하기로 마음먹고 나서는, 제일 걱정되는 것은 늘 그렇듯 혼자만의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이 될 것 같단 염려다.
혼자 산지도 10년이 거의 넘어가는 내게 있어서 고독과 외로움은 친구이면서도 한 편으로 지겨운 감정이기도 했다. 여행 중간 의미 없는 생각과 차분한 감정에 휩싸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예견되는 익숙한 감정과 그 감정에 휩싸여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이미 혼자 떠나왔고 그런 부수적인 감정과 시간들은 내가 이번 여행에서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일종의 기본요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 싶었던 거니까, 해보자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박 3일의 제주 홀로 여행은, 후회 없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제주도는 늘 갈 때마다 느끼는데 참 끝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행지다.
첫날은 일찍 비행기에서 내려, 숙소 근처 수제버거를 먹고 궷물오름으로 먼저 향했다.
택시를 타고 입구 같지도 않은 입구에 내렸을 때부터 싸했는데 실제로 차량이 진입하는 입구였다.
혼자 새 신발 더럽히는 진흙 스팟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올랐고, 아무도 없어서 크게 노래까지 불렀다.
그렇게 한 15분 올라가니까 욕이 절로 나오는 환상의 공간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환상의 공간은 사진으로 절대 담기지 않더라.
노루가 두 마리 있었다. 노루랑 나만 있었다.
산타클로스가 제주도 사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도록 트리형 나무가 울창하게 주변을 감쌌다.
초록의 숲 속에 인간이라곤 나만 있었다. 그래서 혼자 "야호"하고 크게 몇 번이고 외쳤다.
야호 크게 외치면서 여행 올까 말까 고민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렸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리고 바로 하산하여 다음 코스로 새별오름으로 떠나기로 한다. 걸어갈 거리는 아니라서 택시를 또 탔더니, 기사님이 곧 어두워질 거라 두 군데 못 간다고 하나만 갈 거면 금오름을 가라고 하셨다. 새별오름은 둥근 반달 모양의 능선에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초겨울에 억새가 유명하니 나중에 겨울 되면 오라고 하셨다. 결국 새별오름은 차 안에서만 구경하고, 이효리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금오름으로 향한다.
금오름 입구부터 정상까지 체감 90도 될 만큼 약간 가파르다. 조금 숨이 찼지만 일반 체력으로 무난하고 올라갈 코스였다. 택시 기사님이 '금오름은 올라가서 둥그렇게 돌면서 제주 동서남북 다 보세요. 산방산도 보이고, 아주 장관입니다'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그런데 다들 사진만 찍느라 정석 코스를 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날 산방산 쪽에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분도 봤는데, 너무 신기했다.
무서워 보였는데 해볼 만하다 싶었다.
그렇게 첫날, 여행 올까 말까 고민했던 나 스스로가 무색해지도록 행복한 오름 투어를 끝마쳤다.
물론 투어라기엔 고작 2군데 밖에 안 갔지만 택시기사님의 말씀처럼 나중을 위해 킵해두기로 한다.
둘째 날은 늦잠을 좀 잤다. 해변에서 오전 달리기도 못하고 점심때쯤에서야 숙소를 나왔다. 근처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두 번째 도전인 올레길 걷기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당초에는 송악산 갔다가-가파도까지 가는 일정이었는데 늦잠으로 인해 가파도는 빠르게 포기하기로 한다.
문제는 내가 있는 서쪽에서 남쪽, 올레길 초입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거리가 거의 택시로 한 시간이었다. 이미 두 번의 여행과 나를 위한 지나친 보상과 선물로 인해 슬슬 택시비가 아깝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날씨도 좋으니 선글라스도 챙겼겠다, 버스와 두 발로 올레길 초입까지 일단 가보자 싶었다.
버스를 타기 전 해변을 실컷 걸었다. 전혜향 생과일주스도 한 잔 마시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하염없이 걸었다. 에메랄드 푸른 바다가 장관처럼 펼쳐졌고, 날씨가 지독하게 좋아서 바다 표면이 반짝반짝거렸다.
약간 더워서 고생만 하다 오는 게 아닐까 고민도 좀 됐다. 중간중간 만나는 올레족들은 등산복 차림에 스틱도 하나씩 들고 모자도 쓰고 하던데, 청바지에 너무 대충 온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계획한 올레길 코스는 11코스-10-1코스 사이 한 20km 조금 넘는 구간이었다.
제주 올레족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코스가 10코스인데,
10코스 시작점은 너무 멀어서 11코스 중간부터 시작해 10-1코스 송악산까지 걸었다.
버스가 갈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간 다음 무작정 내려서 가장 가까운 올레길로 향했다.
올레길 깃발이랑 네이버 지도에 의지하여 시작한 20km 코스를 설명하자면,
걷는다는 건 역시 심심하다는 것,
다시 되돌아가고 싶을 땐 이미 걷는 건 외에는 선택지가 없이 외딴곳이라는 것,
왜 이게 올레길이지 싶을 때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나오거나 제주도의 숨은 장관을 보여준다는 것,
좀 무섭고 험하다 싶을 때는 꼭 새든 고양이든 다람쥐든 동물이 튀어나온다는 것,
여기는 포토스팟이다 하는 데에선 어떻게 찾아온 건지 갑자기 동년배 인스타그래머 두어 팀이 있다는 것,
오다가다 마주치는 올레족 모두 다 등산복장으로 하고 와서 나 혼자 길 잃은 관광객 같았다는 것,
동년배이면서 올레족이었던 팀은 오직 두 팀 이었는데 모두 다 커플이어서 묘하게 부러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올레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 했냐고 물으면, 솔직히 모르겠다.
평소 너무 자주 해서 머리에 크게 남지 않는 상념 들이었던 건지,
침착맨 원본 박물관 들으면서 그냥 아무 생각 안 했던 건지,
내가 왜 여기 온다고 해서 사서 고생이지 하며 후회했던 건지,
아무래도 등산복을 입고 왔어야 했고 등산복을 이번에 살까 고민했던 건지,
회사에 그만두길 참 잘했고 다음 회사 가서도 분명 잘할 거라 걱정은 안 되는데
애인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솔직히 이제 혼자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고
혼자 살게 되면 김숙 같이 살고 싶단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김숙처럼 살려면 돈도 잘 모으고 건강도 해야겠지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십 대에 왔더라면 분명 더 이상한 상념들로 시간을 보냈을 텐데 지금 이렇게 난 의젓하게
내 멋대로지만 자유롭고 나답게 살구 있구나 싶어서 혼자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 마지막엔 다리가 너무 아파서 악만 남았던 같기도 하다.
마지막 종착지인 송악산에 올라갈때는
등산로 반대방향으로 타고 올라가버려
어쩔 수 없이 걷다 뒤돌다 걷다 뒤돌다 반복하며 정상에 올라야 했는데,
그 길고 길었던 올레길의 마지막 종착지인 송악산 정상에 도착했을 땐 '정말 이거지' 싶게 끔 날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감동이 있었다.
바로 전망대에 다다르자 소나무 숲 사이로 펼쳐진 제주 시내가,
내가 하루 종일 걸어왔던 그 장소 그 길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올레길을 오는구나
진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상투적이지만, 이게 바로 인생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내가 걸었던 길이라서 그냥 그대로 장관인 것.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던 나는 알 수 있는 풍경 속의 작은 풍경들, 그 속에서 보낸 시간들까지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다.
노을 지는 풍경 속에 어우러지는 그 정상에서의 장면이 참 특별하고 눈물이 나도록 멋졌던 것 같다.
새로 산 신발이 다 더러워져서 숙소 가서 한 참을 빨아야 했지만,
온몸에 진이 다 빠지고 다시 되돌아가려고 탄 택시비가 거의 4만 원이 나와 헛웃음이 났지만,
다음날 서울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나를 채우려고 떠난 여행을 통해 배운 작지만 큰 교훈은 그랬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고, 비우려면 가장 나다운 짓을 무작정 하면 된다는 것.
특별한 2주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남들은 뭐했나' 아무리 찾아봐도 모두 거기서 거기더라. 할 수 있는게 많아보여도 진짜 즐겁고 쉼이 될만한 특별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 내가 어떤 쉼으로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별거 아니여도 괜찮다. 남들이 그게 쉬는거야? 의문을 품게해도 상관 없다. 내가 스치듯 하고 싶었던 거라면 뭐든지 괜찮은 것 같다.
서울에 도착해 나를 위한 기록이자, 나와 같이 쳇바퀴에 잠시 벗어나 짧은 휴가를 만끽하는 햄스터들을 위한 짧은 휴가 기록을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본다.
짧은 휴가, 거창하게 안보내도되는데
미뤄두었던 별거 아닌 도전을 해보면 좋은 것 같아요.
ps. 2주 간의 퇴사 일정표, 제주도…오롯이 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