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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Oct 02. 2023

어젯밤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복약안내서의 말 _008

     "OO님, 어젯밤에는 푹 잘 주무셨어요?"


     매일 환자분을 치료실에서 처음 뵙고 건네는 인사가 있습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문안인사 같은 이 질문도 그중 하나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는 "식사는 하셨어요?"와 함께 우리네 안부 인사의 기본이지만 딱히 구체적인 대답이 필요 없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정말로 '잘 잤는가'가 궁금하다는 점만 다릅니다.


     '잘 잤다'라고 대답하셔도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진짜냐, 누워서 잠들기까지 몇 분이나 걸렸냐, 중간에 깨지는 않았냐, 깼을 때는 왜 깼냐, 화장실에 갔냐, 시계를 봤냐, 잠들고 몇 시간쯤 지나서였냐, 다시 잠드는 건 문제는 없었냐, 그건 또 얼마나 걸렸냐, 꿈꿨냐, 기억나냐, 악몽이었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는 어렵지는 않았냐,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가볍냐, 등이나 어깨가 결리고 근육이 굳어있진 않냐, 혹시 자도 자도 또 졸리냐, 아무도 안 깨우면 한없이 잘 수 있는 건 아니냐, 몇 시간 정도 자고 나면 칼같이 잠에서 깨지는 않냐"... 고도 묻습니다. 대답에 파생되는 질문들도 이어집니다.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느라 베드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면 치료실 선생님들이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원장님, 예약 환자분들 뒤에 쭉 대기하고 계신데요..."




     수면과 같이 너무 기본적인 신체 기능은 오히려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숨을 어떻게 쉬지, 내가 걸음을 어떻게 걷더라, 같은 걸 보통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잘 우회하고 관리하는 바람에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단을 위해서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료할 때 저는 수면장애를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관찰합니다.


     1. 잠들기 어려운 입면의 장애

     2. 깊이 잠들지 못하는 숙면의 장애

     3. 중간에 깨버리면 다시 잠들기 어려운 재입면 장애

     4. 어느 정도 자고 나면 깨버리는 수면 유지의 장애

     5. 아침에 일어나기 어려운 조조각성장애


     [입면의 장애]

     '잘 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다 다르지만 보통 잘 잔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입면의 곤란이 없는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머리만 대면 잔다",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못 자고 그런 거 없다", "누우면 3분 내로 잠든다" 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지요. 그만큼 잠들지 못하는 것은 가장 전형적인 수면 장애입니다. 심하면 치료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자각하는 유형이기도 합니다.


     [숙면의 장애]

     그러나 누우면 바로 잠들긴 하는데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꾸 깨는 유형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주로 "아침인가 하고 눈떠보면 새벽 한 시고, 도로 잠들었는데 누가 화장실 가는 소리에 깨고, 밖에서 고양이가 울어서 깨고, 소변이 마려워서 깨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도 내가 잔 거 맞나 싶다"라고 말합니다. 긴 시간 누워는 있었는데 깊은 숙면으로 들어간 시간이 너무 짧아 수면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꿈을 많이 꾸고 선명하게 기억나거나 꿈꾸느라 피곤하다고 하시는 경우도 이 유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입면 장애] 

     자다 중간에 깨면 다시 잠들기가 무척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재입면 장애의 경우는 주로 숙면장애에 동반해서 옵니다. "자다 깨면 다시 자려고 누워도 도저히 잠들기 어렵다, 결국 포기하고 일어나서 새벽까지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하다가 새벽 네다섯 시에 겨우 깜박 한두 시간 더 잤다" 이런 워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면유지의 장애]

     재입면 장애와 비슷하긴 하지만 수면 유지의 장애는 보통 이런 표현을 합니다. "저는 몇 시에 자든 새벽 다섯 시면 깨요. 그 이상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요." 보통 이런 분들은 어쩌다 가끔 그러는 것이 아니라 평생 그랬다거나 원래 잠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면에 장애가 있다는 인지가 별로 없는 경우도 많고 주로 피로나 면역 저하 등 다른 문제로 치료하러 오셔서 발견합니다.


     [조조각성장애]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든 경우도 수면 장애의 일종으로 봅니다. 이분들은 '잠을 잘 자는 편이다'라는 문진 항목에 백이면 백 체크해서 오십니다. "누우면 기절해서 자고 출근 안 해도 되고 아무도 깨우지 않으면 계속 잘 수 있다", "분명 충분히 자고 깬 것 같지도 않은데 아침에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뻣뻣하다", "아침에 알람을 네다섯 번은 끄고 다시 잔다." 자각하지 못해도 숙면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지요. 


     수면의 질과 수면의 절대 시간을 확보하는 치료는 단지 수면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균형을 회복하는 치료이기 때문에 각각의 유형에는 걸맞은 치료의 방향들이 있습니다. 잘 자려고 노력하는 의지가 있다면 치료를 통해 나아질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어요. 




     수면 부족은 노화로 직결된다고들 말합니다. 여러 과학적인 근거들이 밝혀져 있지만 내분비 기능의 저하가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환자분들께는 복잡한 내용 대신 "아이들은 자면서 크고,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잖아요. 그게 다 자는 동안 호르몬 분비가 활발해서 그런 거거든요"라고 설명드리곤 합니다. 잠은 노화의 일시정지버튼입니다. 자지 않고 깨어있으면 그만큼 빠르게 늙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양질의 수면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면 단순히 피로만 쌓이는 게 아니라 신체 기능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영화 <인턴>에서 수면에 대해 연구하는 앤 해서웨이의 부모님이 스타트업 대표인 그녀에게 '잠을 푹 자지 않으면 비만이 될 확률이 높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잠을 푹 자지 못하면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는 내분비 균형도 깨어지고 대사 증후군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지 않고 깨어 있느라 배고픈 시간을 견디지 못해 야식을 먹게 되는 건 또 다른 국면입니다. 


     가끔 갱년기와는 거리가 먼 나이의 여자분이 오셔서 "제가 갱년기가 오려나 봐요!" 하고 흥분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 며칠 갑자기 막 열이 확 오르고 땀이 났다가 또 식으면 갑자기 춥고요.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해지고 온몸이 건조해요! 입도 바짝바짝 마르고요." 혹시 생리가 중단되었거나 불규칙해졌냐고 물어보면 그런 것은 아닌데, 더웠다 추웠다 하니 마치 갱년기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그럴 때 혹시 최근 잠이 부족했거나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냐고 꼭 여쭤봅니다. 일이 많아서, 걱정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여러 날 잠을 푹 자지 못한 날이 이어지면 여자분들은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인해 갱년기에 나타나야 할 증상들을 추체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계속 제대로 잠을 자지 않으면 '갱년기의 체험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꼭 말씀을 드리지요.




     '좋은 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잘 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의 없다'가 아니라 '아무도 없다'는 게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지요. 요즘 세상은 우리를 쉽게 잠들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실제로 환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수면장애는 아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잘 자려고 노력하는데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사람과 자는 시간을 아껴 일하거나 노느라 수면의 절대 시간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전자는 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수면 장애를 치료하면 거의 대부분 의미 있게 좋아지지만, 후자는 치료로만 좋아지기는 분명 어렵겠지요.


     올해 건강 분야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의 저자이기도 한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지난 2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개최한 '노인 건강 관리 정책 방향' 세미나에서 "지금의 3040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하고 더 빨리 늙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예언을 남겼습니다. 3040세대의 건강 악화 원인 중 하나로 배달 음식과 넷플릭스 등의 OTT로 인한 수면 부족을 꼽았고 직장 내 스트레스나 코인 등 주식 투기 플랫폼도 언급했습니다.*


     종일 일하느라, 혹은 아이를 돌보느라, 집안일을 마무리하느라 일과 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다가 모두 잠들고 나서야 내 시간이 생긴다고 느끼는 사람은 잠을 줄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밤에 자지 않고 할 수 있는 일과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요. 먹고 마시며 늦도록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느라 빠르게 늙어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환자들도 잠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되묻습니다.  "그럼 저의 스트레스는 언제 풀어야 할까요? ㅜㅜ" 


     이 질문에 의료인으로서 답하기 위해 고민했던 적도 많습니다. 분명한 건 실제로 현장에서 환자들에게 '그래도 일찍 주무세요'라고 말하는 건 공허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임상에서 늘 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핑계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병리를 느끼는 순간이 있지요. 수면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피로와 과로를 권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금이 그렇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아끼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여가, 일과 생활을 분리할 수 있는 여유, 아이 돌봄에 대한 지원, 스트레스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점점 빠르게 늙어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3040세대 노화 속도, 부모보다 더 빠르다" - MBN/2023.02.05/오서연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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