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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Sep 25. 2023

피곤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면.

복약안내서의 말 _007

     "쉬어도 쉬어도 피곤해요. 푹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 정도는 거뜬했는데 요즘은 못 버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라고 생각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그냥 계속 피곤합니다. 좋다는 걸 먹어도 별로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피곤해요"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말입니다. 만성피로는 한의사가 가장 많이 마주하는 주소증일 거예요. 피로는 흔한 만큼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고 대충 현대인의 기본탑재사양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피곤하다는 말보다 더 많이 듣는 말은 이겁니다. "세상에 안 피곤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보통의 피로는 잘 먹고 잘 자는 걸로 해소가 됩니다.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하루이틀 잠을 충분히 잤더니 피로가 좀 풀리더라, 그 정도가 건강한 사람의 피로입니다. 몸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놀라운 회복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잘 가동될 환경만 만들어주면 되지만 복구 시스템 자체가 고장 나면 아무리 잘 먹고 푹 자도 낫지 않지요. 관리로 나아지지 않는 피로는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소위 홍삼, 녹용, 심지어 영양제나 특정 건강기능식품을 먹는다고 모두의 피로가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성피로라는 주소증만 보고 모두 똑같은 한약을 처방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기가 막혔던 피로해소의 방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피로를 치료하기 위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환자는 왜 피로한가'를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피로에 대해 서양의학의 가장 가까운 진단명은 '만성피로증후군'입니다. 1994년 미국의 질병 통제 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다음 네 가지 상태일 때 진단할 수 있습니다.*

     ① 임상적으로 평가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피로가 6개월 이상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② 현재의 힘든 일 때문에 생긴 피로가 아니어야 합니다.

     ③ 휴식으로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야 합니다.

     ④ 직업, 교육, 사회, 개인 활동이 만성 피로가 나타나기 전보다 실질적으로 감소해야 합니다. 


위 증상 외에 다음 중 네 가지 이상의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됩니다. 

     ① 기억력 또는 집중력 장애

     ② 인후통

     ③ 경부 또는 액와부 림프선 압통

     ④ 근육통

     ⑤ 다발성 관절통

     ⑥ 새로운 두통

     ⑦ 잠을 자도 상쾌한 느낌이 없음

     ⑧ 운동 또는 힘든 일을 한 이후에 나타나는 심한 권태감


     2015년에 미국 의학협회(Institute of Medicine)는 이 장애의 새로운 명칭으로 '전신 활동 불내성 질환(SEID)'을 제안했습니다.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6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종종 심각합니다. 

        새롭거나 명확한 시작이 존재합니다(평생 그래왔던 상태가 아님). 

        지속적인 과도한 활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휴식에 의해 실질적으로 완화되지 않는 피로가 동반됩니다.

        직업적, 교육적, 사회적, 또는 개인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질병 이전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 상태입니다.

     ② 신체 활동을 한 후에 악화됩니다.

     ③ 수면의 질이 저하되어 있습니다.         


또 최소한 다음 중 하나 이상의 증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① 사고력에 장애가 발생합니다.

     ② 기립할 때 나타나고 누울 때 완화되는 현기증 또는 어지러움이 있습니다. 


     '어, 이거 내 얘기네' 하는 분들 아마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만성피로증후군에 대해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피로를 어떻게 다루고 계신가요? 




     피로는 한 가지로 귀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모두가 피곤하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각자가 느끼는 피로는 다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피로를 느끼는 순간도, 피로가 해소되는 순간도 다르고 만성피로가 시작된 시점이나 피로가 심해질 때의 패턴도 다 다릅니다. 그 차이에 따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결정되지요.


     피로를 호소하시는 분들과 상담할 때 제가 꼭 드리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1. 피로를 느낄 때 나타나는 증상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특히 피곤하다고 느끼신 이후에 전에 없던 증상이 나타나신 게 있나요?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아, 내가 피곤하구나'라고 생각하시나요?"

     "피곤할 때마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증상이 있으세요?"


2.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좋은 컨디션을 기준으로 현재 몇% 정도 충전된 상태인지 확인합니다.

     "제일 좋은 컨디션을 배터리 100%라고 생각한다면 요즘은 배터리 몇 % 정도 되세요?"

     "최근 한 달 사이에 가장 충전되었을 때 몇 %, 가장 떨어졌을 때 몇% 정도였는지 말해볼까요?"


3. 하루 중에 가장 피곤한 시간대가 언제인지 확인합니다.

     "하루를 기상 후 아침,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 오전, 점심 직후부터 퇴근 전까지 오후,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저녁으로 나눈다면 아침, 오전, 오후, 저녁 중 가장 피곤한 시간대가 있나요? 있다면 언제인가요?"

     "혹은 그런 구분 없이 종일 피곤이 지속된다고 느끼거나, 매일 피곤한 시간대가 달라지나요?"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은 내 체질의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습니다. 유전이나 가족력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세팅된 비교적 튼튼한 부분과 다소 약한 부분의 조합이 있는데 피곤하거나 체력이 떨어질 때 이 부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최고의 컨디션일 때보다 오히려 최악의 컨디션일 때 어디에서 탈이 나는가가 나의 체질에서 가장 뚜렷한 부분입니다. 건강한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피곤의 모양은 사람 수만큼 다양합니다. 


     두 번째 질문의 답은 나의 에너지 탱크의 크기나 소진되는 속도를 시사합니다.

     체질에 따라 갖고 태어난 에너지 탱크의 크기는 다 다릅니다. 운동선수처럼 타고난 탱크의 크기를 단련해서 더 키운 사람과 저질체력에 운동부족으로 작은 탱크가 더 작아진 사람의 피로는 강도도 양상도 다릅니다. 에너지 탱크의 크기가 작으면 쉽게 채워지고 쉽게 고갈되기 때문에 배터리가 70~80%였다가 갑자기 20% 이하로 방전되곤 합니다. 반대로 탱크가 크다고 해서 피로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체력을 과신하고 마구 써버린 사람이 피곤을 느낄 때에는 오히려 예비전력까지 탕진되어 버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의 답은 피로의 가장 흔한 원인이 미치는 영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회복되었다가도 저녁에 집에 가서 씻지도 못하고 뻗어버린다는 사람은 따박따박 에너지가 소진되어 나타나는 가장 정직한 체력소모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 거의 사경을 헤매다 오후가 되어야 점점 정신이 들고 저녁에 반짝 깬다는 사람은 혈압이 낮거나 몸이 차고 심장 기능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의외로 오전이나 오후가 가장 피곤하다는 사람도 많은데 점심 식사 후 오후 3~4시에 가장 피곤한 경우는 소화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 식후 혼곤한 식곤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에는 먹는 게 에너지로 잘 만들어지지 않아 기운이 점점 떨어지는 문제까지 겹쳐 옵니다. 오전에 피로가 가장 심한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 직후에 느끼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원인을 파악하지요. 에너지의 수요보다 공급이 달리는 것의 문제인지, 에너지가 쓸데없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는 건 아닌지, 수면을 통해 몸이 충전되지 못한 채로 굴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몸의 긴장이 높아 에너지 소진이 지나치게 빠르게 이루어지는 건 아닌지 단계마다 확인해야 가장 효율적인 치료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적인 치료에서 가장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대한 상당히 세분화된 진단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족하다는 의미의 '허증(虛證)' 안에도 기허, 혈허, 양허, 음허 등 뭐가 부족한 지에 따라 다른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진행합니다. 허해진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보강해 넣어 치료하는 방식은 만성피로의 회복에 있어서 한의학의 대체불가한 지점이지요. 신체의 문제뿐 아니라 우울, 불안, 번아웃증후군과 같은 정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진단과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피곤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당신, 충전해도 금방 방전되어 버리는 낡은 배터리를 갖고 있진 않은가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감질나는 휴식에 지친 주말의 끝에 한 번쯤 나의 피로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 : 만성피로증후군

**MSD매뉴얼 : 만성피로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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