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약안내서의 말 _009
당연한 소리겠지만 한의사도 병원에 갑니다. 건강검진할 때, 크게 다치거나 수술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일상적으로는 대체로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웬만하면 갈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리 큰일이 아니어도 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지요. 지난 금요일이 제게 그런 날이었습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약 상담이 열 건 이상으로 휘몰아쳤던 목요일, 저녁이 되자 목이 칼칼해져 오길래 오늘 말을 많이 하긴 했구나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금요일 아침이 되자 바로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하네요. 원래도 편도가 크고 잘 붓는 체질이라 체력이 떨어지면 바로 편도염부터 감기가 시작되는데 딱 조짐이 그렇더군요. 상비약으로 지어둔 편도염용 한약을 초기에 집중적으로 먹으면 잘 가라앉는 편인데 그날은 저녁이 되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겁니다. 토요일은 저 혼자 진료하는 날인데 예약은 시간당 최대 인원으로 마감되었고 한의사는 생각보다 말하는 직업입니다. 더는 피할 데가 없습니다. 망설임 없이 이비인후과로 향했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좋은 이비인후과 선생님이 계십니다. 제 기준 좋은 의사 선생님은 다정하고(제일 중요합니다) 환자의 증상뿐 아니라 상황도 함께 살펴서 약을 처방해 주시며 한편으로 약을 줄이거나 끊어야 할 때를 명확히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선생님, 저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근데 내일 말을 많이 할 예정이에요..."
"허허, 치료하면 좋아지긴 할 텐데 말을 많이 하면 또 나빠져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요."
평소에는 약을 처방해 주시면서도 좀 나아지면 이 약, 이 약은 빼고 먹으라고 말씀해 주시곤 하는 분인데 받아 든 처방전을 보니 줄 수 있는 모든 처방이 다 들어있습니다. 항생제, 스테로이드, 해열진통제, 진해거담제, 항히스타민제, 혹시나 소화가 안될까 봐 소화기궤양치료제, 위보호제에 처방용 가글까지. "내가 너를 말하게 하리라!" 그런 의지가 느껴집니다. 짧은 시간 안에 증상을 가라앉히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부족할 때가 있다는 걸 알기에 망설임 없이 저 많은 약을 한 번에 삼킵니다. 일 년 치 먹을 양약을 한 번에 다 먹는 느낌이네요.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좀 맹구 같긴 하지만 목소리가 나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진료를 마칠 수 있게 도와주신 이비인후과 선생님과 항생제, 스테로이드... 이하 등등의 약들에게 이 영광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심한 증상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양약의 최대 강점입니다. 한약이 감기 치료에 경쟁력을 가지는 이유는 진통제보다 진통효과가 더 빨라서도 아니고, 스테로이드보다 염증을 더 빠르게 가라앉혀서도 아닙니다. 효과가 빠른 감기 치료 한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강점은 몸이 스스로 나아지게 만들만한 환경을 조성해서 감기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도록 북돋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호전을 지속가능하게 하지요.
감기 치료에 있어 한약은 양약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계에서 각기 작용하는 느낌이 가깝습니다. 증상을 일으키는 프로세스가 0에서부터 10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0이 건강한 상태이고 1이 바이러스의 침입이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나타난 증상의 9와 10을 날려버리는 것이 양약입니다. 그에 비해 한약은 대체로 4나 5, 6 단계 정도에 작용하는 느낌입니다. 드러난 증상도 고려하지만 대체로는 바이러스가 침입한 사람의 몸 상태를 반영하여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건강한 사람이 약도 잘 받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얘깁니다. 기침, 콧물, 가래와 같이 드러난 증상을 잡아둔 동안 건강한 몸은 스스로 면역 반응을 통해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대증 치료를 통해 삶의 질을 유지하며 스스로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개념에 가깝지요. 하지만 이미 기력이 떨어졌거나, 몸이 차거나, 진이 빠져버린 사람은 그럴 만한 힘(면역력)이 없어서 먹을 때는 낫지만 항생제를 끊으면 또 염증이 올라오고 진통제를 끊으면 또 통증이 시작됩니다. 9와 10을 눌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겠지요.
스스로 나아질 힘이 없는 사람들은 가장 심한 증상이 물러간 후에도 남아있는 증상이 길게 지속되거나 낫는 듯하다가 여차하면 재발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어 스스로 땀을 내기 하면 나아집니다. 체력을 보충해서도 낫는 사람도 있고 체액을 보충해서도 낫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케이스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1. 항생제를 끊으면 바로 염증이 다시 시작되는 8세 A 어린이
A 어린이는 올해 초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하여 입원 치료한 이후 항생제를 지속적으로 복용하여도 계속 부비동염과 축농증이 재발하는 증상으로 치료를 시작하였습니다. 폐렴이 나아질 때까지 4주 이상 연속하여 항생제를 복용하였고 이후로 낫는 듯 해 항생제를 중단하면 최대 2주 안에 어김없이 다시 콧물과 가래를 동반한 염증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항생제를 복용하며 몇 차례나 항생제를 바꾸어 보기도 하였지만 중단하면 바로 염증이 악화되는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지요.
항생제는 염증이 심할 때 반드시 복용하여야 하는 약이지만 수개월 이상 반복해서 항생제를 투여하여도 효과가 없었다면 더 이상 균을 죽이는 것만으로 염증을 잡을 수 없다는 가설을 세워야 합니다. 항생제와 기타 동반한 약들을 꾸준히 복용하며 소화기능이 많이 떨어진 탓에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면 이 부분을 개선해야 지속되는 염증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소화기능을 회복하고 면역력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도록 보강하는 치료가 병행되는 것이 좋습니다.
#2. 지난여름 코로나에 걸린 이후로 두 달 이상 마른기침이 지속되는 67세 B 여성
B 여성은 코로나에 처음 걸린 후 당시 증상은 약간의 인후통과 몸살 등이 있었으나 일주일 내로 나아졌는데 오히려 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 시작된 마른기침이 이후로 두 달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래와 같은 분비물도 나오지 않고 목 안에 뭔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 느껴지며 특히 야간에 한번 기침이 나면 끝나지 않고 발작적으로 지속되어 밤잠을 계속해서 설치게 되었습니다.
중년 이후에 흔히 발생하는 감기 이후 지속되는 마른기침은 한의학에서 '음허'라고 진단하는 전형적인 상태입니다. 감기로 인한 염증과 발열을 겪으면서 절대 건조해지면 안 되는 호흡기관들이 건조해지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진단입니다. 폐와 호흡기는 이물질이 조금만 들어와도 바로 반응하는 가장 민감한 기관이기 때문에 항상 점막에서 분비되는 점액으로 보호받아야 하는데 폐의 진액이 말라 들어가면서 아주 작은 자극에도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원인입니다. 증상은 알레르기 천식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천식 치료까지 가지 않아도 호흡기 점막에 진액을 공급하는 치료 만으로 나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조금만 춥거나 피곤해도 금방 오한과 몸살이 도는 29세 C 여성
환절기에 아침에 조금만 찬 바람을 쐬거나 한여름에 에어컨 밑에 잠시만 있어도 바로 코가 맹맹, 목이 칼칼해지면서 특히 으슬으슬하고 몸살기가 도는 것이 C 여성의 가장 특징적인 감기 증상입니다. 피로회복제처럼 종합감기약을 쟁여놓고 피곤한 날 어김없이 오한과 몸살이 와서 감기약을 먹고 자곤 합니다. 몸살은 손가락 끝이 아리거나 피부가 옥신옥신 아프고 두통이 동반되거나 체력이 큰 폭으로 떨어집니다. 평소 손발이 매우 찬 편이고 배가 차다고 말할 때도 많습니다.
양약에는 없고 한약에는 있는 특징 중 하나가 약에 한열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한약재는 성질이 뜨거운지 따뜻한지 서늘한지 차가운지 그냥 평범한지가 정의되어 있고 각 성질은 인체에 들어가서 작용하는 기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한약이 관점으로 감기에 쓰이는 양약을 바라보면 죄다 차가운 성질의 약들 뿐입니다. 실제로 열을 내리는 해열진통제는 물론 항생제나 항히스타민제 등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들도 마찬가지지요. 단기간의 급성 염증은 빠르게 잡지만 몸이 찬 사람이 너무 오래 먹으면 몸이 더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C 여성은 몸의 온도가 낮고 말초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주 몸살감기에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 상태가 이어진다면 적극적으로 체온을 올리려는 시도를 통해 개선될 수 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한약뿐 아니라 운동이나 체중의 증가 등도 도움이 될 수 있지요.
우리나라가 감기에 항생제를 가장 많이 처방하는 나라라는 얘기도 있었지요. 저는 그것이 너무 바쁜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일상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속도에 발맞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저부터도 당장 내일 일을 해야 하는데 충분히 쉬면서 회복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니까요. 우리 동네에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소아과 선생님도 계신데 그분은 저희 아이의 감기에 맨 처음 방문에 항생제를 처방해 주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최소한의 약으로 치료해보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말씀을 꼭 하시지요.
감기는 흔하지만 코로나 이후 더는 하찮거나 가볍게만 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증상은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호소이고 감기에 걸리고 낫는 과정은 내 면역력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아예 안 걸릴 수는 없겠지만 너무 자주 걸리거나, 한번 걸리면 끝을 볼 정도로 심각해지거나, 지지부진 낫지 않고 질질 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내 몸의 무너진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땐 삶의 질을 유지하는 빠르고 강력한 약도, 천천히 체질을 개선하고 면역력을 보강하는 약도 필요하지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모두 부디 감기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