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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Oct 17. 2023

열받는다고 다 화병은 아니지만.

복약안내서의 말 _010

     살다 보면 열받는 날이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 회사의 부당한 처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내 인생은 답이 없는 것만 같아 속 터지고, 온갖 포털을 뒤덮은 범죄와 비리를 지켜볼 때 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지 분노가 치밀지요. 열받는 일이 없었던 날을 찾는 게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고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으니까요(feat. 이수정교수님). 


제 내면의 염세주의자가 좋아하는 짤입니다


     스트레스는 도처에 깔려 있고 피할 수 없습니다. 지뢰를 잘못 밟는 것처럼 불운해서 스트레스에 처하는 게 아니라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에는 많든 적든 스트레스의 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길은 더더욱 없지요.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다면 그저 견디는 것입니다. 웬만큼 잡아당기고 눌러도 원래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힘을 갖춘 탄탄한 스프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압박을 주는 대로 튕겨내는 사람이 있고, 받은 즉시 다른 통로로 배출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오는 대로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고, 차곡차곡 쌓아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방식은 내가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진행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격이라고 말하고, 한의사인 저는 그것까지 포함해 체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의 우리에게 친숙한 마음의 병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감기만큼이나 흔해진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수면장애, 번아웃증후군 그리고 화병 같은 이름들이지요.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다 우울증은 아니고 열받는다고 다 화병은 아니지만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스스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휘어버린 마음이 버티지 못할 때가 온다면 진단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내 몸과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무너지는지는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방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감정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한 다정함, 차가운 냉정함, 뜨거운 환희, 서늘한 공포처럼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문화 안에서는 감정의 온도를 직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특히 더 강렬하고 뚜렷한 경우가 많은데, '우울'과 '불안'이 온도가 낮은 쪽에 속한다면 반대쪽에는 '화'와 '분노'처럼 뜨거운 감정도 있습니다. 감정에는 벡터도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가 하는 특성인데, 비슷하게 낮은 온도에 속하는 우울과 불안도 벡터는 서로 다릅니다. 우울이 땅을 파고 들어가 끊임없이 침잠하는 쪽이라면 불안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방으로 흔들리는 상태에 가깝지요. 

 

     '화가 난다'와 '열받는다'는 감정의 온도를 가장 명쾌하게 드러내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화가 날 때 실제로 우리의 몸은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지며 머리에 열이 확 몰리게 되거든요. 흥분된 상태의 몸은 빠르게 혈액 순환을 돌리고 호흡을 늘리며 뇌를 활성화해 이 상태를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관련된 기관들에 혈류를 몰아주어야 하고, 그 결과로 가슴과 머리에 혈액이 집중되어 실제로 열이 발새해 '화(火)가 나고' '열(熱)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 상태는 아주 짧은 순간만 유지되고 부교감신경과의 조절을 통해 금세 내려가 진정이 됩니다. 다만 그렇게 잘 되지 않고 스트레스 상태가 반복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었다면 가슴과 머리에 열이 몰리는 상태가 자꾸 만들어집니다. 흉곽에 압력이 높아지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두근거리며 가슴 중앙에서 불이 나는 듯 열감을 느끼게 되지요. 머리가 뜨거워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혀가 맵거나 갈라지고 입안에 열감이 느껴지면서 혓바늘이나 구내염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자율신경의 조절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에 한의학은 이 상태의 원인과 결과를 귀납적으로 고찰하여 '화병(火病)'을 진단했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감정상태도 스스로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드러나지요. 똑같이 화가 많아도 밖으로 이 감정을 적극적으로 분출하거나 해소했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누적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속으로 아주 심한 스트레스를 쌓아둔 사람 중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더없이 '사람 좋은 사람', '화낼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타인에게 표출하지 못해 더 내부에 쌓이게 된 것이지요. 겉으로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속으로 더 심하게 쌓이게 되는 셈입니다. 화병과 분노조절장애는 '조절이 되지 않는 화'라는 점에서 본질은 비슷하지만 배출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둔 경우가 화병이라면 무절제하게 마구 분출되는 백터를 가질 때 분노조절장애가 되겠지요. 




     정서의 문제와 신체의 문제는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감정의 온도와 벡터가 통제되지 않고 폭주할 때의 반응도 결국 몸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몸의 문제의 일부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향정신성의약품들이 뇌의 작용에 직접 관여해서 증상을 조절한다면 한의학은 몸의 불균형을 조절하여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때에 내 몸이 어떤 방식으로 스트레스에 저항하고 있는가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뜨겁게 흘러넘치는 열은 집중된 체액을 줄이고 몸의 다른 곳으로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순환시켜 식혀줍니다. 차갑게 식고 가라앉아 마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상태는 기운을 북돋우고 활력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도무지 한 점에 머무르지 못하고 요동치는 불안정함은 잔뜩 긴장되어 떨리는 상태와 같아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하게 하면서 자율신경의 균형이 스스로 조절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치료합니다. 꽉 막혀서 소통되지 않는다면 체액이든 혈액이든 소화든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갈 수 있게 뚫어서 소통시키는 방식으로 풀어줍니다. 이 모든 조절이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약해져 있다면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치료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진짜 심각한 질병으로 진단받기 전의 단계에서도 유효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내 몸이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먼저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소화가 안되는지, 잠들기가 어려운지, 머리가 아픈지,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리는지, 혹은 배가 아프면서 설사가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손발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손발바닥에 땀이 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의 병처럼 마음의 병도 내 체질의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옵니다. 체질은 타고난 것이라 바꿀 수 없지만  내 어디가 취약한 지점인지 미리 파악해 두면 균형이 무너졌을 때 대처하기도 쉽습니다. 아래의 질문들을 통해 자가진단을 해볼까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나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해 볼까요. 여기에서 스트레스는 단지 정서적이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측면도 포함합니다. 몸에 누적된 긴장, 피로, 무리하거나 과로했을 때도 떠올려봅시다.


▷   몸의 온도가 올라간다면

- 얼굴이나 머리가 뜨거워지고 두피에 열감이 느껴집니다.

- 눈이 빠질 것 같이 건조합니다.

- 잠들기가 어렵고 자다 깨면 다시 잠드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답답해 한숨을 몰아쉬게 됩니다. 

-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올라옵니다. 가슴 중앙에 작열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 생리할 때도 아닌데 부정출혈이 관찰되거나 생리 주기가 빨라집니다.


▷   몸의 온도가 내려간다면

- 배가 차가워지거나, 스르르 아프면서 설사가 나곤 합니다. 

- 손발이 차가워지고 손과 발에 땀이 나기도 합니다.

- 위경련처럼 명치 아래가 몹시 아프고 장이 꼬이는 듯합니다. 

- 배란이 늦어지고 생리 주기기 길어집니다. 심하면 한 달 건너뛰기도 합니다. 

- 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곤 합니다.

-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오한과 몸살이 쉽게 찾아옵니다. 눈가나 입가의 근육이 떨리기도 합니다.


 ▷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평소 나의 반응은 다음 세 가지 중 어느 쪽에 가깝나요?

1. 우울

- 음적이고 정적인 상태

- 땅굴을 파고 들어간다. 무기력해지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누워있고만 싶다.

2. 불안 

- 안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상태

- 가슴이 두근거린다. 뇌가 계속 가동되어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된다.

3. 분노

- 동적이고 양적인 상태

- 화를 분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누구에게라도 퍼부어대고 싶은 생각이 들거나 실제로 그렇게 한다. 머리로 열이 뻗치는 것 같다. 화가 해소되지 않아 끝없이 짜증이 올라온다.


     주로 몸의 온도가 올라가는 사람이라면 상기된 상태를 가라앉혀주는 방향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생활에서도 호흡과 명상, 요가와 같이 정적인 운동, 양질의 수면이 필요합니다. 온도가 내려가는 사람이라면 심부체온을 자꾸 올려주고 기력을 회복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영양가 높은 식사, 몸을 따뜻하게 하는 습관, 숨이 차고 땀이 나는 유산소운동이 도움이 됩니다. 어느 방향이든 도움이 되는 것이 몸을 움직여 긴장을 풀어주는 운동, 그리고 충분한 수면을 통해 자율신경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반응은 체질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감정을 객관화하여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아직 스스로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단계까지 간 것이 아니라면 스트레스의 요인과 전혀 무관한 다른 관심사로 스위치를 전환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현재의 상태와 반대되는 벡터를 가진 활동으로 정서적인 치우침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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