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약안내서의 말 _011
오래전의 일입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선배가 '가고 싶은 강연이 있는데 혼자 가기 싫다'며 굳이 저를 끌고 간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의료인의 방송진출'을 테마로 한 토크콘서트였습니다. 별로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펄쩍 뛸 만큼 무서운 게 방송이라 내내 '나는 누구인가 여긴 또 어디인가' 모드로 멍 때리고 있었지요. 거의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는데 그 와중에 패널 중 한 명이었던 어느 방송작가가 건강 프로그램의 속성에 대해 강조했던 말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방송은 새롭고 흥미로워야 돼요. 사실에 크게 위배되지만 않으면 이제까지는 언급된 적 없는 어떤 새로운 것, 영양제든 식재료든 운동법이든 새로운 게 방송의 소재가 됩니다. 뻔한 얘기로는 안 돼요. 화제가 될 만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게 중요합니다."
햇병아리 한의사지만 저에게 그 말이 주는 위화감은 컸습니다. 어, 저 작가가 하는 건강 프로 우리 엄마도 열심히 보는 건데. 건강에 관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해야 할 때 제일 중요한 기준이 새롭고 흥미롭다는 것뿐이어도 될까. 효과가 충분히 검증된 모두가 알고 있는 치료의 접근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엄마는 저 방송에 나온 내용이 제일 효과적이고 중요해서가 아니라 제일 새로워서라는 사실을 아실까. 시청률을 목표로 (혹은 광고주의 입김으로) 간택된 어떤 소재의 학문적인 근거를 만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전문가로서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시절에는 방송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개인방송인 유튜브와 SNS로 옮겨왔지만 시청률이 조회수가 되었을 뿐 화제성으로 움직이는 대원칙만은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관심사가 관심사인지라 피드에 뜬 건강정보들을 어김없이 클릭해 보게 되는데 깔끔한 이미지와 솔깃한 꿀팁으로 정리된 게시물들 사이에서 표류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느 분야든 요즘 뜨는 것은 핫하고 새로운 방식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기에 더 효과적일 것 같아 매력적입니다. 차근차근 지켜야 하는 지루한 방식보다 화제가 되고 나아가서 돈이 되지요. 그렇게 개발된 꿀팁을 좀 안다고 해서 뭐 손해 날 건 없는 정도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건강에 관해서는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창 고혈압과 당뇨 환자를 많이 보았던 어느 시기에 뵈었던 한 60대 중반의 여자분이 기억납니다.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그분이 가방에서 두 번 접은 종이를 꺼내 제게 건넸습니다.
"저기, 제가 요즘 이런 걸 먹고 있어요. 뭘 더 먹어야 할 게 있을까요?"
"아, 드시고 계신 약 목록을 적어오셨어요? 잘하셨어요. 제가 한 번 볼게요."
종이를 펴니 거진 스무 가지에 가까운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의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시니어 종합비타민에 비타민C, 비타민D와 칼슘복합제제, 오메가 3, 오메가 6, 루테인, 달맞이꽃종자유, 글루코사민, 폴리페놀, 코엔자임큐텐, 프로바이오틱스, 그걸로 모자라 밀크시슬, 화애락, 꾸지뽕나무 열매, 돼지감자즙, 강황가루...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환자분은 잠시 기다리시더니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요새 관절에 보스웰리아가 좋다던데... 그것도 먹으면 좋을까요?"
보기만 해도 부대끼는 목록을 보고 있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습니다. 더 막막했던 것은 그분이 스스로 건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진료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건강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정보를 수집해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가를 목도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정말 꿀팁이었을 수도 있는 어떤 정보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 수많은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각종 야채를 갈아먹는 것이 디톡스에 좋다고 해서 매일 아침 2인분의 생야채 주스를 만들어 아내와 나누어 마셨던 남성의 경우 본인의 몸은 가벼워졌지만 저체중에 몸이 극도로 차가웠던 아내분은 내내 설사에 시달렸습니다. 물을 2리터 이상 마시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수개월 간 물 2리터 이상 마셨는데 오히려 몸이 무겁고 붓는다는 30대 여성, 걷기 예찬을 따라 매일 만보 이상 걷다가 무릎 관절에 무리가 온 과체중의 중년의 여성까지. 앞서와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건강을 관리했기에 오히려 더 힘들어진 경우이지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건 로버트 풀검의 유명한 에세이 제목이지만 사실 건강에 관해서도 진짜 중요한 조언은 온통 뻔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지루하고 당연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은 말들을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모자라지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본을 지키자는 얘기를 '하나마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요. 실제로 한 친구가 제게 '왜 의사들은 다 뻔한 얘기만 해?'라고 답답하다는 듯이 물어본 적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언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충분한 수면,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기, 먹고 나면 30분 내에 3분 동안 하루 세 번 양치질하기, 외출하고 돌아와서 손 씻기 같은 것들은 농담이나 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유치원에 다닐 때 다 배운 것들이니까요.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잠들고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특히 생리불순이나 배란장애를 겪는 환자들에게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생활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몸은 리듬을 좋아해서 일주기의 규칙성을 깨는 것이 몸의 내분비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율신경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기'도 초딩한테 엄마가 하는 잔소리 느낌의 워딩 때문에 무시당하기 일쑤인데, 사실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골고루 먹는 식사만 갖춰진다면 대부분의 영양소는 따로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영양소는 영양제를 통해 섭취하는 것보다 훨씬 질이 좋고 흡수가 잘 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싼 천연 성분의 수입 영양제라 해도 다르지 않지요.
사실 영양제의 효용에 관한 공방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갈립니다. 지난 7월에는 미국심장협회를 비롯해 6개 단체가 혈관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오메가 3가 실제로는 효과가 없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발표해 기도 했지요. 효용이 있다는 결과와 없다는 결과가 동시에 존재해 그보다 더 중요한 당뇨의 치료나 생활방식의 개선을 더 우선하여 관리하는 것을 권고한다고 설명했습니다.
美 6개 의학단체 "오메가 3, 심혈관 질환 예방 효과 없다"
간혹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질문 중 하나로 '꿀팁'을 요청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먹으면 좋은 영양제, 건강기능식품들, 특별한 생활습관, 구체적인 운동 같은 것들을 말해주면 귀가 확 뜨이고 이슈는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기본을 지키는 것과 핵심에 다가서는 전문적인 치료에 비하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미미한 정도의 영향력에 불과합니다. 건강 관리는 기본을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의외로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기본을 지키지 못해 생긴 빈자리는 결코 꿀팁으로 메울 수 없지요.
기본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몸의 전체적인 증상들을 유기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건기식 과잉의 전형이었던 60대 여성만 해도 그 수많은 리스트 중에 이유 없이 복용하게 된 것은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증상 하나에 영양제 하나, 질환 하나에 건기식 하나를 연결해서 하나 둘 시작된 것이 쌓였을 것이고, 정확한 효과는 모르겠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정도의 기대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불편한 증상이 많았던 분이기도 했겠지요.
슬금슬금 '몸에 좋다는 것'을 늘려가기 전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았어야 합니다. 하나하나 개별적인 증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혈압이나 당뇨에 관한 치료, 체중의 증가 혹은 감소에 관한 치료, 갱년기 이후 노화로 인한 증후군과 같은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았다면 불편한 증상의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중구난방으로 드러난 증상은 드러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문제들을 하나의 진단에 꿰어 구슬 서 말을 보배로 만들 수 있는 '관점'이 부재한다면 건강을 위한 관리가 오히려 재난이 되는 셈입니다. 한의학에는 몸 전체를 서로 연결된 우주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증상을 관통하는 병리를 찾아내려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 관점이야말로 한의사의 가장 큰 무기지요.
저도 실제로 환자를 볼 때 건강 관리의 꿀팁을 활용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의 증상이 체질과 생활상, 과거력과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발생하는지 파악한 환자라면 치료를 통해 충분히 몸을 나아지게 한 후에 이후에도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게 하고자 할 때 요점정리된 꿀팁은 유용합니다. 느리고 정적인 운동이 맞는지 짧은 시간이라도 격하게 숨이 찬 운동을 해야 하는지, 생강과 파, 마늘 같은 매운 채소를 더 챙겨 먹어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 물을 많이 마셔야 할 사람인지 과하면 무리가 될 사람인지, 지금과 같은 식습관이라면 어떤 영양제를 보충해 주는 게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지 알려드릴 수 있지요.
재벌가 회장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치의가 필요합니다. 병원을 찾아가는 것보다 몇 번의 클릭이나 잠깐의 스크롤이 훨씬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몸은 대충 편하게 때우기에는 너무 중요하니까요! 꿀팁에 현혹되지 않고 기본을 잡아줄 수 있는 주치의는 멀리 있는 대학병원의 유명한 교수님보다 가깝고 자주 찾아갈 수 있는 1차 의료기관에서 찾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동네의 수많은 의원과 한의원을 둘러보신 후 마음에 드는 분을 정하고 그분께 꾸준히 가서 나의 몸 상태를 살피도록 하고 치료도 받고 궁금한 것도 수시로 물어보세요. 물론 그분은 본인이 여러분의 주치의인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만, 뭐 어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