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약안내서의 말 _012
증언 _001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대한 피로가 제 몸을 짓눌렀어요. 잠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느낌? 한여름 아스팔트 위의 껌처럼 몸이 침대에 들러붙는 느낌? 땅 속으로 물렁하게 꺼져버릴 것 같은 느낌?? 출근을 못할 것 같아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이달에는 미리 연차를 내고 쉬려고요."
증언 _002
"사실 별 일 아니었거든요. 평소 같았으면 좀 맘에 안 들어도 넘어갔을 문제인데 갑자기 남자 친구한테 너무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속에서 뭔가 막 치밀어 올라서 왁 다 쏟아내지 않으면 눈물이 대신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인데, 당황을 넘어 황당했어요. '나 분노조절 장애인가?' 싶고 화는 나는데 화를 내는 제가 이해가 안 되고.. 저 평소에 정말 그러지 않거든요. 결혼 준비 하는 내내 남자친구랑 너무 싸워서 파혼할 뻔했어요."
증언 _003
"갑자기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버럭하고 화를 내게 될 때가 있어요. 어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지, 돌아보면 어김없이 그날이 다가오는 거죠. 괜히 애들한테 화풀이를 했다 싶어 밤에는 자괴감이 너무 심해요."
증언 _004
"제가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잔뜩 사 오는 날이면 남편은 '아, 쟤가 오늘 스트레스 많이 받았구나' 하고 생각했대요. 근데 사실 편의점에 간 날은 어김없이 그 시기예요. 평소 먹지도 않는 달고 짠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서 먹어치우고 나면 당연히 소화가 안되죠. 내가 왜 몸에도 안 좋은 걸 이렇게 잔뜩 먹었나 후회되는데, 하루 지나면 다음날 또 사 와요. 미치겠어요."
증언 _005
"출근해서 멀쩡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빛 번지듯 흐려지더니 구역감이 몰려와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어요. 세상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도 힘들었지만 계속 구토가 지속되어 결국 조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만 여섯 번은 더 토한 것 같아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재난'이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팬데믹을 겪은 지난 수년 사이 달갑진 않지만 익숙해진 단어이기도 하지요. 위 증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어떤 재난이 한 사람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 재난의 이름은 '생리 전'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월경전증후군(PMS)' 또는 '월경전불쾌장애(PMDD)'라고도 하지요.
월경전증후군(Premenstrual Syndrome: PMS)은 배란기 이후부터 생리 전까지 일어나는 여러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심한 우울감과 신경과민 등을 동반하는 심각한 증상을 특히 월경전불쾌장애(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 PMDD)라고 하지요. 월경전증후군을 겪는 사람의 비율은 누군가는 여성의 30~50%라고 하고 또 다른 자료에서는 여성의 70~80% 라고도 합니다. 정확히 누가 얼마큼 겪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지요.
생리통은 초경 이후로 줄곧 있는 경우도 많지만 월경 전증후군은 가장 높은 유병률을 보이는 연령대가 30대입니다. 어렸을 때는 멀쩡했던 사람이 직장생활 혹은 육아노동을 시작하고 난 후 어느 시점에 갑자기 생리 전에 몰아치는 증상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지요. 처음 증상을 자각하는 시기가 마침 스트레스가 늘고 피로가 쌓인 때일 확률이 높다 보니 누구나 겪는 만성피로나 평범한 스트레스의 누적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질환은 방치된 채 점점 제 몸을 불리고 커져 어느 날 어엿한 재난이 되어 우리를 덮칩니다.
조직의 일원으로 관계 속에서 제 역할을 다 해야 하는 어떤 순간에 갑자기 떨어지는 체력과 불현듯 몰려오는 우울감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문제는 이 일이 매달, 일정 기간 동안 반복된다는 겁니다. 컨디션의 조절과 같은 자기 관리도 능력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아프거나 기력이 없고 예민해지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깝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심각한 질환이 있는 사람처럼 극심한 두통과 구토, 어지럼증, 실신 같은 증상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고, 증상은 있는데 검사에서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는 거지요.
이 재난에 휘말리면 삶의 질은 크게 무너지고 일에서의 성취는 저하되며 관계가 나빠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치는 가장 위험한 불운은 이 병이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위축되도록 만든다는 겁니다. 보통 월경전증후군을 치료하러 오시는 분들은 공통적으로 자책의 정서를 갖고 계십니다. '내가 성격이 이상한가' 혹은 '내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심지어 '내가 꾀병인가 싶어요'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한의사가 되고 나서 여성 질환의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월경전증후군입니다. 제가 일단 중증의 PMS를 경험했고 무척 아프고 불편했는데도 치료의 대상이라 인지하지 못한 채 마치 제 성격인 양 인지하고 살아온 세월도 길었거든요. 저에게 '삶의 질'이라는 키워드의 소중함을 알려준 질환이기도 합니다. 한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한 달에 절반을 앓으면서 살았으리라 생각하면 머리끝이 쭈뼛 섭니다. 그것만 해도 한의사가 된 본전은 이미 찾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월경전증후군은 이름이 붙여진 지 오래되지 않은 질환입니다. 어느 시대에는 여성의 어떤 열등한 특징인 것처럼 폄하되기도 했고 최근까지도 '생리 중이야? 왜 이렇게 예민해?'와 같은 밈으로 소비되었지요. 그래서 처음 이 질환을 사람들에게 알릴 때에는 그저 나의 증상에 의료계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 이 증상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병식을 갖는다는 것이 모든 치료의 시작이고 같은 병을 앓는 존재는 언제나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오랜 기간 임상에서 환자들을 만나면서 오늘날의 PMS는 단지 몸이 좀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업무 능력을 떨어뜨리고 성격을 바꾸며 인간관계를 망치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중증의 월경전증후군, 월경전불쾌장애로 인해 치료를 요하는 환자들은 끊임없이 많고 그들이 겪는 재난의 증언은 그저 그런 수준을 넘어섭니다. 끝났나 싶으면 또 밀려오는 재앙은 언제 끝날 지 장담할 수 없어 더 무섭습니다. 완경은 아직 멀었고 생리는 일 년에 열두 번씩 찾아오니까요.
월경전증후군은 증상의 특성으로 진단되는 것이 아니라 주기와 반복성이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에 반대로 나타나는 증상은 몹시 다양합니다. 그 말인즉슨 이 시기의 변화는 우리 몸이 갖고 있는 갖가지 취약한 부분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어 노출시키면서 나타납니다. 생리 전 호르몬의 영향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에 노출되어 있고 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환경오염으로 내분비의 균형이 무너져서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기 때문에 PMS의 영향이 증폭된 것이리라는 가설을 세워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재난을 홀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생리를 하지만 누구에게나 PMS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같은 증상을 절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 때문에도 그렇지만 잠깐이 아니라 너무 길고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쉽게 이 증상을 호소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지만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도 큽니다. 말해봤자 뭐 대책이 있을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지요.
월경전증후군이라는 재난은 일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서 재앙과 사람의 힘이 개입하는 인재(人災)의 요소가 뒤섞여 있습니다. 생리 전 체내 분비가 늘어나는 여성 호르몬에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전적인 특징을 갖고 태어난 것은 천재지변과도 같아서 노력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피로와 체력저하, 누적된 몸의 긴장, 순환의 장애, 냉증과 같은 요인들은 관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증상이 두드러지는가에 따라 치료의 접근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PMS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핵심적인 병리는 아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우선 이 세 가지를 해소하는 것만으로 상당히 증상의 중증도가 줄어드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증상은 어디에 속하는가요?
1. 수독(水毒) : 체액의 정체
배란 후 황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은 몸속에 수분을 붙잡아두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몸속에 쓸데없는 수분이 고이고 정체되어 문제를 일으킵니다. 물은 몸 어디에나 돌아다니기 때문에 문제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종
원래도 잘 붓지만 이 시기에 특히 더 붓습니다. 부위와 무관하게 전신의 무종을 일으키며 뭄이 무거운 피로로 연결되는 초기 증상이 됩니다. 하체가 붓는 경우 관절의 통증을 유발하고 근육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체중증가
이 시기만 되면 실제로 체중이 늡니다. 식욕이 증가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체중이 늘었다가 생리가 시작되면서 해소됩니다. 보통 2~3kg 차이는 일반적인 수준이고 심한 경우 생리 전과 후가 5kg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체중의 변화는 다이어트로 접근해서는 잘 해소되지 않습니다.
피로감
'몸이 무겁다'라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역할을 하지 않는 체액이 몸속에 남아 물주머니를 진 듯 무겁고 쉽게 피로해집니다. 물에 젖은 솜, 땅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 어깨에 늘어진 피로곰 등으로 표현되곤 하지요.
변비와 복부팽만
몸속에 수분을 붙잡아두기 위해 장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또 흡수해서 변이 굳고 단단해지거나 잘 나가지 않게 됩니다. 생리 전 변비는 복부 팽만감으로 연결되고('임산부처럼 배가 나와요') 변을 배출하려고 장이 경련하면서 생리통 같은 하복통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생리 전부터 생리통이 심해요'). 변비로 인한 하복통은 배변을 보고 나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 냉증(冷證) : 심부체온의 저하
몸이 차고 순환이 잘 안 되는 상태입니다. 호르몬의 전달은 모두 혈액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가 호르몬의 전달이 원활한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는 상태는 혈관을 막는 어혈과 만나면 병리적인 효과가 증폭됩니다. 자궁내막이 울혈 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혈류 흐름이 부족해지면서 증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두통
생리 전 두통은 가장 흔한 PMS 증상 중 하나입니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혈관운동성의 장애가 생기면서 악화되는데 특히 편두통은 몸이 차고 냉증이 심한 경우에 더 악화되기 쉽습니다.
소화장애 및 오심, 구역, 구토
위와 장은 몸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동하는 기관이고 혈액으로부터 산소와 양분이 공급도 압도적으로 많이 요구됩니다. 생리 전 호르몬의 영향으로 위장의 운동이 약간 정체되는 경우는 흔하지만 몸이 차고 혈액의 순환과 공급이 활발하지 않은 경우 이 증상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심하면 수액의 공급을 요할 정도로 크게 기능이 떨어집니다.
어지럼증
빈혈이나 저혈압이 평소에 없더라도 이 시기에 기립성 현훈이 있는 경우는 흔하고, 경우에 따라 미주신경성 현훈이나 미주신경성 실신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로 몸에 혈액이 부족하거나 혈액 성분의 질이 떨어져 있거나 혈액순환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몸이 찬 경우에 흔한 증상입니다.
3. 기울(氣鬱) : 스트레스로 누적된 긴장
스트레스로 긴장이 쌓이는 기전은 외부 자극으로부터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온몸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태가 굳어진 것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위기상황에 목과 어깨가 굳는 것이 소중한 뇌와 머리를 보호하려는 몸의 본능인 것처럼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긴장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단지 근육만 굳는 게 아니라 호흡, 체온조절, 혈관의 운동 등이 모두 경직되기 쉽고 자율신경의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이 상태는 호르몬의 자극에 상당히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기복
월경전불쾌장애에서 나타나는 우울, 불안, 신경과민은 월경과 무관하게 신경정신과적으로 진단된 질환의 증상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차이는 단지 월경 전에 두드러졌던 증상이 월경이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는 것뿐입니다. 월경과 더불어 소실된다고 해서 중증도를 저평가해서는 안되며 평소의 스트레스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몸이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되어 있을수록 증상은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요.
식욕증가
식욕이 폭발하고 단 것, 짠 것, 자극적인 것을 찾는 증상은 소화장애보다 스트레스 상태와 관련이 깊습니다.
수면장애
자도 자도 잠이 쏟아지는 수면과다와 좀처럼 잠들기 어렵고 쉽게 깨는 수면불량 패턴이 모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몸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자율신경의 균형이 깨어진 대표적인 증상이고 잠을 자지 못하면 스트레스에 점점 더 취약해져서 더 잠을 못 자게 되는 악순환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혹시 지금 생리 전 PMS라는 재난에 휩쓸리고 있다면 나만의 재난대책본부를 세우 조사에 착수하세요. 원인이 파악되었다면 관리에 돌입합니다. 수독의 정체는 몸속에 정체된 수분을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스스로 배출시키는 과정에서 개선될 수 있기 때문에 땀을 흘리거나 배변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것만으로 나아지기도 합니다. 냉증은 몸의 안팎을 따뜻하게 하는 관리로 나아질 수 있고 기울은 단기간이라도 양질의 수면과 규칙적인 생활을 처방하여 몸을 이완하고 긴장을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관리로 부족하다면 치료를 받으세요. 진단이 있다는 것은 치료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재난이 나의 의지대로 닥친 게 아니듯이 우리가 매달 아픈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홀로 개인의 문제로 감당하지 말고 더 큰 목소리로 공유하면 더 빨리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바로 지금, PMS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