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윤일상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에 강선우 국회의원과 타투이스트 유니온을 만든 도이 님이 출연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한국에선 타투(문신)가 “불법의료시술”이라고 하여 처벌의 대상이다. 도이 님은 주변의 타투이스트들이 예술가로서 여린 심성을 지니고 있는데 불법으로 신고당해 경찰서에 불려가는 것만으로도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현실때문에 타투이스트 유니온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인장인 윤일상 또한 뮤지션들의 권리를 위해 유니온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며, “내 권리는 내가 찾지 않으면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난 그 말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내 권리‘만’ 찾기 위해 싸우는 시대는 지났고, 너와 나의 권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를 비롯하여 여리다거나, 예민하다거나, 민감하다거나 하는 말을 듣는 영혼들은 대체로 여리다기보다 더 꼼꼼하고 사려깊어서 남에게 손내밀 순간도, 나를 돌볼 계기도, 동시에 도움을 요청할 용기를 가질 사건도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런 이들이 살기엔 세상이 너무 이차원적이어서, 반원으로 된 스펙트럼 위에 각자의 점을 찍어 자신의 위치(입장)를 알리기에도 인생이 짧은 경우가 많다. 우리는 얼마나 이차원적으로 모든 것을 갈라치는가? 심지어 그 반원의 스펙트럼조차 피자 한 판의 반 조각 밖에 되지 않으며, 세계의 실상이라는 것은 그 동그란 스펙트럼들이 우수수 떨어져 소나기처럼 멋진 소리를 내며 일상에 스며드는 동태적인 시공인데 말이다.
마음이 여리고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 세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늘상 힘을 주고 살아간다. 다만, 힘을 주는 포인트가 잘못된 경우가 많아 자신과 타인을 다치게들 한다.
노래를 위한 발성의 기본 메카니즘은 들숨과 날숨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들이쉰 숨이 횡격막을 부풀려 내장을 누르면 내복근을 사용하여 복압으로 내장과 횡격막을 밀어올려 날숨을 만든다. 그 날숨은 성대를 ‘지나가며’ 진동을 만들고, 그 때 발생하는 것이 우리가 귀로 듣는 소리다.
하지만 발성을 배우지 않으면 대부분 소리를 목으로 낸다고 알게 마련이어서, 목에 힘을 주게 된다.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을 어떤 특정 사상이나 종교 등에 두면 목을 조여 소리를 내려는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성대가 상하고 얼마 못 가 성대가 망가져버리는 것처럼, 삶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영혼을 팔아제낀 “열렬한 투사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들숨과 날숨의 포인트는 복부, 내복근이다. 좀 더 신비학/철학적으로 말하면 ‘단전’이다. 삶으로 치면 일상이다. 우리가 집중하고 힘을 주어 조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곳이다. 일상으로부터 뽑아져나오는 말이어야 하고, 소리여야 하고, 예술이어야 하고, 투쟁이어야 하고, 저항이어야 한다.
노래를 배우다보면 ‘목에 힘을 빼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목에 힘을 빼는 게 아니라 목에 줄 힘을 내복근에 주는 거다. 그럼 목은 흐물흐물해지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호흡이 지나가며 성대를 진동시켜 소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대는 아주 기민하게 반응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목에 ‘조임’이 아닌 ‘긴장’이 필요하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창조하는 모든 사상과 신념과 예술작품은 목에 가해지는 긴장이다. 이게 없으면 어떤 소리(아웃풋)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적당히 긴장한 목은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저기 쉽게 돌려볼 수 있는 상태다. 내 입장과 신념과는 같은 듯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부딪치고 화해하고 연대하는 작업은 이렇게 가능해지며, 진정한 변혁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를 처음 읽은 건 한창 열심히 신학을 하던 때였다. 그때의 나는 기독교 안에서 저항과 반역의 이유와 에너지를 찾고 싶었다. 그 때의 내 목은 저항과 반역을 부르짖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스며들어 호흡의 시작점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다시 이 책이 생각났다. 더 이상 기독교에서만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새로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책을 정리하며 팔아버린 터에 절판이라 일단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한 번 다시 읽어보고 마음에 와닿으면 헌책으로라도 비싼값에라도 다시 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