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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위 Apr 05. 2024

아빠의 철제 사무책상

 80~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꼭 등장하는 물건 하나가 있다. 공공기관, 회사, 경찰서와 사채업자 사무실까지. 어느 곳이든 철제 사무책상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흔히 볼 수 없지만 나는 그 철제 사무책상을 정말 좋아한다.


 요즘 책상들은 가볍고 날씬하며 세련된 라인을 가졌다. 디자인 선택지도 다양하다. 반면 내가 좋아하는 옛날 철제 사무책상은 네모나고 통통하며 투박하다. 옅은 아이보리 혹은 초록이 스며든 그레이가 대부분으로 빛바랜 사진 속 이미지 같다. 손에 닿은 철제는 차갑고, 오래된 서랍은 시끄럽다. 어떻게 썼는가에 따라 수명과 상태가 천지차이다. 조용히 쓰면 조용하고 시끄럽게 쓰면 시끄러운 책상. 사용자에 맞춰 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게 커다란 생물 같아서 재밌는 책상이다.


 철제 사무책상을 생각하면 나의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따라 들어온다. 90년대 초반.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초록색 작은 군인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한창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불렀다. 아빠에게 심부름을 다녀오라며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쥐어 주셨다.

 


"야야. 니 누구 찾아왔나?"

"예... 김ㅇㅇ씨요."


 그 시절 아빠는 시골 군청의 공무원이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젊은 아저씨 한분이 누굴 찾아왔냐고 물어봐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혼이 났을 것이다. 젊은 아저씨는 나를 김계장님에게 데려다주셨다. 사무실 안쪽 창가 앞에 아빠가 보였는데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야! 네가 ㅇㅇ이가?"

"김계장님 아들이에요? 와 많이 컸네."

"일로와바라. 이거 받아라"


 아빠는 다른 아저씨와 아줌마, 젊은 누나까지 모두에게 나를 인사시켜 주었다. 다들 반가워해 주셔서 좋았는데, 과자 사 먹으라며 용돈을 쥐어주신 분은 특별히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던 것 같다. 그때 다른 높은 아저씨가 김계장을 찾았고, 아빠는 서류 하나를 챙기며 여기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아빠의 책상 앞에 놓인 푹신한 검은 가죽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책상 상판에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들이 붙어 있고, 책꽂이에는 알 수 없는 책자와 서류가 가득 꽂혀 있었다. 열쇠 구멍이 달려있는 가운데 서랍을 열자 펜과 사무도구들이 나왔는데, 아버지는 그때도 참 정리정돈을 잘하셨다. 내 다리 양옆으로도 서랍은 3개씩이 더 있었는데 하나하나 열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빠가 웃으며 돌아왔다. 나는 아빠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려고 아빠에게 인사를 하는데, 창 너머로 들어온 햇볕이 아빠와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아빠의 철제 사무책장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 책상을 가져야지 생각했었다. 그 후로 나의 동경은 시작되었고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철제 사무책상을 좋아하고 있다. 지금이야 그때 내가 멋있어했던 건 책상에 앉아 있는 커다란 아빠의 모습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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