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May 09. 2020

[케빈에 대하여 (2011)]

《We Need to Talk About Kevin》 결핍의 파괴력이란

닭이 먼저냐 아니면 달걀이 먼저냐? 성선설인가, 성악설인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선 안된다지만 몇 가지는 그렇게 한정지어서 보게 한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도 그렇게 화두를 던졌다. 준비되지 않은 엄마는 엄마가 될 수 있는가? 아이가 잘못되었다면 과연 아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교육시켜서일까. 소설 원작 기반의 린 램지 감독 작품,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 movie.naver.com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여행가 에바 (틸타 스윈튼)은 프랭클린 (존 C. 라일리)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이를 갖게 된다. 아이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을 위해 첫 아이, 케빈 (에즈라 밀러, 아역 제스퍼 뉴웰)가 태어난다.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서일까, 에바는 케빈을 다루기가 어려웠고 본인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키우기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인다. 그래서인지 케빈은 에바를 향해 적대적으로 대했고 에바는 신경질적으로 변해 케빈의 팔을 부러뜨리기도 한다.

 에바는 이런 케빈과의 관계를 프랭클린에게 이야기하지만 프랭클린은 심드렁한 반응. 그러다가 동생 실리아 (애슐리 게라시모비치)가 태어나고 에바는 케빈 보다 실리아에게 애정을 쏟기 시작한다. 케빈이 아픈 날, 에바는 케빈을 보살피며 관계가 회복되나 싶었지만 그 다음날 바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붕괴된 관계를 증명한다. 


 이어 케빈은 실비아를 괴롭히면서 에바의 적개심을 산다. 하다못해 케빈은 실비아의 애완동물이었던 기니피그를 몰래 죽이고 실비아의 한쪽 눈을 실명시킨다. 이에 에바는 프랭클린에게 케빈이 한 짓이라고 말하지만 물증이 없었던 탓일까, 프랭클린은 이해 대신 이혼을 택한다.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버린 케빈은 결국 법정 성인 연령인 16세가 되기 전 프랭클린과 실비아, 그리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대량 살해한 후 체포된다. 에바가 읽어준 로빈 후드에서 영감을 받은, 프랭클린이 사준 그 큰 활과 화살로 아이들과 아버지, 그리고 동생까지 모두 살인한다. 미리 자물쇠를 여러 개 사둔 계획적 범죄였다. 아들의 범죄로 인해 지옥 같은 삶에 빠진 에바는 아들에게 묻는다. 


 - 왜 그랬니?

 -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케빈이 대학살을 범하기 전과 범한 후의 에바. 가족들과 함께였던 에바와 혼자 남은 에바. 혼자 남은 에바는 연쇄살인범의 엄마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무시당하고 심지어 맞기도 한다. 테러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에바는 케빈의 방을 정리하고, 케빈을 보러 간다. 케빈을 안아주기도 하고 오감이 교차되어 교도소를 빠져나간다.


 다시 돌아와, 서론에 언급한 이분법적 논란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과연 케빈은 선천적 사이코패스인가, 후천적 사이코패스인가. 태어날 때부터 악한가, 잘못된 가정교육이 악하게 만든 건가. 국내 논문인 「정신병질적 성격에 대한 정신분석적 연구 :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박문현, 2015)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동의 반사회적 행동은 자신이 치료받기 위해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하는 희망을 의미한다. … 하지만 케빈이 성장하는 동안 유치원에서나 학교에서 여러 차례 드러난 병리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에바와 프랭클린은 어떠한 치료적 시도도 하지 않는데…'


 논문 저자는 에바의 방치와 프랭클린이 울타리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게 케빈의 무자아 결함을 일으켰고 대량살인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에바와 프랭클린이 부모로서 부족했던 것이 살인자를 낳은 것이다. 에바는 임신을 거부했던 자세와 아이를 낳게 되면서 무너지는 본인의 자아가 케빈에게 영향을 미쳤고, 프랭클린은 에바가 육아에 힘겨워할 때 에바와 케빈을 모두 자유롭게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서 에바와 케빈에게 모두 악역향이 되었다.


 다른 의견으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꿈의 해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를 케빈이 갖고 있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린아이가 반대 성을 지닌 부모를 독차지하려 하면서도 반대 성의 부모를 경쟁상대로 보며 증오하는 증후군을 말한다. 케빈이 아팠을 때 돌봐주는 에바를 향해 애정을 드러내는 반면 에바와의 시간을 방해한 프랭클린에게는 냉소적으로 대하는 장면에서 그런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에바만을 살려둔 것도 어쩌면 에바를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그녀의 사랑을 프랭클린과 실비아가 가져가면서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를 살인하면서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에바는 사건 이후로 케빈만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오이디푸스 승리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다.

 첫 번째 저자는 후천적인 요인이라고 말하고, 두 번째 이론에 따르면 선천적이다. 어떤 이유로든 설명 가능하다는 것은 어쩌면 둘 다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결론이 나와버렸다.


 부모로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게 아이의 애정 결핍 혹은 불안 장애로 이어진다는 몇몇 심리학서를 읽어봤다. 우리는 결핍의 파괴력을 보고 체험하고 공포를 느낀다. 부모로서의 결핍은 곧 아이의 결핍이 되고 대물림되는 불행에 사회에는 악영향으로 이어진다. 끔찍이도 사랑하지 못할 거면 끔찍한 일만 일어날 터이니. 우리는 케빈만큼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한다. 결코 모성애, 또는 부성애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에바고 프랭클린이 되지 않도록. 

이전 01화 [파수꾼 (20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