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ak Night》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파수꾼(把守-)은 ①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말과 ② 어떤 일을 한눈팔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윤성현 감독과 박정민 배우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한 소년의 아버지 (조성하)는 아들 기태 (이제훈)의 자살로 인해 공허함을 느낀다. 기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정리하던 중 마주친 사진 속의 세 소년. 동윤 (서준영)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고 희준 (박정민)은 전학을 떠났다. 묘한 낌새를 알아챈 아버지는 동윤과 희준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이야기는 현재의 장면과 과거의 회상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희준을 만나게 되면서 희준은 기태의 주변인들을 찾게 되었고 어렵사리 동윤과도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에게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만 회상된다.
줄거리를 풀어놓기 어려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학교의 왕처럼 군림하던 기태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동윤과 고등학교 같은 반 희준이랑 가장 잘 어울려 다닌다.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 답게 장난을 빙자한 거친 몸싸움과 말들을 주고받지만 그러면서도 폐철도에서 던지고 놀려고 공을 애타게 찾는 등 끈끈한 우정을 나눈다.
어느 날, 세정 (이초희)의 친구들과 놀러 가자는 기태의 꼬임에 동윤과 희준이 같이 여행을 가게 되고 기태는 희준이 좋아하는 보경이와 잘 되기를 바랐지만 보경은 기태에게 고백하면서, 그리고 이걸 희준이 알게 되면서 감정의 대립선이 생기기 시작한다. 관계에 있어 희준은 열등감을 갖게 되었고 기태는 희준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섭섭함을 느낀다.
희준과 기태는 계속 엇나갔고 기태는 그런 희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감을 주는 구타를 행사한다. 더 이상 참지 못했던 희준은 전학을 간다며 기태에게 역시 모욕감을 주는 말을 던진다. 이를 중재하려던 동윤도 기태와의 마찰을 빚고 기태는 그런 동윤에게 좋아하는 세정을 굴욕을 주는 말을 내뱉는다.
그 말을 곱씹던 동윤, 그리고 세정은 기태에게 그 말을 듣게 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사태가 일어난 후 동윤은 분노해 기태와 부닥친다. 기태는 동윤과 사과하기 위해 찾아가지만 동윤은 기태에게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기태는 동윤의 회상에만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동윤은 기태를 주목해주지 못해 미안함을 회상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미성숙으로 인한 파국을 그려낸다. 미성숙한 세 명의 학생은 관계의 파국 이후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은 본인의 감정이 어떤지도, 어떻게 상처를 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서 맴돌다가 깨어져버렸다. 기태가 우선시했던, 희준이 부러워했던, 마지막까지 동윤이 연기하고 싶었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지키지 못했다. 파수꾼은 파수꾼'들'이지 못했다.
《사냥의 시간 (2020)》으로 돌아온 윤성현 감독은 디스토피아를 앵글에 담아내는데 능한 감독이다. 신작과는 달리 《파수꾼》은 세 명의 디스토피아를 담아냈다.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 역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면서도 필시 내가 저 영화 속 어느 캐릭터겠거니, 하며 이입해서 볼 수 있었다.
이입하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면 바로 감정의 폭발씬이다. 이제훈, 박정민, 서준영 이 세 명의 퍼포먼스는 가히 최고다. 이제훈은 이 작품으로 충무로의 호평을 받으며 각종 상을 수상했고 박정민은 씬의 진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면을 압도하는 배우의 눈빛 연기를 보고 싶다면 《파수꾼》을 찾으면 된다.
- 야, 내가 애들 앞에서 허세 부려서 좋은 줄 아냐.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없으니까…
엔딩씬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장면이 된다. 앞의 내용들에 주목하지 못했다면 공감하지 못할 동윤의 감정과 기태의 말들. 기태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단지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부재와 무관심한 아버지, 그 사이에서 결핍된 기태는 본인에게 없었던 것들을 친구들로부터 찾는다. 방법은 서툴 수밖에, 애정을 주고받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해 본 적도 없기에. 그렇지만 기태는 잘못된 것을 알아채기 어려웠고 알아챌 때 즈음, 파국에 도달했을 때다.
파국에서 모든 잘못을 본인이라고 말하는 친구들 - 정말 옆에서 지켜주고 봐줄 거라고 생각했던 -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결핍이 결핍을 낳았기에, 어쩌면 친구들이 아버지한테 말하지 못했던 이유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르게 된 과정에 동참했으니.
많은 작품들이 비교되고 스쳐 지나갔지만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올랐다. 무언가 결핍된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결국 모두에게 버려진다. 원하는 방법으로 의도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잘못됨을 알려주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늦었다는 것에 어울리지 않은 나이의 소년들이지만 늦었다. 그게 지키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우리들은 어디선가 일그러진 인물들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하고 때로는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미화된 기억들은 같이 일그러질 때, 불쾌한 순간들은 그 순간에서 벗어날 때 마주치게 된다. 불쾌해지기 전에 기태는 본인 스스로 손을 본 것이다. 그렇기에 영웅으로 맞이하게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