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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Nov 25. 2024

방랑

그렇게 방랑을 시작했다.

교정에는 누렇게 색이 든 포플러 잎사귀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연단에 오른 스물네 살의 젊은 교사 이광수는 이제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는 말을 마지막 말로 학생들에게 남겼다. 사 년째 이 학교의 조회 시간마다 연단에 올랐던 그는 가슴에 무겁게 쌓았던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숨김없이 쏟곤 하였다. 이제 떠난다고 말할 때 그의 눈에 눈물이 흘렀고 느껴 함께 우는 학생도 있었다. 1913년 10월 3일 늦은 가을날의 평양 오산학교. 여름 한 철 멋쟁이 신사들이 즐겨 쓰는 맥고모자를 여태 벗지 못한 그는 몸에 흰옷을 입은 채 겨우 압록강 국경을 넘을만한 돈이 든 지갑 하나만 지녔다. 짐가방 하나 들린 것 없는 그의 행색으로만 보면 대동강 바람이나 쐬러 나서는 차림이었다. 눈물을 참지 못한 그는 교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정거장을 향해 달음치고 있었다. 품 안에 자식들을 두고 떠나 쫓겨나는 어미의 심정이 이럴까. 발자국에 피가 고인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두고 이른 말일까. 

   

“지금 나는 떠나오.” 아내에게도 차마 말할 용기가 없어서 별다른 말도 않고 집을 나섰던 그가 방랑길을 떠났다. 강제 병합의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그 시절에 방랑자가 되어 정한 곳 없이 떠도는 길을 떠나는 사람이 그만은 아니었다. 흰옷 한 벌에 삼 껍질로 삼은 미투리 차림뿐이었지만 얼굴마다 비장한 듯한 서러움이 서렸고 마음은 울분으로 강개한 그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압록강 건너 동쪽땅 서간도와 남만주 땅 수천 리에 달하는 우리 단군의 옛 강토를 지나 아직 일본 순검 아귀가 덜 미친 북만주나 더 멀리 시베리아로 떠났다. 이 무렵에  신의주역을 지난 안동(지금은 단동)에만도 해질 북새 무렵이면 왕조의 가혹한 정치를 피해, 또 나라가 망한 뒤에는 뜻있는 선비들이 방랑 망명자들이 되어 되돌아가지 않고 수 천 명씩 더미 구름으로 넘실거렸다. 그 무렵 조선 땅에는 의로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이들이 남아나 있을까? 할 만큼 뜻을 품은 많은 이들이 쑥 내음 짙은 고려 땅을 뒤로 두고 줄곧 오랑캐 땅이라 부르던 산수 간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광수도 그랬다. 그도 누가 어디를 무엇하러 가는지 묻는다면 꼭, 바로 집어 대답할 말이야 없었다. 하지만 지금 뜻을 분명히 세워 망명의 길을 잡은 것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심중에 무슨 분명한 목적이 있는 듯한 것도 그들과 비슷했다. 반일 투쟁을 이끌던 서울의 거두들이 강제 병합 전에 이미 무리를 이끌고 망명한 뒤로 그런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은 무슨 영광의 길인 것으로 생각되던 시절. 그때 고려 땅에서 그것은 하나의 시대사조 같은 것이었다. 이제 강물이 떠미는 대로 흐르는 떨어진 잎사귀 처지가 된 이광수는 서리 맞은 누런 들국화 몇 송이 더러 남아있는 압록강 벌판을 넘어 만주 땅으로, 또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로 떠돌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맑은 바람과 안개만 먹고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스물네 살 흉중에 비장한 감회가 없을 리 없었으니 일생 처음 압록강을 지나는 감회에 또 굵은 눈물을 뿌렸다. 국경을 넘은 그날 해거름 참은 지난밤에 무서리를 친 탓인지 들국화가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에 새로 선 철교를 건너 도착한 중국의 첫 국경은 안동이다. 철로 지어진 다리라니. 평양에서 안동까지 4백 리 길이었다. 청인 객잔에 머무르니 중국 상인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정신이 사나웠다. 조선에서는 장터에서도 들을 수 없는 큰 소란이었다. 얇게 깎아 바닥을 깐 박석을 부딪는 말발굽 소리도 귀에 설게 떨어졌다. 중국의 박석은 조선의 것과 달라 네모반듯하게 잘라놓았다. 나라를 잃고 떠난 그에게는 그런 것마저도 불안하게 했다. 그러던 그는 문득 자유를 느끼었다. 집 모퉁이를 돌아 흐르는 실개천이며 마르고 두 볼이 움쑥 들어가 궁상이 낀 어머니며, 마당에 서서 달과 별을 바라보던 쇠한 초가집…. 차마 놓지 못할 것들을 조선 땅에 모두 내려두었고, 그를 둘러친 학교에서 겪은 갈등과 애정 없는 아내를 볼 때마다 깨송깨송 얽히는 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역의 객창 첫날밤에 그는 깊은 고적함도 느꼈다. 자유에 가장 가까운 말은 고독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일찍 해가 떨어진 이국의 객창은 평양보다 훨씬 추웠다. 벌써 흰 두루마기에 물든 때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내가 있었다면 갈아입혔을 터다. 밥값을 치르고 나니 주머니에는 겨우 일원 칠십 전이 남았다. 이제 떠날 멀고 오랜 방랑자의 밑천은 이것이 다였다. 그는 안동을 떠나 봉천을 거쳐 걸어서 북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밥을 얻어먹어가며 베트남을 거쳐 미얀마, 태국을 지나 인도를 두루 돌 것이다. 그런 다음 지금의 이란, 이라크의 땅인 페르시아를 지나 터키를 통과해 이집트에서 에티오피아로 꺾어 아프리카 남쪽 땅끝 케이프타운의 희망봉까지 다다르겠노라 셈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생이 다 저물지도 모를 일일지라도 그것은 스물넷 조선 청년의 오랜 꿈이었다. 풍랑 센 거친 강물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에 몸을 실어 흘러가는 쓸쓸한 방랑길. 이광수는 그렇게 서백리아 방랑을 떠났다.


*맥고모자麥藁帽子. 넓은 챙으로 신사들이 직사광을 가리는 용도로 쓰는 여름 모자. 미국에서 유행한 패션 스타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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