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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타이거 Oct 09. 2023

나이가 든다는 것

탈모, 노안, 흑자의 침공

처음 간 미장원에서 머리를 이상하게 잘랐을 때, 이마 한복판에 빨간 뾰루지가 났을 때, 불편한 인간과의 식사자리에서, 배달음식을 기다리는 순간에 시간은 참으로 더디 간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 인생의 시간은 너무 빨라서 현기증에 멀미가 날 정도다.

몇 년 후면 앞자리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가 나이를 이렇게나 많이 먹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느껴본 감정일 것이다.


그저 나이와 짬으로만 형님 행세 하려는 사람들한테 강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수직적인 선배 문화가 싫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형, 선배, 상사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엔 늘 동생, 후배, 후임들 뿐이었다. 

내가 먼저 쉽게 다가갔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너무도 편하고 쉬운 일이었다.

늘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젊게 사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분위기가 좀 달라진 걸 느꼈다.

소위 MZ 무리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발견된 건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들도 나를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온종일 난 혼자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생기는 저녁 약속 때문에 고민했었지만 이제 내 칼렌다는 휑하게 비어있다.    


예전엔 말만 하면 빵빵 터졌는데 이젠 토크의 흐름이 너무 빨라 타이밍을 잡기조차 어렵다.

설령 타이밍이 맞았지만 이전만큼 타율이 좋지 않다.

다른 차들은 슝슝 잘 달리는데 내 차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다.

난 변한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전처럼 후배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한지 알 수가 없다.




나이가 주는 무게감과 어려움이 확실히 있다.

점점 넓어지는 이마와 주름, 흑자로 물든 피부.

노안과 굽은 어깨, 늘 피곤함에 찌든 생기 없는 모습.

오버핏 티셔츠와 통 넓은 청바지로 커버해보려고 해 봐도 역부족이다.

누가 봐도 그냥 딱 아저씨일 뿐이다.

하얀 피부와 마른 체형에 동안이라 스스로 자부하며 동네 아저씨같이 푸근해진 또래 친구들을  안쓰러워했다.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해 왔지만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올해 갑자기 주름과 기미, 흑자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 할머니 얼굴에서 봤던, 일명 저승꽃이라고 불리는 검버섯이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 영화에서처럼 저승사자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흔적을 잘못 남겼다고 믿고 싶었다.

인생을 절반밖에 안 살았는데 벌써 저승사자가 부를 때가 되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선크림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후회된다.

무조건 선크림을 바르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 흑자 사진을 보여줬더라면 알아서 잘 발랐을 텐데 아쉽다.

이미 셀 수 없이 올라온 흑자 중 유독 크고 까만 녀석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마침 딸을 데리고 점을 빼러 피부과에 간 김에 큰맘 먹고 까만 녀석에게 레이저를 쐈다.

다소 옅어지긴 했지만 고가의 비용에 비해선 형편없는 효과다.

흑자가 보이는 순간 이미 늦은 거다.

절대로 예전의 피부로 돌아갈 순 없다.


핸드폰 안에 있는 글씨가 바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얼마 전 안경점을 갔더니 핸드폰 글씨를 잘 읽기 위해선 멀리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내 시력보다 3단계나 낮은 도수로 새로 안경알을 맞췄다.

하지만 노안은 계속 진행 중이며 다음에는 다초점렌즈도 고려해 볼만하다고 했다.

평소에는 안경의 위쪽으로 보고 가까운 글씨를 읽을 때는 아래쪽의 돋보기 부분으로 내려다보는 진짜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그 안경 말이다.  


탈모도 40대가 되면서 눈에 띄게 진행 중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약을 먹고 눈에 띄게 풍성해졌다.

그만큼 요즘은 약이 어느 정도 효력이 있다.

다양한 부작용이 있고 복용을 중단하면 바로 빠진다는 게 문제 이긴 하지만.

그래서 난 큰 부작용이 없고 헌혈이 가능한 탈모 영양제만 먹는다.

사실 머리만 풍성해도 훨씬 젊어 보이기 때문에 탈모와의 싸움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토록 노화에 따른 신체 현상이 많듯이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도 다양한다.   

어떤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호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젊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기 힘들어지고, 자녀들은 나를 찾지 않는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패기는 사라지고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된다. 

회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노후자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아이들 진학, 부모님 건강 문제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들이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연말에 조직 개편이 어떻게 되고 누가 평가를 잘 받을지. 모팀장은 요즘 왜 심기가 안 좋고 저 친구는 왜 요즘 야근을 하는지.

예전엔 항상 궁금했을 일들이 이제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할 일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퇴근 후에 자전거를 탈지, 주말에는 어떤 책을 읽을지 등등 나와 가족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 이상 SNS 팔로워 수와 댓글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아드레날린 분비를 자극했던 유튜브 영상들에 예전만큼 눈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나만 몰라서 뒤처진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경쟁하듯 트렌드를 쫓았던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부단히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이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회식하고 골프 치는 것보다 책 보고 공부하는 게 더 편해졌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이처럼 나이가 든다는 건 머리가 빠지고 피부가 생기를 잃고 잘 안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머리가 빠진 만큼 다시금 릿속에 인생의 지혜를 채우고 싶어졌다.

피부는 생기를 잃었지만 세상 속에 흔들리던 내 마음은 오히려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비록 눈앞은 흐려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노화라는 강력한 적이 이제는 죽을 때까지 같이 가야 할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잘것없고 약해진 몸뚱이를 받아들이고 내면이 성숙한 진짜 어른으로 변화되어야겠다.

바로 지금이 나를 위한 진짜 공부를 시작할 때다.

노화가 진행되는 만큼 나도 더 성장할 것이다.

화려한 세상의 유혹에 이제 조금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아직 가끔은 놀고 싶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잘 놀고 싶다.

노화는 최대한 늦춰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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