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14일 나의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지금은 버틸만하지만 15년 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한의사 친구의 말에 어떤 운동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런데이라는 앱을 알게 되었고 초보자도 지루하지 않게 뛸 수 있도록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격려해 주는 아저씨의 음성이 맘에 쏙 들었다.
시작은 꾸준했다. 일주일에 3~4일을 달렸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일주일에 1~2일로 줄었다. 눈이 오거나 너무 추운 날은 나갈 수가 없었다.
새해가 되고 날씨가 조금 누그러지니 더 이상 핑계될 일이 없었다.
달리기를 다시 꾸준히 이어갈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 마라톤대회에 도전해야겠다!
대회를 신청하고 나면 하기 싫은 마음도 웬만해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대회는 일요일에 열렸다. 그러다 토요일에 진행되는 대회가 있어 즉시 신청했다.
3월 9일 코리아오픈레이스.
뚝섬유원지에서 시작해 한강길을 달리는 코스였다.
남은 기간은 불과 50일도 되지 않았다.
그 후로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2번 정도 뛴 거 같다. 회사 다니면서 꾸준히 운동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밥은 평소에도 안 먹는데 괜히 먹으면 부담이 될 듯하여 아침은 간단히 사과로 해결했다.
소지품을 보관해 주는 것 같지만 왠지 복잡할 듯하여 그냥 달리기 복장으로만 갈까 하여 날씨를 보니 영하 5도였다. 오리털 잠바를 입고 주최 측에서 보내준 번호표와 기록측정용 칩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문득 암밴드를 놓고 온 게 생각났다. 아뿔싸! 얼마 전 TV에서 사극을 들으며 풀코스를 완주하던 기안84처럼 음악이나 재미있는 콘텐츠를 들으며 고통을 잊어보려 했었는데 다 틀렸다.
핸드폰을 들고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한강을 벗 삼아 그냥 자유롭게 달려봐야겠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뚝섬유원지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 러너들이 눈에 띄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행사장 열기는 뜨거웠다.
참가 단체별로 천막이 있었다. 탈의실과 물품보관소도 있고 엠블란스도 대기하고 있었다.
설렘과 긴장감이 공존했다.
신발끈에 칩을 묶고 가슴에 번호표를 달았다.
잠바를 벗어 보관소에 맡기고 출발선으로 향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중에 보니 10km 참가자만 2,500명이었다)
대회는 하프, 10km, 5km 3개 코스다.
코스마다 번호표 색깔이 달랐다. 핑크색의 하프 참가자들은 복장부터 달랐다. 왠지 모를 고수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야말로 그들만의 축제의 현장이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커플, 옷을 맞춰 입고 온 동호회원들, 양손에 자녀 손을 잡은 아빠, 외국인도 많았고 50~60대 어르신도 보였다. 스트레칭을 하며 출발을 기다리는 그들의 얼굴엔 설렘과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달리기 하나로 모인 러너들의 축제의 시간이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축제가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박수와 함성이 없을지 몰라도 미친 듯 신나는 나만의 축제.
내 삶의 축제의 시간은 언제일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도 축제의 주인공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하루 제대로 즐겨보자.
하프 참가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10분 후 10km, 10분 후 5km 순으로 출발했다.
10km는 인원이 많아 2개 그룹으로 나누어 출발했다. 기록이 1시간 이내인 A그룹, 1시간 이상인 B그룹.
10km를 1시간에 들어오려면 페이스가 6'이 넘으면 안 되는데 난 평소 7'3" 정도로 뛴다.
10km는 1시간 30분 안으로 들어와야 기록이 인정된다.
평소대로라면 1시간 10분대가 예상되지만 10km는 처음이라 방심할 수 없다.
수천 명이 달리기에 한강 길은 너무 좁았다.
폭이 좁은 곳은 불과 5m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전거길을 통제하지 않아 자전거도 계속 지나갔다. 조금 달리니 벌써 반대쪽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각자의 속도에 맞춰 비켜주고 피해 주며 물 흐르듯 사고 없이 뛸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차게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고 달리는 사람,
정말 부담 없이 참석한 듯 청바지를 입고 뛰는 사람,
프로 마라토너의 복장을 다 갖췄지만 자세가 너무나 엉성하고 불안정한 사람,
달리기를 해 본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두꺼운 패딩을 입은 사람,
친교 차원에서 참석한 듯 서로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달리는 사람,
1km도 되지 않아 걷기 시작하는 사람,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얼마 되지 않아 1km 표지판이 보였다.
할만했다. 이렇게 10번만 뛰면 된다.
5km 코스의 반환점인 2.5km 지점에 음수대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오면서 마라톤대회 관련 유튜브를 봤는데 2가지가 기억에 남았다.
1. 10km는 물 안 마셔도 된다. 마실 거면 서서 마셔라. 달리다가 마시면 코로 물 들어간다.
2. 버티고 버텨라. 끝까지 버텨라.
그래서 물은 마시지 않고 지나쳤다.
3km가 지나 4km로 향할 때쯤 1차 고비가 왔다.
평소 운동하는 거리가 4km 내외고, 많이 뛰는 날이 5km 정도였다.
게다가 이른 아침에 뛰는 건 처음이다. 늘 캄캄한 밤에 뛰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바이오리듬이 안 맞는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벌써 멈출 순 없다.
이제부터는 계속해서 자체 신기록 경신이다.
드디어 5km 구간 반환점이 보였다.
반환점엔 물과 초코파이가 있다고 했는데 뛰면서 초코파이를 먹는다는 게 궁금했다.
역시 물은 건너뛰었는데 조각조각 잘라놓은 초코파이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순간 한 조각을 집어 입속에 넣었다. 근데 목도 먹히고 호흡도 가빠서 씹을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꾸역꾸역 넘겼는데 호흡이 살짝 흔들려서 당황했다.
6km가 지나면서 2차 고비가 왔다.
무릎과 정강이 쪽에 살짝 느낌이 온다.
10km를 완주하지 못한다면 다리가 풀려서 못 뛰거나 숨이 차서 못 뛰는 것 중 난 후자라고 생각했다.
다리야 어떻게든 움직여주겠지만 숨 차고 배가 아픈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호흡은 아직까지 괜찮은데 하체에 무리가 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1km마다 있는 표지판을 계속 기다리다 보니 1km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원래 올해 안에 하프 마라톤 도전을 목표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호기롭고 겁 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10km도 이렇게 힘든데 2배가 넘는 하프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하프는 먼 훗날 죽기 전에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로 슬며시 미뤄놓기로 다짐했다.
7km를 지나니 오르막 길이 꽤 길었다. 이제 허리까지 느낌이 온다.
기분 전환을 위해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마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조금 힘이 나는 듯했다.
이제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앞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초반엔 뒤쳐졌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달리니까 하나 둘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멈춰서 걷고 싶은 유혹이 계속 올라왔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이번 마라톤의 목표는 쉬지 않고 끝까지 달리기다.
8km. 이제는 어깨까지 아프다. 심지어 흔드는 팔까지 아프다.
호흡도 힘들어진다. 횡격막에 경미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골인지점에 도착하면 그대로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울 거다. 충분히 쉬고 나면 엄청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상상력으로 도파민을 분비시키며 최대한 고통을 중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리막길이다.
가속도를 이용하여 속도를 올려본다. 숨이 찬다. 안 되겠다.
기록보단 완주를 위해 다시 속도를 늦췄다.
드디어 9km. 이제 정말 거의 다 왔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느낌이다.
그래 저 앞사람까지만 앞질러보자.
마이크 소리가 저 멀리 들려온다.
있는 힘을 다해 속도를 높였다.
드디어 결승선이다.
도착해서 잔디밭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가슴 벅찬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다.
1시간 6분.
생각보다 기록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엔 1시간 이내 완주를 목표로 해야겠다.
전체 참가자 중 중간 정도의 순위였다.
오히려 40대 이상 참가자 중에서는 하위권이었다.
역시 40대는 절박한 만큼 진지하게 열심히 뛰나 보다.
사람은 정말 망각의 동물이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뛰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또 다음 스텝을 생각하고 있다니.
마라톤도 힘들고 인생도 힘들다.
하지만 버티고 버티면 언젠간 끝이 난다.
그리고 쉴 수 있다.
혼자였다면 포기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뛰어서 끝까지 뛸 수 있었다.
푸른 강물과 밝은 태양도 힘이 됐다.
힘들 때마다 즐거운 상상도 도움이 됐다.
조금만 더 힘내자는 긍정의 마음, 잘하고 있다는 희망의 소리가 나를 결승선으로 이끌었다.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그동안의 고통과 아픔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난 또다시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