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묵직했던 날들이 있다. 늦은 아침 트위터를 둘러봤을 때, 페이스북 어느 페이지에 눈이 멈춰섰을 때, 강아지가 죽었고,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짐 OO이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애써 슬픔을 참아낸 말. 유독 그런 말들이 밀려오는 시절이 어쩌면 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10여 년 전 7월 말. 엄마는 그 날이 음력으로 내가 태어난 날이라 하셨고, 17년째 함께였던 곰돌이가 2019년 7월 이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몇 주 전 우연히 보았던 영화 속 화장(火葬) 신은 우연이 아니었고, 자꾸만 이상하게 들려오던 세상 고양이와 개들의 부고는 왜인지 SNS의 사건사고가 아니었다. 이럴 때 우연은 지독히도 필연이다. 고작 하루 아침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은 정해진 이별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고, 나는 그저 바보같아 지금의 이 헤어짐에 이렇게나 속수무책이다. 후회란 실패한 우연일까 망설여도, 곰돌은 지금,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여름, 또 한 번의 이별을 시작했다.
후회를 생각한다. 좋아하는 간식을 조금 더 푸짐히 줄걸, 조금 위험하더라도 마취를 시키고 스켈링을 해줄걸, 짖는다고 혼내지 말고 곰돌의 입장을 생각해 볼걸, 하물며 마지막 그 날 밤, 잠깐 안고 나와 바람이라도 쐬어줄걸. 일종의 얄궂은 암시는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세월 속에 후회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유달리 낯을 가렸던 아이, 남자 아이임에도 원피스를 좋아하고, 돈 주고 사 온 인형보다 햄버거 가게에서 경품으로 받은 오리 인형만을 물고 늘어졌던 아이. 방 안에 앉아 컴퓨터를 하고있으면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빼곰히 들여다보던 아이. 엄마만 졸졸 따라다녀 껌딱지라 부르며 놀았던 아이. 이제는 바래질 시간만이 기다리는 어디에도 없는 장면들이 왜 하필 이제야 사무친다. 수 많은 가정, 끝도 없는 if의 연속. 그렇게 무책임한 후회 속에 세월이 야속하다. 누군가 부고는 가장 아픈 이별 소식이라 말했는데, 2019년 7월 16일, 오후 7시 경. 구글이 곰돌과의 이별을 하루 늦게 알려왔다.
내게 다가왔던 말들을 생각한다. 내일에 밀려간 말들, 세월에 지워진 말들, 내가 외면했거나 멀리했던 말들. 수도없이 들어왔던 죽음이, 그 진부한 풍경이 설마 내 것일 줄 몰랐다. 방 안 곳곳 곰돌의 자리는 빈칸으로 남았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곰돌을 부르던 습관 아닌 습관은 갑작스런 부재와 함께 울림도 없는 외마디가 되어버렸다. 곰돌과의 부재는 어쩌면 내게 이런 생각의 구멍을 남기고 떠났는지 모른다. 어떤 작은 시간과의 단절, 멀어져간 모든 말들이 애타게 사무친다. 안락사라는 선택이, 나의 것일 줄 몰랐다. 나이를 먹어가며,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줄어드는 체중을 보며, 어쩌다 흘러나왔던 단어가 이렇게 애통한 마지막일 줄 몰랐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시작은 사람의 것일 수 있지만, 마지막은 어쩌면 이곳의 것이 아니다. 곰돌은, 아마도 그렇게 이곳을 떠나갔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사람보다 8배 빠른 시간을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1시간은 몇 배로 애달프고, 하루 거른 산책은 그렇게 소중하며, 고작 동네 슈퍼에 다녀왔을 뿐인데도 그렇게나 꼬리를 흔들며 매달린다. 그런 곰돌이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치매 증상, 심부전증, 여러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떤 것도 다음이 보이지 않았다. 수시로 새벽에 깨 힘들어하는 곰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며칠이 흘러가는 순간, 그것이 몇 주가 되어갈 때 ‘함께’했던 시간을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 건, 아마도 어김없이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안락사를 정하고도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처럼 흘러갔다. 매몰차게 내리붓던 비가 그친 저녁, 스며드는 어둠, 작은 방 안에 모여앉은 나와 누나들. ‘함께’였던 곰돌을 보내줬다. 화장터까지 50km의 길을 달리고, 숲속에 파묻힌 추모의 집이란 곳에서, 다섯 시간 남짓. 곰돌의 죽음은 빠르고,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그 밤을 모르겠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곳의, 지금도 언제도 아닌 듯한 이상한 시간이 물컹하게 며칠 째 떠나가지 않는다.
올해 봄 도쿄에서 산 곰돌의 여름 티셔츠는 마지막 한 벌이 되었다. 17곱 나이에 새 옷은 이상한 어제의 흔적을 몰고온다. 애절하고, 애달프고, 애잔하고. 그 감정의 질감은 분명 이곳의 것이 아니다. 몇 번의 선택은 기쁨이 되었고, 몇 번의 선택은 눈물이 되었고, 몇 번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상하게 물컹했던 그 어둠 속 선택은 후회가 되어 살아간다. 상실이 남긴 구멍 속에, 결코 이곳이지 않았던 이질적인 묘한 찰나 속에,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이상한 기시감 속에. 그저 사라진 것들의 시간을 생각한다. 무력하게 생각하고 생각한다. 고작 3.5kg의 부재, 17년이란 시간의 엔딩, 그렇게 사라져간 ‘함께’란 이름의 계절. 오래 전 여름 하얀 털뭉치로 찾아왔던 곰돌은 내가 모르던 저편의 한 폭을 안겨주고 떠나갔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