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Mar 06. 2021

너가 되기 위한 조건,
어느 죽음에 고해

나를 스쳐간 봄바람이 너에게 닿을 때



집에 돌아와 살면서, 혼자가 아닌 엄마, 누나들과 함께 매일을 보내며 TV를 본다는 건 가장 가까운 타인을 마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집에서의 TV 시청이란 보고 있지만 보지 않는, 어김없이 다량의 수다가 동반되는 이상한 '보기의 행위'이고, 그런 탓에 별 거 아닌 일에도 말들은 뒤섞여 때로는 작은 다툼이 일기도 한다. 여기까진 누구나 겪는, 내게도 (이전까지) 숱하게 흘러갔던 TV 앞에서의 별 거 아닌 다반사. 하지만 때로, 특히나 뉴스 화면 앞에서 난 종종 숨고싶어지는,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소파에 엉덩이 깊숙히 깔고 앉아있는 주제에) 안절부절한 상태가 될 때가 있다. 대부분 정치적 뉴스이거나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나만 아는 나의 이야기가 52인치 브라운관에 적나라하게 흘러가고 있을 때와 같은 ’비상 사태.' 


©️ eiki mori


지난 해 이태원에서 다시 불붙었던 코로나가 확산되는 뉴스가 폭발하듯 터져나오기 시작한 날 나는 조심스레 소파에서 나의 엉덩이를 거두었고, 이곳을 등지고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 하사의 울분 섞인 호소가 뉴스를 물들일 때 나를 둘러싼 반경 1m의 세상은 묘한 이질감과 함께 보이지 않게 분절되었다. 그럴 때면 방구석에 들어가, 기껏해야 핸드폰을 켜고 짓걸이는 트위터 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작아질 때면, 난 새삼 타인의 거리를 기억할 뿐이고, 점점 작아지는 나와 함께 세상은 가리워진 것들의 방문을 잠근 구석에서 오늘도 울음을 참는다.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내 일은 아니듯, 내가 아닌 나와 너의 곁에서. 나는 TV를 켜고 오락프로의 채널을 돌렸다.

https://youtu.be/n16XCCwyffU
    


지난 밤 내가 늦은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운 시간 나보다 다섯 살이 어린 일본의 아티스트 sirup은 두 번쨰 ep를 발매했다. 트랜스 젠더 육군 하사가, 내게는 꿈에서도 찾지 못할 용기로 국민을 향해 호소했던 외침이 무참히 살해당했던 밤, sirup의 새 앨범 타이틀은 cure, 선공개된 싱글은 'thinkin about us'였다. 서로 다른 자리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가지의 사건과 사고. 하지만 오직 나를 경유했던 그 시간의 보이지 않던 이어짐의 재생. 나보다 다섯이나 어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노래 공개와 함께 남긴 몇 자의 글이 꼭 나와 우리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세상은 지금 추상적(긍적적)인 말들로 흘러넘치지만, 그런 말들만 존재하는 세상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지만, '보통'과 조금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요. 진심으로 사람과 마주하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깊이 고민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의미를 이룰 날이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런 thinking about us, 그리고 cure. 세상의 위로가 내 것이 아닌 건 그곳에 내가 지워져있기 때문이고, 세상 모든 듣기 좋은 말이 허울처럼 느껴지는 건 그들이 말하는 건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우리'는 왜 하필 나와 너의 '우리'와는 다르다. 언제쯤 '끼리끼리'의 민족은 내가 아닌 너를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라 함은 TV 앞에 앉아 자유롭게 뉴스를 볼 수 있는 사이이고, 동등하게 다툴 수 있는 관계이며, 어떻게 화해를 해야할지 맘을 졸이는 늦은 새벽같은 것이다. 내가 없으면 당신의 '우리'는 성립하지 않아요.


©️幡野広志, '왜 내게 물어올까' 사진가 하타노 히로시 에세이


근래(라고는 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뒤적이고 있는 하타노 히로시의 에세이 '왜 내게 물어올까'라는 묘한 인생 상담 수록집엔 다양,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현실극이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암 선고를 받은 사진가가 왜인지 돌연 밀려드는 트위터 DM 인생 상담에 답을 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한 권인데, 보는 내내 몇 번이나 눈실울을 적셨다(이렇게 고리타분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이 책은 그 고리타분의 정서를 건드린다). 일본과 한국이란 나라의 정서적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아닌 너'는 그야말로 힘든, 고되고 괴롭다 못해 몇 번이나 죽고싶어질 만큼의 삶을 살고있고, 여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40대의 한 남자 사진가는 '그 자리, 그 시간,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을 담담하게 건네준다. 때로는 차갑게 하지만 진심으로, 어찌보면 독하게 그러나 맞는 말인 것 같은. 그런 조언 아닌 조언이 수 십 명치 실려있다. 


이 책은 트위터에서 시작돼 cakes라는 블로그 사이트에서 연재를 진행했고, 1천만이 읽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화제를 모은 '너와 나'의 대화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기엔 여느 힐링 서적, 조언을 건네는 둥 싶지만 자기자랑으로 도색되어 있는 책들과 달리 내가 아닌 '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렇게 잠시 나를 포기하는 순간의 '애절함'이 묻어있다. 하타노 씨는 이 생뚱맞은, 남의 애기나 들어주는 인생 상담자 역할에 대해 '우리 아들이 해온 상담이라 생각하고 답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다음을 위한 말들.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 오랜 페친(이지만 딱 한 번 만나본) 영화 감독이 올렸던 미얀마 데모 행렬에서 쏟아진 '성소수자들은 대부분 아이가 없지만, 우린 다음을 위해 싸운다'는 외침. 내가 아닌 너, 너가 아닌 나는 오늘도 얼마나 너(나)의 곁을 지나쳤을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려한다. 






이전 16화 고작 3.5kg의 부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