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밤은 너의 아침보다 때때로 더 빛이 난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조금 수상한 이야기. 아니 이상한 이야기다. '사람은 잠의 방식을 고를 수 있을까.' 여기서 방식이란 규칙적인 삶을 위해 9시면 잠자리에 들거나 야근이 많은 탓에 새벽잠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의 밤이나, 숙면을 위해 잔잔한 클래식을 걸어놓고 눈을 감는 류의 '방법'을 뜻함은 아니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에 드는 상태', 그 진입로의 결정. 말하자면 눈을 감고 새까매진 시야에 누워 잠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그런 시간의 선택지, 그의 방식이다. 혼자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세상 모든 진부한 말들은 여지없이 '맞는 말'이기만 해,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인지 뭔지도 모를 말들이 하나둘 재연되는 요즘이다. 그렇게 만나게 됐던 게 어느 영화 속의 저 구절. '사람은 잠의 방식을 고를 수 있을까.'
집에서의 시간을 시작하고 5년 여, 초반에 난 새벽잠을 잃어 KBS 정파 방송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고, 이후 어떤 계기도 없이 말도 안될 늦잠을 이어갔고, 그 와중에 조금 이른 늦잠과 더 늦은 늦잠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게 소위 근래의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의 기상 시간은 10시 44분. 세상엔 졸려도 그냥 일어나는 아침이 있고, 허리가 아파도 몇 분을 더 자는 오후가 있고, 알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늦잠의 굴레'가 있다. 딱히 늦잠을 변명하고 싶은 맘은 아니지만, 세상엔 변명으로 설명되는 것이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의 실례를 몇 가지 가져오면, 여전히 잠을 미룬 새벽 침대속 유튜브에서 오래전 JROCK으로 명성을 높였던 각트는 수면 시간이 길어야 3시간이라고 말했다. 가장 이상적인 수면 시간이라는 7시간에 반도 미치지 못하는, 내게는 쪽잠일 수 밖에 없는 수준인데 그의 논리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죽어간다는 것"이라는, 믿음 속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생각하면 죽어간다는 건 곧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새벽 JPOP 듀오 뮤지션 킨키키즈의 토모토 코이치가 얘기했던 "사람은 깨어있기 위해 잠을 잔다는 말." 그는 생물학적 근거를 꺼내들기까지 하며 제법 진지하게 새벽 4시가 다 되어 잠에 드는 자신의 패턴을 항변했는데, 라디오를 듣는 리스너는 새벽 3시 냉동고를 열고 렌지를 돌리는 그의 야식에 야유나 보내고 있었다. 이미 새벽이 중천을 넘긴 시간 난 동지를 만난 듯도 싶어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그가 말한 '깨어있기 위해 잠에 드는 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살기위해 자는 게 아니라 자기 위해 살아가는 일상.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 원제인 '잘때나 깨어있을 때나'가 떠올랐었나. 최소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난 밤에 가장 활발한 나를 만나고, 잠자고 있다는 이유로 야유에 묻히는, 하지만 내겐 가장 기발하고 생생한 시간이 '너의 낮'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너도, 나도 세상은 불을 켜고 흘러가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위험한 이야기. 나는 언젠가부터 두 눈을 감고 그림들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랬던 건 아니고 몸이 아팠을 때, 마음이 아팠을 때 감은 두 눈 안자락에 처음보는 그림이 펼쳐지곤 했다. '병원에 가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이야기인데, 내게 그 그림은 '잠'에 들어서는 문턱이(었)다. 사실 회사를 다니고 남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게 살 때' 잠은 눈 감았다 일어나면 끝나있는, '과거 완료형'의 시간이었지만,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날, 난 '잠'의 시간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빌딩숲이 춤을 추고, 열차가 달리고, 무언가에 몸을 실은 시야는 어두운 터널을 통하고, 보이지 않는 빛을 좇다보면 뇌리에 그려진 밤의 풍경 속에 어느새 잠이 찾아와 있었다. 초기에 정말 몸과 맘이 내 게 아닌 것 같던 시절엔 꽤나 에로틱한 환상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나는, '잠의 방식을 고를 수 있다.' 어쩌면 잠이란 패턴이라기보다 흐름이고, 눈을 감고 보내는 시간인만큼 보지 못한 세계의 일들이고, 그렇게 잊혀지는, 말 되어지지 않는 세계의 자락이다. 현실을 반영하지만 왜곡되고 뒤틀린, 또는 과장하며 확대해버리는, 때때로 폭발하는 어둠 속의 '비현실.' 그렇게 먼 곳에 다녀오느라 나는 늦잠을 자는걸까. 토모토 코이치가 이야기했던 '자기 위해 깨어있다'는 건 이런 몽롱함의 문장인걸까. 세상 모든 늦잠은 파장을 남기고, 난 이제 조금 불을 끄고 밤의 자욱을 바라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어김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날, 내가 굳이 그 날의 '잠'을 돌아봤던 이유, '잠의 방식을 고른다'는 대사가 나온 건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이 됐던 영화 '10년'의 출발점, 홍콩 젊은 감독들이 앞으로의 10년을 키워드로 꾸린 옴니버스 영화, 그 두번째 이야기에서이다. 대부분의 옴니버스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편차가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그 중 두 번째 작품 'Season of the End'는 붕괴되는 오늘 이후 남아있는 내일에 대한 까마득한 기억을 (꿈을 통해) 좇는다. 친구의 오랜 집을 불도저가 짓발고 간 날 두 젊은 부부는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해 박제하는, 꽤나 변태적인 복원의 시간을 걷는다.
깨진 그릇 조각, 책갈피 사이의 머리카락, 이곳에 없지만 이곳에 있는 작은 단편들을 표본 박스에 담으며, 탁한 어둠과 빛을 살아가며 그들은 비틀대는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새 '기억'은 '실물'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고, 주인공 '라우'는 바닥이 난 생활의 저편에서 오늘을 기억하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현존하는 생명체는 8만점, 지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0.8%. 넓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일까." 상실을 이해하기 위해, 종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린 종종 눈을 감고, 그곳에서 오늘은 오늘 이상, 최소한 오늘이 아니어야만 한다. 낮이 밤으로 설명되고, 밤이 낮 곁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이러다 정말 잠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낮을 추월할 것 같은 문턱에서, 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깨어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보이지 않는 너머에서 펼쳐지는 나의 이야기를. 늦잠을 자는 사람의 하루는 왜인지 뒤를 돌아보며 시작한다. 아마도 너가 떠나간, 그 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