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투성이의 너와 나, 여름이 지나가고
1964년 도쿄의 첫 번째 올림픽을 기록한 이치카와 콘의 ‘도쿄 올림픽'은 모두 16백 만 관객을 동원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2002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자리를 내어주기 까지, 일본영화 1위 자리에 있었다. 현재는 전체 흥행 랭킹 중 5위. 올해의 올림픽, 2020 도쿄는 전례없는 팬데믹 속에 마무리된 이례적인 예라 얘기되지만, 당시의 올림픽 역시 못지 않은 반발 속에 치뤄졌고, '오늘의 어려움'이란 늘, 시간이 흘러 추억처럼 남아있는 게 이상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유는 당연히 달라,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1960년대 일본 도쿄의 도로 사정은 손님을 맞이할 만한 상태가 되지 못했고, 수도고속도로가 개통된 건 올림픽을 준비하면서이다. 이치카와 콘에 이어 두 번째 올림픽의 기록 영화를 제작하는 카와세 나오미 감독은 “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인류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흐름상 동일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치카와 콘의 이 영화는 본래 예정됐던 쿠로사와 아키라가 올림픽 조직위와 의견 일치에 실패해 하차하는 등 제작과 관련 구설수도 많았지만, 당시로선 생소하고 기괴하기만 한 실험적 시도들이 많아, 영화 내적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치카와 곤은 발목 '만'을 클로즈업하거나 인간이 가장 빠른 순간이라 얘기되는, 100m 레이스를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실 별 새롭지도 않지만. 아무튼 이 작품은 지금도 일본 영화 흥행 순위 탑5에 꼽히고, 올림픽이란, 어쩌면 당시를 비추는, 가장 내밀하고 적나라한 만화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지 못한, 너와 나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혹은 폭로하고 그렇게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이미 끝난 올림픽이지만, 그래서 이후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일본에선 올림픽 보다 도쿄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상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얼마전엔 ‘걷는 만화, 보는 도쿄'란 타이틀로, 만화가들이 떠올린 20개의 도쿄가 거리 곳곳에 출현했다. 콘셉트는 ‘만약, 도쿄가 눈 앞에 또 하나 있다면.’, ‘만약'이라는 건,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과거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말처럼 들릴 뿐이지만, 그곳엔 지금을 상상하는, 이곳에 없는 너와 나의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후회와 집착이 아닌, 바람과 상상력. 그렇게 내일에 더 가까운. 이와이 슌지의 마법같은 여름녘의 영화 ‘쏘아올린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위에서 볼까'는 애초, TV 시리즈, ‘if, もしも’가 시작이었고, 올림픽이 끝나고, 난 '만약에'란 말을 미래형으로 잠시 상상해보았다.
도에이의 기대작. 내게는 의외의 발견과도 같았던 시라이시 카즈야의 ‘고독한 늑대의 피'가 속편 공개를 앞두고 9분이 넘는 ‘예고 아닌 예고편'을 공개했다. 대사의 한 대목을 모두 4개의 사투리로 재연해놓은(후시 녹음의 더빙) 영상인데, 마츠자카 토오리가 ‘너희 모두 체포야'라 히로시마 방언으로 말하면 , ‘너희 모두'가 표준어, 오사카벤, 츠가루벤, 하카타벤으로 합을 맞추며 치고받는 식이다. 외국인인 나는 듣는 재미를 난 잘 모르겠지만, 지난 해 ‘마티아스와 막심'을 사이하테 타히의 시와 스다 마사키의 낭송으로 믹스해, 홍보 영상을 만들었던 예와, 분명 멀리있지 않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영화 마케팅은 조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지난 아카데미, 남우 주조연상을 휩쓸었던 시라이시의 이 영화는 도에이의 가장 기대작이기도 한데, 근래 실패를 거듭하는 도호와 함께 생각하면, 역시 영화는 영화적일 때 가장 빛이 난다. 이 영화와 두 주 사이로 개봉하는 도호 영화는 또 하나의 속편, 기무타쿠 주연의 ‘마스커레이드 나이트.(1편은 '호텔)’ 대략 5년 전 ‘히어로' 원과 투와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이미 알 것 같은 ‘내일'을 만나는 건 내게 별로 영화같지 않고, CJ 영화가 한국 영화가 아니듯, 도호 영화 역시 일본 영화는 아니다.
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야쿠쇼 코지의 뒤를 잇는(말 그대로 그 캐릭터, 그 자리를 물러받는 듯한) 마츠자카 토오리의 ‘피.’ 일본 영화는 파워 있고, 다이나믹한 한국 영화와 비교되며 흔히 나약하고 말랑하다 이야기되지만, 시라이시의 ‘고독한 늑대의 피'를 보고 느낀 건, 생각(의 끝)을 두려워 하지않고, 모럴/언모럴의 사이에서 고뇌하고, 무너져도 타협하지 않는, 자신의 영화적 정당성을 (끝까지) 추구하는, 다소 미숙해도 쓰러지지 않고 차라리 폭파하는 영화적 불온함이 그곳엔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시라이시 카즈야나 ‘너는 너라서 너다'의 마츠이 다이고, ‘콜 보이'의 미우라 다이스케나 ‘우행록'을 만들었던 이시카와 케이와 같은 이름으로 증명되고, 갓 결혼한 신랑 마츠자카의 이 영화에서, 고작 2~3년 전의 스다 마사키나 올림픽 개막식에서 춤을 췄던, 서른 이후 더욱 깊어지는 모리야마 미라이와 같은 연기로 실현된다. 한국에선 그런 배우를 가끔 그걸 유아인에게서 보곤 하는데...
조금 더 이야기하면, 마츠자카는 몇 해 전 ‘망상'이란 타이틀의 사진집 아닌 사진집을 두 편 냈는데, 그건 ‘하고싶은 영화, 캐릭터'에 대해 대놓고 고백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제작도 되지 않는 영화에 대한 홍보물을 정색하고 스무 편 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일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의 젊은 배우들로 만들어지는 ‘일본 영화'는 분명 존재한다. 마츠자카의 ‘망상'을 펼쳐보며 그가 출연한 ‘콜보이', ‘고독한 늑대의 피', ‘불능범'이랄지 ‘신문기자'가 어른거리는 건 영화의 시간일까, 망상의 자리일까. 오늘을 조금 다른 자리에서 배반할 때, 영화는 태어난다.
코로나로 인해 열리지 못했던 후지록 페스티벌이 그제부터 아슬아슬한 3일을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 유튜브 생중계로 나마 몇몇 공연을 봐었던 나는 그곳의 사람 가득한 풍경이 다소 어색하다 느꼈는데, 사실 달라진 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뿐인지 모른다. 일정을 체크해두고도 막상 시작부터 보는 건 얼마 되지 못하고, 첫 날을 거의 모두 놓친 뒤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의 이야기이거나, 애초 록페를 집에서 본다는 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일인지 모르지만. 하는 것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왜인지 있다.
와중에, 개최를 결정한 주최측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후지록을 무사히 치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산다는 건, 그렇게 조금씩 고쳐가는, 덧칠하고 바꿔가는 일들일지 모르겠다. 올해 후지록은 알코올의 판매와 반입 금지, 지정 자리의 철저한 엄수, 인원 제한과 희망자에 한해 무료 항원 검사를 실시를 전제로 삼고있다.
그리고 본인의 첫 후지록을 개막 직전 포기한 오리사카 유타와 서로 다른 이유로 출연을 취소한 몇몇 아티스트들. 무대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 마음의 킹그누. 킹그누는 그닥 좋아하지는 않아 스트리밍을 끄려고 했는데, 돌연 그들의 ‘the hole’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한참 음악을 듣다 이구치의 울먹이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몇 차례나 멤버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고멘, 고멘네'라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왜 인지 다 알 것 같은 마음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르고, 또 같은 하루를 살아간다.
“무대에 올라오기 전 많이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힘든 의료진, 생과 사를 앞에 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다른 아티스트의 공연을 계속 봤는데요, 제가 여기에 설 수 있는 이유, 이곳에 있어도 된다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어요. 여전히 잘 모르고, 잘 모른 채 이렇게 올라와 노래를 하고 있지만요. 와주신 분들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거 알고있어요. 오지 않으신 분들의 선택도 있을 거고. 하지만 그저 내일 우리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기 바라며 노래를 하자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이구치 사토루
매일이 시작을 하려다 끝이 난다. 코로나 이후의 하루란, 잃은 것도 없이 조급하고 답답해 뒤늦게 일어난 아침은 어느새 이른 새벽으로 끝이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하지 못한 일들의 수습하는 밤들이 쌓여가는데, 세월이 흐르니, 시간이 쌓이다 보니 그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은 아닐까 싶은, 자기 변명적的 게으름뱅이의 ‘철학'이 생겨버린 듯도 싶다.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집에서의 생활이라도 몇 개의 패턴이 있고, 혼자 집에서 보내는 일상과 가족(혹은 누군가와)과 동거하는 시간에서의 ‘집’이란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있기도 하다. 매일이 시작도 하지 못한 것 같은 수 년을 보내고, 난 이제야 ‘잃어버린 나의 시간'과 곁에 다가온 ‘너의 시간'을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보려던 TV 프로그램은 보지 못하고, 외출하면 들를 예정이었던 은행은 가지 못하고, 동물농장을 보지 못한 일요일 아침(아닌 아침)은 지각생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마냥 볼품이 없고. 나의 하루와 너의 하루, 이곳의 시간과 그곳의 what time is it. 한동안 난 ‘아직은 하루를 마치고 싶지 않은 맘에 잠을 미룬다(늦잠을 잔다)’고 생각(변명) 하곤 했는데, 코로나 이후, (어쩌면) 그저 구실에 불과할 그 ‘사건' 이후, 주변의 어긋남과 너와의 스쳐감과 시차가 남기고 간 뒤늦은 발자국이, 너무나 현실같아 난 밤 잃은 아침 마냥 맘이 좀 쓸쓸하고 허전했다. 그냥 코로나 때문에? 아니면 (모두 다 변했는데) 나만이 변하지 않아서? 세상은 이유를 남기고
요즘은 온라인 기사들이 기간 한정 무료 오픈 조건을 달거나, 멤버십 콘텐츠 비중을 늘리거나 나름의 체계를 정비하고 있는 듯한데, 와중에 드러나는 건 ‘동시간의 체험', 너와 나 사이의 시차가 줄고줄어 소멸에 이르는, 소실점, 그 교차의 순간일지 모른다. 예를 들면 언제 어디든 존재하는 3억 뷰 뮤비의 올/애니타임의 '함께'가 아니라, 이곳에만 스쳐가는, 어쩌다 만나게 된, 우연이가나 필연, 단 한 번의 스쳐감이거나 기적같은 찰나와도 같은 것들. 올해도 난 보려던 유튜브 생중계 후지록을 절반도 보지 못한 채 보내버렸지만, 그날 밤 yonawo는 24시간 믹스 스트리밍을 하고있었고, 다시 한 번 그곳에 너와 나 사이의 시차가 태어난다. 그렇게 아쉬운, 그리고 다행인. 만남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세상은 오늘도 조금 더 멀어지는 가운데, 우린 ‘함께'를 잃고 '우연'을 찾고 있는걸까. yonawo의 믹스 스트리밍 3일째, 난 처음으로 유튜브에 댓글이란 걸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