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일기를 쓰는걸까, 불안은 나와 함께 태어나버렸다
별로 잘 하지도 않는 '외출'을 빼앗겨 버린 2020, 마지막 날이라고 별 다를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돌연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 모든 의미는 뭉개져 몽연하게 흘러가는 날들에 내가 살던 하루가 어땠는지 가늠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게, 어쩌면 올해의가장 큰 '사건'인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언제 한 번 내가 만들어가는 하루라는 건 별로(거의) 없었고, 그저 나와 당시의 너, 혹은 무엇이 한 자리에 스쳐가며 24시간을 채워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쌓여가고, 혹은 지나가고. 그래서 우리는 일기를 쓰고, 우치누마 신타로는 지난 봄 그 '일기' 만으로 가게까지 차린 걸까. 이미 밤이 깊어 20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SNS에 한 해를 돌아보는 말들을 바라보며, 나른한 기분으로 '좋아요'를 누르고 있었다. 그 시간에 무언갈 쓴다는 건, 해를 넘겨버리는, 바보같은 뒷북이니까. 세상엔 때에, 자리에 맞는 말과 마음이 있다. 그리고 20년을 10분 쯤 넘겨, 새 해를 갓 시작한 새벽녘 난 그런 밤 끝자락의 별 거 아닌 말을 트위터를 열고 지저귀고 있었다. 근데 이건 20년의 일인가, 21년에 한 일인가. 글 아래 찍힌 날짜는 21년 01시 00분.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다.
굳이 2020년 12월의 마지막 날, 31일의 나를 돌아보면, 별 다를 바 없이 늦잠을 자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애플 뮤직을 틀어놓고 종일을 있었지만,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신혼 여행 사진을 담은 사진집에 대한 인터뷰를 읽었고, 오오즈미 요와 코마츠 나나가 주연한 영화 '사랑은 비개인 후처럼'을 뜨문뜨문 끊어가며 보았고, 지난 여름녘 주문했던 '몽키'의 4년 전 6월호 '단편 소설을 만드는 법'의 몇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뒤죽박죽의, 그저 같은 날 벌어졌을 뿐인 사건과 사건들. 하지만 31일이라는 별 근거없는 '기념일'. "어떻게도 되지 않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고, 정리도 되지 않는 생각을 더듬으면서, 정월부터 쏟아붓는 스쟈쿠 대로의 빗소리를, 아무런 생각없이 듣고 있었다." '라쇼몽'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어제와 그제, 그리고 며칠 전 유튜브의 낭송 채널과 상처입은 여고생과 중년 남성의 '비 개인 후'를 그린 저 영화 속에서 몇 번이나 스쳐갔는데, 혹시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저 마지막 날이라고 애써 의미를 찾아보려는 쓸데없는 발버둥에 불과할까. 반 년이나 지나 들춰본 '몽키'엔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이 수두룩했고, 난 그 중 어느 두 이야기에 한해가 떠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불안'과 '죽어버린 말로 꿈을 꿔본다는 건.'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사진에 대해서는 사실 좀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 있다. 아마도 최근 가장 잘 나가는, 장사도 잘 되고 평도 후한 작가이지만, 그의 기본적인 '톤'에 동의하면서도 새로 찍어낸 광고를 볼 때마다 어쩌면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란 생각이 물컹하게 밀려들 때가 있다. 단순한 좋고 싫고가 아니라 변심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린 91년생. 어쩌면 그런 유치한 시샘에서일까. 아니라고 하기엔...새해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세상엔 어느 '시점'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런 '시간'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알게되는 세상의 너와 내가 있다. 오쿠야마는 결혼을 한 뒤 유럽으로 신혼 여행을 다녀오며 찍은 사진들을 'The Good Side'란 타이틀에 담았는데, 내겐 어느 먼 길을 지나 다시 자신에게 '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좀 딱딱하게 이야기하면 데뷔하고 10년, 결혼이란 맺음의 포인트, 혹은 어떤 '과거와의 만남.'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기에, 모든 것들은 변화를 전제로 존재한다. 눈 앞의 일도, 세상의 환경도, 인간관계도 변해간다. 하지만 사진은, 그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과거라는 걸 부동의 사실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변한다." 떠나버린 어제와 남아있는 나, 그리고 분명 달라졌을 내일. 그렇게 우린 매번 연말의 잔혹한 멜랑꼴리에 빠지고 마는걸까. 유재석이 (또) 대상을 탔다.
수많은 연말을 보내며, 그만큼의 첫 날을 시작하며 나는 고작 지난 해의 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뒤늦게 벼락 공부라도 하듯 침대에 누워 말일에 어울리 법한 말들을 떠올리려 해보아도, 멀어진 날만큼 생각은 아득하기만 하다. 한참을 뒤척이다 대충의 20년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저 사실 확인에 불과할 뿐인 이야기다. 책 작업에 계약서를 썼고, 도쿄에 출장을 갔고,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바다를 건너 좋아하는 기업 면접을 봤다는 것 정도. 그저 그런 이야기. 새벽이 되도 잠 못드는 불안을 잠재워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들. 그런데도 자꾸만 어제를, 더 어제를 돌아보려 하는 건 그나마 내가 가진 게 '어제' 뿐이어서일까? 아니면 연말 추억에 잠기고 싶어서? 근데 그걸 여태 몰랐나? 하루키가 옮긴 그레이스 페이리의 '불안'에서 메리 골드와 함께 사는 노파는 이른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창을 열고 아이들과 귀가하는 학부모 아빠들에 주의를 주는데, 그녀는 그들이 모두 다 떠나간 뒤 테이블에 홀로 앉아 골목을 지나 대로로 나설 그들을 걱정한다. 아이들이 성장해 맞이할 사회 풍파에서의 날들을 걱정한다. 그러니까 계속 걱정을 한다. 걱정, 그리고 불안. 그래서 20년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게 나를 걱정해주는 엄마와 누나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는 건 아니고, 불안과 함께 살았던 나들을 떠올렸다. 수많은 오지 않은 '내일' 앞에 실은 겁내고 있던 오늘들. 지금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건 얼마나 불안한가. 그리고 다행인가. 나는 자꾸만 불안해 어제를 찾고, 어제는 이곳에 없고, 뭉클한 향수라는 건 늘 잔혹한 내일의 불안을 품고있다. 내일이 이어지는 한, 불안도 잠들지 않는다.
*책 이미지를 제외하고 모두 ©️ 奥山由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