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경유하는 어제의 '미래 여행'
"사실 올해는 모든 것이 멈추고 디지털시계만 빠르게 돌아갔어요." 묵혀뒀던 기사를 읽다 이런 구절을 만났다. 같은 업계에서 시기는 겹치지 않지만 같은 잡지를 만들어온 사람을 선배라 한다면 김지수 선배가 한 인터뷰에서 꺼낸 이야기. 그날 밤 배우 스다 마사키는 라디오에서 "올해 1위 나왔네요. 기록 갱신이에요. '8월달 끝났네요' 같은 말에서 부터의 스피드? 2021 최단 나왔습니다. '벌써 이번 달 끝이네요' 체감 올해 1위 나왔어요"같은, 대체 뭔 소리인지 싶은, 하지만 대충 알 것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느새 끝나버린, 아니 끝나있는.
개인적으로 올해 8월도 9월도, 아니 여름도 가을도 두 해 전 도쿄에서 돌아왔던 그 겨울 이후, 모든 게 제자리인 것만 같은데, 시간은 당연히 아무일도 없다는 듯 잘만 흘러간다. 어느새 두 살을 더 먹고, 어쩌다 40 문턱을 넘고, 어느덧 가을을 만나고. 봄이 되면, 올해가 끝나면, 세상은 부쩍 내게 다가와줄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어디서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젠 그런 내일이 너무 익숙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오직 '끝남'만이 남아있는 어느 가을의 문턱. 실패한 계절만이 제자리를 맴도는 그곳에, 그렇게 어제는 아직 곁에 있었다.
선배의 저 말을 어쩌면 이곳의 남은 오늘을 의미하는 문장이 아니었을까. 디지털시계만 빠르게 돌아갔던 올해, 우리의 여름은 아직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문득 열어본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2년 전 난 도쿄에서 어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일지 모를 그 어제의 미래 지향적 내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그 기억의 오늘을. 이하 2019년 09월 29일의 기록.
요즘(2019년 무렵)의 도쿄를 보면, 시대착오적 몸부림에 마음이 수선하다. '캐쉬리스화(化)'를 추진하며 지갑에서 동전을 고르는 사람이 줄어드는 대신 카드, 혹은 스마트폰 결제를 장려하고, 체인 커피숍이 아닌 곳에서도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곳이 늘어난다. 도쿄의 인상과도 같았던 지하철 종이 전단 광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양쪽의 벽을 장식하는 건 잡지 지면처럼 넓게 펼쳐진 LED 패널이다. 누군가는 얄팍하고 이상한 우월감에 안도를 할지 몰라도, 아직 내일을 모르고 흘러가는 오늘에 때로는 마음이 놓일 때가 있다. 오래동안 좋아했고 도쿄를 찾을 때면 항상 들렀던 프레쉬니스 버거는 여전히 흡연을 할 수있는 곳이 많다. 킷사뗑이라 불리는 오래된 커피숍은 흡연석이 그저 여기거나 저기이고, 심지어 신주쿠의 '란푸루'는 지하가 금연, 1층이 흡연석이다. 금연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분연(分煙)을 얘기하는 도쿄는, 서로 다름이 서로 다르게 자리하는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쌓여온 어제를, 쉽게 외면하지 않는 도시의 인상이다.
프레쉬니스 버거에 잠시 앉았다.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벽에 두 곳이나 적혀있었지만, 소프트뱅크 고객이 아니면 사실 사용할 수 없는 번호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도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선 간단하긴 하지만 동의 버튼을 눌러야 하고, 대부분의 대형 쇼핑몰은 구글이나, 페이스북이나, 여러 SNS 계정을 통해 로그인을 해야한다. 여기는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답답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프레쉬니스 버거 고탄다 지점은 관광객 용의 와이파이를 별도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 보안과 안전. 하나의 망을 함께 이용한다는 것. 이럴 때 일본은 어김없이 일본이고, 여기와 저기는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고독하고, 그래서 수많은 혼자가 공존하는 도시 도쿄. 태풍이 물러가고 이상하게 폭염이 닥친 거리에서 입고있던 외투를 벗었다. 거대한 복합 빌딩 역사 앞 작은 흡연 구역에 서로 다른 5분 남짓의 시간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흘러간다. 함께, 그리고 각각. 나는 이 차가움이 왜 그리 좋았을까. 이 철지난 여름이 왜 이리 그리울까. 가져온 여름 옷이 얼마 되지 않는다.
도쿄가 멀다는 걸 아마 처음으로 느꼈다. 9시 비행기를 타고, 택시를 좋아하지 않아, 동시에 리무진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로, 잠을 포기하고 온 도쿄는 첫날이 길고, 또 길었다. 버스를 타고 오사키 역에 도착해도 고작 오후 2시 언저리. 사이에 이러저러한 일이 잘 되지 않아 이러저러하게 처리하는 탓에 길게 느껴진 시간도 있었지만, 예약해 놓은 미용실까지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오래 전 들렀던 커피숍에 들어갔다. 아오야마로 향하는 길변의 2층짜리 체인 커피숍. 원탁처럼 놓여있던 테이블은 긴 바 형태와 2인 테이블 여러 개로 단장되었고, 분연의 흐름은 이곳에도 불어 창 하나 사이로 난 담배를 필 수 없었고, 또 필 수 있었다. 10여 일의 일정을 앞둔 초조하고 설레는 전야의 커피 한 잔. 아니 담배 한 모금.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난, 숱한 어제에 취해있었는지 모른다. 그곳에 남아있는 기억들, 그곳을 경유한 시간들.
맞은 편 호텔에 짐을 풀고 기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조금 토라진 마음에 홀로 끼니를 때우던 늦은 저녁이, 그곳에 그렇게 남아있었다. 가끔은 외면받고, 가끔은 기대고, 가끔은 모른 척 시끄럽게 웃고 떠들던, 그런 계절이 그냥 아무런 의미없이 또 흘러간다. 이틀 연속 수면 부족에 고작 다섯 시간을 자고 일어났지만, 시대를 놓친 나의 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 쯤을 헤매고 있을까. 어제가 남기고 간 오늘이 아직도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