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 켄고와 나라 요시토모와 나와 너의 2021
사실 책을 받은 건 꽃이 피기도 이전이었는데, 고작 얼마 전에야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다고 이제야 다 읽었을까 싶지만, 애초 독서라는 건 바쁘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일상 어딘가 책을 펴는 한 자락을 품고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대충 봄날같지 못했다는 이야기. 아무튼, 감사한 마음에 도착한 책 '뮤지엄 게이트'는, 대부분 미국과 영국, 서구권의 뮤지엄, 그리고 곳곳에 놓여있는 하나의 '작품(사물)'에 주목하는데, 14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야기가 14개의 사물, 그리고 장소로 매칭되지 않는다. 애초 제목에서 암시하듯 '뮤지엄 게이트'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툭정 장소에 박제된 작품(사물)드의 장소성을 묻는 논쟁의 제기이고, 그렇게 시간과 장소로 해체된 기억의 역사를 헤짚어, 다시 엮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수 백년도 지난 사건에 현재란, 시간은 터무니없이 나약할 뿐이고, 나는 그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에 안장되어 있을, 보이지 않는 비밀을 기억하기로 했다. 뮤지엄 게이트, 아마도 이 문을 통과할 사람은 누구 하나 없(을지 모른)다. 공간이 위태롭다고 하는 시절, 우린 얼마나 공간에 수렴되어 있는가. 동교동에서 집에 놔두고 온 뜯지 않은 택배를 생각했다.
그리고, 요 며칠 자꾸만 생각나는 이미지 한 컷. 나라 요시토모는 어떻게 최근 더 주목받고 있는 듯한데, 근래 모리 미술관이 재개장을 하며 기획한 '별들의 전당 STARS展' 6인에 선정됐고, 코로나 이후에는 미국과 대만, 홍콩을 오가며 크고 작은 전시를 열었다. 그는 트위터에서도 참 열심이 모습을 비추는데, 4월 어느 날 홍콩의 밤거리를 달리는 '나라 요시토모 버스'가 참 이 시절 '별들'처럼 느껴졌다. 공간은 자꾸만 자리를 이탈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거기를 꿈꾸고, 소더비 경매장에 나온 나라의 작품은 또 누군가의,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어떤 날들을 살아갈지. 가끔은 여기가 아닌 너머, 현실이 아닌 아트, 해질녘 밤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쿠마 켄고와의 (아마도) 국내 단독 인터뷰가 지금 폴인에 공개되어 있어요. 자세한 건 프로필 똑똑 부탁드려요.
https://www.folin.co/story/1693
지난 2월 내가 1년 넘게 끙끙대던 첫 책을 완성했을 때, 유독 날씨가 험상궂고 다시 2단계가 발령됐을 때, 좋아하던 카페에서 '북토크'란 걸 마치고 석동은 다가와 '잠깐 얘기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예전 문화원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희녹'이란 걸 처음 알았다. 사실 근래 친환경이란 건 그 만큼의 고민 없이 쓰이는 경우가 많아 마트에 널부러진 흔한 구어처럼도 느껴지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것. 자연과 함께 산다는 건 새삼 주의가 필요한 말, 그런 자세이기도 하다. 그게 벌써 1년 전. 이후 난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도움을 준다고 자판을 두드렸고, 또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좀처럼 흐르지 않는 듯한 시간은 잘만 흘러 코로나도 이제 2년이다. 그리고 며칠 전 네이버에 '희녹'을 치고 푸른 빛 보틀의 '희녹'을 한 병 구입했다. 이건 제주도 편백나무 숲에서 얻어낸 증류액으로 완성한 일종의 '룸 스프레이.' 하지만 석동이 그 날 내게 열심히 이야기했던 건 '일부러 베지 않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태도의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친환경이 아닌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더디게만 느껴졌던 그 날 이후, 너와 나의 시간이 새삼 자연의 계절처럼 느껴졌다. 사용 소감은, 숲속에서 이솝의 '휠'을 뿌리는 느낌이랄까. '희녹'의 뜻은 전해들었지만, 세상엔 의미보다 어감, 체험으로 이해되는 말들이 있다. 품질은, 온갖 향수 다 섭렵하는 이의 작품이라면, 더 할 말이 있을까. 마스크를 쓰고도 봄내음을 찾곤한다.
그제 어쩌다 해를 넘기게 된 도쿄의 이야기, '2021 도쿄를 바꾸는 공간들'이 공개됐다. 첫 편은 어김없이 쿠마 켄고라 생각했(느꼈)는데, 요즘 그가 그렇게나 바쁜 건 좀 애잔한 운명같이 느껴진다. 사실 쿠마는 버블이 꺼진 뒤 10년 가깝게 일 하나 없이 지방을 전전했고, 어쩌다 당한 사고로 오른 팔을 (잘)쓰지 못하게 됐지만, 지방에서의 10년은 어디에도 없는 쿠마 건축을, 마음껏 쓰지 못한다는 '부자유'의 시작은, 애처로운 물기를 머금고 살아가는 요즘의 우리를 닮았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코로나 시절에 딱 들어맞는 이상향의 답안이랄까. 쿠마를 수식하는 건 많고도 많겠지만, 그 베이스엔 실패한, 어찌할 수 없는 패배의 어둠이 어김없이 꿈틀댄다. 그는 반골 기질의 건축가이지만 소심하고,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지만 그렇게 고독하고, 그래서 때론 누구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 빛을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이건 자조가 아닌 냉정이고, 체념이 아닌 긍정이다. 짓는 게 아닌 짓지 않으면서, 새로 만드는 게 아닌 다시 만들면서, 쿠마는 재생, 다시 시작하는 삶에 다가간다. 하루키 도서관 화장실 사이니지의, 그의 표현대로 '부유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처럼. 그의 건축은 수 백 억이 소요된 거대 프로젝트라 해도, 고작 '건물 하나'의 자리를 잊지 않고, 난 왜 이제야 그런 용기를 알았을까. 건축엔 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모두 잠시 쉬어가는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