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Aug 11. 2021

만날 '사람'은 아마,
어찌됐든 만나게 되어있다

가장 가까운 타임캡슐, 혹은 시간여행, 책과 나 사이의 유랑하는 달




타니자키 쥰이치로의 ‘공포(恐怖)'라는 글이 있다. 부끄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난 이 글을 고작 얼마 전에 알았는데, 그건 내게 좀 ‘유효한 공포'였(는지 모른)다. 세상에 공포란 다양한 크기의, 현실이거나 비현실, 여름이니 호러물 영화거나 드라마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하지만, 늦은 밤, 불꺼진 방, 오늘도 하루가 소멸을 향해가는 어둠 속, 타니자키의 ‘공포'는 왜인지 내가 아는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디테일은 달라도 정서를 함께하는. 보이는 건 상이해도, 뿌리는 어쩌면 같은. 여름도 벌써 네 번이나 흘려 보내고 또 한 번 찾아온 여름밤 어느 무렵. 설마 난 그 날의 ‘나'를 다시 마주하게 될 지 몰랐다. 그것도 타인을 경유해, 내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는 더욱더. 

타니자키의 ‘공포'를 시작하는 건 ‘내가 이 병에 걸리게 된(取り憑かれた) 건 어느 6월의 초입'이라는 좀 섬뜩한 문장. 난 그 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려버린 것(取り憑かれた)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아있던. 떠올려낸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다가온. 만날 이야기는 (어찌됐든) 만나게 되어있다.


'아오소라 문고青空文庫, 파란 하늘 문고'에서 출판된 전자판 문학 전집 시리즈 중 타니자키 쥰이치로의 '공포'


2021년 여름 어느날, 1913년에 쓰여진 타니자키의 짧은 수필을 알게 된 건 100% 우연에 의한 일은 아니다. 운명 같은 건 더욱더 아니다. 그저 근래 나의 밤 루틴이란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훑는 지지부진한 몇 시간이고, 최근의 ‘책'이란 건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이다. 신간이 출판되며 발췌되는 문장들은 얼마나 책 범주 안에 있는지, 혹은 밖에 있는지. 소위 ‘카드 뉴스'라는 건 얼마나 책이고, 또 책이 아닌지. 책은 어쩌면 책 밖에서 더 말 되어진다. 

지난 모 모임, 누군가는 카드 뉴스와 실제 글 사이에 압도적 클리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이책의 저물어가는 저녁처럼 이야기했는데, 독서라는 건 애초 무엇을 경유하는 경험일까. 또는 무엇을 위한 작용/반작용일까. 마케팅은 어쩌면, 어느새 목적과 수단을 넘어, 끝내 본질을 되묻는 질문이 되어버리고 만걸까. 정말로 그렇다면 난 잠시 책의 페이지를 덮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백 여 년 전 출판된 글을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혹은 사카구치 켄고와 같은 작가보다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제야 그것도 책이 아닌 ‘유튜브'로 알게된 건 더할나위 없는 부끄러움과 쪽팔림이라고, 어찌할 수 없이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하나의 (부끄러운) ‘시작’이 아니었을까. 시대를 초월해 남아있는 어제와 이제야 시작하는 오늘의 교차하는, 오직 그곳에만 작용하는 보이지 않던 시간의 ‘이상한 재래’와도 같은. 그날의 나는 얼마만큼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던지. 자리를 이탈한 ‘너'와 뒤쳐져 걷고있던 내가 어쩌다 마주해버린 별 거 아닌 기적같은 순간이, 그곳엔 분명 있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어느 작고도 깊은 밤, 타니자키 쥰이치로는 잠시 내가 되어있고, 나는 오래 전 그 날 속에 머물고. 공포는 분명, 공포를 알아보는 촉감을 갖고 자란다.


SPBS에선 시부야 골목 곳곳에 작은 박스 하나 모양의 책방(장)을 설치했어요. 프로젝트를 담당한 쿠로사와 점장은 책과의 우연을 설계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 전 도쿄에선 올해로 18년이 된 책방 ‘SPBS’가 마을에 책방을 설치하는 소위 ‘상자 하나의 책방', ‘SPBS THE BOX’란 걸 시작했다. 이건 말 그대로 상자 하나 크기만한 책방(이라기 보다) 책장을 마을 구석구석, 각종 상점 한켠에 설치(라기보다 놓아두는)하는 일련의 마을 재생 프로젝트인데, 책방은 책방을 허물고, 책은 시대를 망라해, 거리를 초월해 어떤 ‘우연' 위에 자리한다. 쿠로사와 점장은 '책이 가진 우연성을 의식한 기획'이라 이야기한다. 인터넷 서점은 책방의 물리적 거리를 단숨에 삭제해버린 일대 혁명의 ‘유통 시스템'이라 이야기되지만, 사실 책(혹은 책방)이란 본래 물리적 시공간을 넘어서는 비정형의 ‘무엇'이었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맥락 위에 움직이는 '그 시절, 그 장소, 그 관계에(만) 작용'하는 오리지널 서사임에 틀리없다. 책과 나 사이의 ‘우발성', 예기치 못한 사고, 뒤늦은 플래쉬백이거나 갑자기 내리치는 듯한 햇살의 알아차림 같은. 그런 ‘우연'의 한 권으로 수 천년을 흘러온 게 아마도, 책(이라 기억하는 그것)이란 '물건'이다. 책이 책방을 벗어났다는 건, 그렇게 별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SPBS의 ‘상자의 책방'을 도시의 언어로 풀어보면 ‘책방의 확장' 정도가 될까. 근래 책방은 전에 없는 다종한 변화를 보여주며 도시의 새로운 스케이프를 그려가지만, 책의 입장에서 그건 변화의 시절을 또 한 번 살아가는 ‘보통의 일상'일지 모른다. SPBS에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지금은 점장이 되어있는 쿠로사와 유다이 씨는 그 일의 원점이 ‘YATAI BOOKS’, 옮겨보면 '포장마차 책방'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책은 늘, 언제나 ‘이동하는 관계' 속에 살았다. YATAI BOOKS는 2017년 커뮤니티 스페이스 ‘국립본점'의 ‘포차 책방' 이벤트가 시작이고, 그 무렵 책방의 장르간 변주가 시작된 건 맞는 이야기이지만, SPBS의 또 다른 점장 출신 미타 슈헤이는 2015년 무렵부터 또 다른 ‘포차 책방' TRUCK BOOKS’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 이건 애초 '누가 먼저냐, 나중이냐'의 문제거나, 트렌드와 같이, 현실 시계 바퀴 돌아가는 듯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타는 “옛날엔 라면 포차, 군고구마 아저씨 처럼 포차로 책을 파는 가게도 당연하게 마을에 있었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어제가 내일이 되고 내일이 어제가 되어버리는, 묘한 뫼비우스의 시간의 교차로속의 책 한 권. 1931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지금 나에게 도착했을까.


시부야 뒷골목이란 의미의 '오쿠시부' 지역에서 20년 가깝게 책, 그리고 문화를 발신하는 SPBS. 작은 박스가 켜켜이 쌓인 책장의 집대성과 같은 느낌이에요.


코로나가 시작하고 1년 쯤. 시부야 츠타야의 묘한 광고를 봤다. 츠타야라면 다이칸야마의 세련된 큐레이션, 디자인에 인스타 단골집이 되어버린 면이 적지 않지만, 시작은 책과 CD와 DVD의 렌털숍. 세상이 일제히 와이파이를 타고 음악을, 책을, 영화를 주고받는 시절에 그들은 꽤 오래 자신들의 ‘루트'를 고집해왔는데, 만남이 ‘공포'가 되어버리는 팬데믹 시대에 아날로그 향수라는 건 마스크를 쓰고도 요구하기 힘든 추억에 불과하다. 이 시절 ‘중고'라는 것,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건, 더 ‘묘한' 찜찜함을 남기니까. 아무튼, 내가 ‘묘하다'고 느꼈던 광고는 일종의 리뉴얼, 모두 7개의 층을 쓰는 시부야 지점의 ‘렌털 섹션'을 새단장, 전과 다른 ‘플랜'을 구비해 운영한다는 이야기였다. 전에 없던 유행병 코로나는 책의 ‘이동'조차 움츠리게 한다. 

그들은 유명 유튜버와 손을 잡고 ‘개인의 콜렉션'을 시작했고, 연예인의 플레이리스트를 오픈해 ‘주관으로 셀렉한 CD코너'를 만들었고, 그러니까 와이파이가 하지 못하는, 이동을 감수할 만한 가치, 경험, 만남의 ‘기회 혹은 장면'을 진열해두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사람다운 것, 위기(험)를 동반하는 것, 하지만 오직 그것 뿐인 것. 렌탈이란 책, CD, DVD의 오고감이 아닌, 사람간의 만남이라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 사람간의 이동이 제한된 시절, 난 유튜브의 채널을 열고 일본에 사는 오카다 신페이 씨의 음성으로 1931년 타니자키 쥰이치로의 이야기를 듣고있다. 이곳에 어제는 묘하게 오늘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난 또 한 명의 나를 마주한다.


타니자키의 ‘공포'는 수필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좀 애매할 정도로 매우 짧은 글이다. 1931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게재되었던 게 굳이 이야기하면 ‘초판'이고, 이후 두 차례 타니자키 쥰이치로 ‘단편집', ‘전집'이란 형태로 ‘서적화', 출판 공개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과 나 사이에 교차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적다. 100여 년이란 세월은 나와 그를 '이곳과 저곳'으로 갈라놓았고, 오카다 씨의 낭독으로 옮겨진 ‘공포'가 얼마나 타니자키의 그것이었는지, 나는 가늠할 길이 없다. 다만, 세상 모든 이야기는 읽는(혹은 듣는) 이의 자리에서 완성되기도 하고, 어쩌면 난 그게 오리지널을 넘어서는 순간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활자가 책을 넘어선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야기는 온/오프, 시대와 자리를 이탈해 자유롭게 ‘각자의 자리'에서 재생되고 있으니까. 


츠타야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지점의 책 큐레이션 코너. 그리고 스트리밍 시절에 '듣고싶은 곡, 전부 듣고있나요?'라고 물어오는 CD 렌털 플로어 리뉴얼 광고 포스터.


"(도쿄에서) 교토로 돌아온 이후, 다시 불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간 결과, (그 병은) 어느새 다시 재발을 해버린 것이다. 친구 N 씨의 말에 의하면, 나와 같은 병-지금 떠올려도 정말 지긋지긋한, 불쾌하고 성가시고 딱하기 그지없는 그 병은, Eisenbahnkrankheit(철도병)이라 불리는 신경병 중 하나라고 한다. 철도병이라고 해도 내가 걸린 녀석은, 여타 부인들에게서 보이는 배나 차를 탔을 때의 어지러움이나 현기증이라 하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고뇌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타니자키의 ‘공포'는 첫 문장 이후 이렇게 이어진다. 난 이 대목에서 베개 옆 핸드폰을 조금 귓가에 가까이 두었는데, 내가 앓던, 5년 전 거리에만 나서면 몹시도 날 괴롭혔던 원인 모를 불안은, 몇 번의 병원 방문, 검사, 주치 닥터를 바꿔보아도 명확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결국 난 그 ‘이름도 모를 공포'와 1년 그리고 조금 넘는 세월을 함께 (소비)하고 말았는데,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살았는데, 나의 아팠던 5년이란 그저 나와 닮은 또 하나의 '상처'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시간'이란, 때로 기다림의 시간이곤 한다. 


이제야 종종 진통제를 먹으며 그래도 하루하루, 버티며 살고야 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못한, 빈 구멍, 철도병도 신경병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 무엇’은 이제야 조금, 자리를 찾은 듯한 착각도 들게한다. 어쩌면 처방보다 공감, 나의 이야기보다 너의 이야기. 마음을 치유한다는 건 이런 시간을 경유하는 세월이었을까. 사놓고도 보지 않은 책이 수두룩, 별 이유없이 수 년전의 책을 꺼내보는 내게 책을 고른다는 건, 내 안에 보이지 않던 ‘미해결' 미스테리를 좇는, 보이지 않는 너를 더듬어가는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했)다. 

한 차례 대대적 이사를 거쳐온 지금 내 방엔 제각각의 책들이 제각각의 자리에 놓여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책장’을 채우며 살아간다. 빈 자리를 메우듯, 혹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평생 채워지지 않을, 그리고  '너를 위해 비워진.' 타니자키의 '공포'는 교토에서 오사카로 향하며 "어쩌면 무사히 오사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안심이, 그제야 마음 속 한켠에 느껴졌다'로 끝이난다. 난 아마 그 즈음 눈을 감고 잠에 들었을까. 1931년과 2021년 여름, 그와 나 사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고, 만날 이야기는 아마 (어찌됐든) 만나게 되어있다. (終)


https://youtu.be/rA-84MumNXo






이전 09화 나와 너와 너의 나와 나의 너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